비밀리에 북한을 "우리 집 앞마당처럼 왔다 갔다" 했다는 한국의 '비밀 특수부대'

UDU의 뿌리와 창설, 해군 첩보부대에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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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DU(Underwater Demolition Unit)는 1950년대 해군 정보조직 내 수중 침투·폭파 전문조로 출발했다. 해군은 한국전쟁 직후 북한 해군의 도발과 선박 피랍에 대응하기 위해 1954년 ‘수중 폭파(UDU) 요원’을 선발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해군 정보부대(NIU) 산하 해상정찰대로 편제돼 북파·국내 첩보공작을 병행했다. 당시 UDU는 미 해군 UDT·초기 SEAL 조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실제로 수중 침투·기뢰 제거·도하 정찰·해안 침투를 담당하는 ‘한국판 UDT/SEAL’의 전신 역할을 했다. 1971년 해군첩보부대령에 따라 교육대가 설치되면서, 비로소 해군 내에서 ‘UDU=첩보부대’라는 명칭이 공식화되었다는 것이 여러 사료와 관계자 증언의 공통된 내용이다.

“북한 200회 이상 침투”와 막대한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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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와 국군정보사령부 관련 자료를 종합하면, 해군 첩보부대(UDU)는 1948년~1971년 사이 약 200회의 대북 특수공작 임무를 수행했다. 이 시기 UDU는 동·서해를 통해 북한 연해·도서·핵심 해안 기지를 정찰하고, 요인 암살·시설 폭파·탈출 지원·포로 구출 등 고위험 임무를 맡았다. 그 과정에서 약 300명 안팎의 대원이 전사·실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961년 정보부대 자료 창고 화재와 이후 군 기밀 폐기로 인해 정확한 작전 내역과 인명 피해는 지금도 완전히 공개되지 않았다. 일부 북파공작원 유족회 자료에는 북파공작원 전체(육·해·공 합산) 투입 인원이 1만3,000여 명, 이 중 귀환하지 못한 인원이 7,726명에 이른다는 추산도 실려 있어, UDU를 포함한 비밀부대의 희생 규모가 베트남전 한국군 전사자(약 5,000명)를 훌쩍 웃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산책 같다’는 표현의 진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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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인터넷 글에서 종종 인용되는 “북한을 우리 집 앞마당처럼 왔다 갔다 했다”는 표현은, 실제 UDU·북파공작 경험자들이 회상에서 비유적으로 쓴 말에 가깝다. 이들은 짧게는 수차례, 길게는 수십 차례에 걸쳐 동·서해를 타고 북한 해안·도서를 오가며 정찰·와이어탭(도청 장비 설치)·지형 표식·침투로 개척 등을 반복 수행했다. 그러나 이는 일상적인 ‘왕복’이 아니라, 매번 사살·피랍 위험을 안고 들어가는 편도 작전에 가까웠고, 귀환 루트조차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증언이 많다. 실제로 유족회 자료에서 “침투 작전은 있었지만 귀환 작전은 없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돌아오지 못한 동료가 절반을 넘는 팀도 적지 않았다는 회고가 이어진다. 결국 ‘산책’이라는 표현은 임무 난이도와 희생을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자조 섞인 농담이었지, 결코 가볍게 드나들 수 있는 작전 환경은 아니었다.

선발·훈련, UDT/SEAL 못지않은 극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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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DU는 모집부터 철저히 비공개 지원·선발 방식으로 운영된다. 해군 장병·UDT/SEAL 출신 등을 대상으로 자원·추천을 받아 선발하며, 선발 이후에는 UDT 기본교육 못지않은 고강도 BUD/S류(기초 수중 파괴·침투) 훈련을 거친다. 공개된 일부 증언에 따르면 UDU 최초 탈락률은 60~70%에 달했고, 특정 기수에서는 90% 이상이 중도 탈락한 사례도 있었다. 훈련 과목에는 잠수·수중 폭파, 야간 해안 침투, 고산·도서 지형 정찰, 암호 통신·암호 해독, 근접 격투(MUSAT류), 은폐·탈출·포로저항(SERE) 등이 포함되며, 합격자만 UDU 뱃지를 달고 실전 첩보부대에 배속된다. 이 때문에 예비역들 사이에서는 “UDT에서 다시 한 번 체를 치는 곳이 UDU”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대 내부에서도 최정예 중 최정예로 분류된다.

냉전기 북파에서 현대의 정보 특임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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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DU와 해군 첩보부대는 한국전쟁·냉전기 동안 영흥도·팔미도 등대 확보 공작, 인천상륙작전 지원, 휴전선 이북 해안 정찰 등 굵직한 작전에도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70년대 이후 북파 공작이 공식적으로 중단된 뒤에는, 해난 구조·대잠 초계·대테러 임무와 더불어 해외 파병 해상 특수작전에 일부 인력이 투입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UDT/SEAL 체계와 조직 재편이 이뤄지면서, UDU는 국군정보사령부 산하 ‘해상 특임 첩보부대’로 편입·분리되었고, 공식 명칭과 병력 규모는 지금도 기밀로 분류된다. 현재는 과거처럼 북한 내 심부 침투 작전이 빈번하진 않지만, 해상·수중 기반 정찰·감청·침투 임무와 사이버·전자전과 연계된 특수정보(SI) 수집, 유사시 후방 교란 임무 등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숨겨진 희생과 보상 문제, 여전히 진행 중인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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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DU와 북파공작원 출신들은 오랫동안 “국가가 우리를 잊었다”고 호소해 왔다. 비밀 공작의 특성상 이름·공적이 공개되지 못했고, 순직 시에도 유족에게 정확한 경위조차 전달되지 않는 일이 빈번했다. 2000년대 들어서야 국회와 정부가 특별법·보상 제도를 마련해 HID·UDU 등 특수임무수행자와 유족에게 국가유공자 예우·보상금을 지급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보상 규모와 대상 범위를 놓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점은, “북한을 산책하듯 드나들었다”는 과장된 표현 뒤에는,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실패 작전과 전사자, 그리고 지금도 인적사항조차 공개되지 못한 채 조용히 늙어가는 생존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UDU는 오늘도 공식 이름 없이 움직이는 한국 해상 특수전의 그림자이지만, 그 실제 전투력과 역사적 무게만큼은 분명히 실존하는, 대한민국 특수전사의 가장 극비이자 가장 치열한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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