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 2월 초 열린 독일 뮌헨 안보회의(MSC)에서 한국 기업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에릭슨, 노키아,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아마존웹서비스(AWS), NTT 등 글로벌 디지털 패권을 주도하는 기업들이 참여한 ‘신뢰할 수 있는 기술 연합(Trusted Tech Alliance, TTA)’에 한화가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TTA에 가입한 기업은 국내에서 한화가 유일하다. 우리에게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외신은 한화가 글로벌 에너지안보시장에서 빅테크의 ‘깐부’로 공식 인정받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자리에서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은 “에너지안보부터 주권 방산, 첨단 제조에 이르기까지 신뢰받는 기술 생태계는 사회를 보호하고 산업을 강화하며 미래의 회복탄력성을 만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한화가 단순한 산업 기업을 넘어 서방의 기술·에너지안보 구조 속에서 전략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한화의 미국 내 역할은 점점 ‘국가 인프라’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계열사인 한화비전은 AI 기반 지능형 영상보안 솔루션으로 스마트시티와 주요 사회기반시설의 감시 체계를 담당하고 있다. 최근에는 AI 경영시스템 국제표준 ISO/IEC 42001 인증을 획득하며 글로벌 수준의 보안 신뢰 체계도 확보했다.
한화시스템은 위성통신과 방산 전자 기술을 기반으로 우주와 지상을 연결하는 초연결 네트워크 구축에 나서고 있다. 미 국방부와 정부기관이 요구하는 데이터인프라영역에서도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여기에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방산기술이 더해지면서 한화는 영토·영공·디지털 공간을 아우르는 ‘토탈 안보 솔루션’ 기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한화의 전략적 가치가 가장 크게 부각되는 분야는 에너지다. AI 산업의 확산으로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빅테크기업들에게 안정적인 전력 확보는 더는 비용 문제가 아니라 기업 경쟁력과 직결된 핵심 요소다. 탄소중립 정책까지 더해지면서 재생에너지 기반 전력 확보 경쟁도 한층 치열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화솔루션은 미국 재생에너지 공급망의 핵심기업으로 떠올랐다. 한화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약 12GW 규모의 태양광 공급 계약을 체결했으며 아마존과 구글 등 주요 빅테크 기업들과 협력도 확대하고 있다.
조지아주에 구축된 솔라허브는 잉곳부터 모듈까지 태양광 생산 전 과정을 미국 내에서 완결하는 대규모 제조 거점이다. 이는 단순한 생산시설을 넘어 미국 태양광 공급망 재편의 핵심 인프라로 평가된다.
최근 중동에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이 충돌하며 사실상 전쟁 국면에 들어간 것도 이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중동전쟁은 글로벌 에너지시장의 불확실성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렸다. 국제 유가는 한때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다가 다시 하락하는 등 극심한 변동을 보이며 이른바 ‘유가 발작’ 현상까지 나타났다.
이 같은 유가 충격은 미국이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중동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에너지 공급망의 지정학적 리스크는 커지고 안정적인 전력망 확보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미국의 공급망 재편 전략 역시 중동 의존도를 낮추고 자국 내 안정적인 전력 생산 기반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지점에서 한화의 태양광 생산 능력은 단순한 산업 경쟁력을 넘어 전략적 의미를 갖는다. 조지아 솔라 허브에서 생산되는 태양광 패널은 데이터센터와 산업 인프라에 전력을 공급하며 미국 경제의 핵심 전력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한화가 구축한 사업 구조는 하나의 ‘안보 네트워크’처럼 작동한다. 한화솔루션이 에너지를 생산하고, 한화비전이 인프라를 감시하며 한화시스템이 데이터를 연결하고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이를 방어하는 구조다. 에너지·방산·디지털 기술이 결합된 이 구조는 단순한 기업 포트폴리오를 넘어 미국 국가 인프라와 연결된 전략적 산업 생태계다.
조지아에서 생산된 태양광 에너지가 아마존과 구글의 데이터센터를 가동하고 한화비전의 기술이 공공 인프라를 보호하며 한화시스템의 위성이 통신 사각지대를 메우는 순간 한화의 기술은 미국의 국가 운영 시스템과 직접 연결된다.
미국 전역의 데이터센터와 발전소에 새겨진 한화의 로고는 더는 외부 기업의 표식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의 안전과 번영을 지탱하는 에너지·기술 동맹의 상징이다.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되고 중동전쟁까지 겹친 2026년의 국제 질서 속에서 에너지 안보는 군사 안보에 버금가는 전략 자산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김동관의 한화'가 구축하고 있는 산업 네트워크는 단순한 글로벌 사업 확장을 넘어 미국이 쉽게 대체하기 어려운 ‘에너지안보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다. 제조에서 출발한 한화의 전략은 이제 에너지와 안보, 기술 동맹이 결합된 새로운 산업 질서로 확장되고 있다.
길진홍 산업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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