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정말 이별일까

네 알겠어요. 그럼 이제 우리 풋코는 갈 준비를 할게요. 약 처치는 당분간 그대로…. 가슴 한가운데를 뭔가 차갑고 묵직한 것으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귀가 아득해지면서 수의사 선생님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개가 어느 날 갑자기 아픈 게 아니라 천천히, 정말이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천천히 늙어가는 중이고, 이제 거의 막바지에 온 것이라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었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담담히 받아들여지질 않았다. 게다가 수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방금 전 내가 했던 말에 대한 답으로 돌아온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스스로 느끼는 충격이 좀 어이없게 여겨지기도 했다. 저는 그냥 시간만 좀 연장하는 거는 원하지 않아요. 풋코가 고통스럽지 않은 거. 그게 지금으로서는 저한테 제일 중요한 거 같고요. 그 결과 제 곁에 있는 시간이 좀 짧아진다 해도 괜찮습니다. 쿨한 체하며 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고 싶었다. 어떻게든 개를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싶었다. 하지만 고통만 남은 개의 삶을 내 욕심으로 붙잡고 있진 않겠다는 건 개와 나의 오랜 약속이었다. 입장을 바꿔 내가 그 자리에 선다면 아니 눕는다면, 나 대신 내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누군가 내게 그렇게 해주길 바랐다. 내가 바라는 대로 개에게 해주겠다고 오랫동안 다짐하고 또 다짐해왔다.
어어, 풋코. 도대체 몇 살까지 살려고 그래? 얼마나 오래 살려고 아직도 이렇게 팔팔하게 뛰어 다녀? 지난해 5월 어느 날 아침, 개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그 전까진 그런 말을 즐겨 했다. 내 개도 남의 개들처럼 늙고 병들고 아프다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런 날이 영영 오지 않는 건 아닐까 하고 막연히 기대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날은 오고야 말았고, 한번 아프기 시작하자 개는 계속 아팠다. 어떤 때는 매일매일, 어떤 때는 일주일 혹은 수 주일에 한 번씩 동물병원엘 다녔다. 어느 날은 좀 괜찮아지는가 싶다가도 또 다른 날은 곧 죽을 것처럼 아팠다. 일 년 반을 그렇게 살고 보니 과연 개가 팔팔했던 적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일이 있었던 기억은 나는데, 마치 전생의 일이거나 남의 일인 것만 같다. 아니 그것도 아니고, 좀 더 정밀하게 말해보자면 그런 일은 구글 드라이브 속 사진과 영상으로만 존재하고 나와 내 개에게 남아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죽음과 이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삶을 지속해오다 보니 한 가지 회의가 마음속에서 자라났다. 죽음은 정말 이별일까? 사랑하는 존재가 죽는다는 건 진짜 그를 어디론가 떠나보내는 일일까? 죽음 뒤에 다른 세상, 다른 삶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일 것 같다. 사랑하는 존재가 저쪽, 아마도 더 좋은 세상으로 먼저 떠났고 언젠가 나 역시 그쪽으로 건너가면 마침내 그와 재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 꽤 큰 위안을 주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삶의 끝이 모든 삶의 끝이고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면, 도저히 그 생각을 떨쳐낼 수 없는 사람이라면 다른 종류의 위안이 필요할 것이다. 그들에게 어떤 대상의 죽음은 이별이나 떠나보냄과는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 할 것 같다. 혹은 적어도 그들에겐 죽음을 이별로 비유하는 습관적인 표현에서 벗어날 권리가 있는 것 같다. 혹시, 혹시 말인데 과거의 좋았던 일들이 구글 드라이브에 데이터로 존재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존재도 죽음 뒤에 형태를 바꾸어 내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할 순 없을까? 나의 복슬강아지가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어느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면, 형태를 바꾸어 내 안에 스며드는 거라고 생각해선 안 되는 것일까? 근데 만약 이게 얼토당토않은 주장이고 내가 이별의 슬픔을 회피하려고 만들어낸 궤변이라면 이쯤에서 누가 저 좀 말려주세요.
정우열(만화가·일러스트레이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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