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에서 혼자 느긋하게 놀기 좋은 코스 5
안녕! 혼자서도 잘 노는 에디터 유정이다.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만, 틈틈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건 더욱 중요하다. 내 맘대로 먹고, 마시고, 걷고, 보면서 하루를 보내면 자연스럽게 나를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요즘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생각하다 보면 나를 더 잘 돌볼 수 있게 된다.
오늘은 서촌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기 좋은 코스를 소개한다. 나만을 위한 1인용 카페부터 아날로그 덕후의 심장을 뛰게 할 문구 편집숍, 독립서점 등 도보 10분 이내로 이동할 수 있는 다섯 곳을 추렸다. 이 코스를 참고해 서촌 골목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동네를 만끽하길 바란다.
➊ 카페 겸 상점
사직동 그 가게
종로구 사직동의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붉은 벽돌과 이국적인 문양들로 둘러싸인 ‘사직동 그 가게’가 나타난다. 손으로 쓴 간판과 입구에 적힌 티베트 속담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
공간은 카페와 상점으로 나뉜다. 먼저 왼편에는 ‘그 가게 짜이집’이 있다. 인도식 밀크티 ‘짜이’와 전통 요거트 음료 ‘라씨’, 그리고 커리를 파는 카페다. 인도에서는 40도가 넘는 날씨에도 펄펄 끓인 짜이를 마신다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탓에 차마 따뜻한 음료를 마실 엄두가 나질 않았다. 더위에 굴복하고 사직동 그 가게에서 개발한 레시피로 만든 아이스 카다멈 짜이를 주문했다.
짜이는 홍차, 우유, 생강, 향신료 등의 재료를 넣고 끓인 인도식 밀크티다. 인도에서는 커피보다도 쉽게 볼 수 있는 국민 음료라고 한다. 내가 주문한 아이스 짜이는 따뜻한 짜이만큼 향이 진하진 않지만, 코끝에 은은하게 맴도는 알싸한 생강과 화사한 향신료가 기분 좋게 향긋했다.
‘이 날씨에 에어컨을 안 켜다니..’ 밖은 해가 쨍쨍한 26도.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추운 사무실에 익숙해진 나는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원망 섞인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숨을 고르고 시원한 짜이를 홀짝이다 보니 창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서서히 땀이 식어가는 감각이 얼마나 좋던지! 창가에 걸린 티백에서 찻잎 향도 은은하게 퍼지니 쨍하게 시린 에어컨 바람보다도 훨씬 달콤했다.
여유를 즐기다 보니 옆 테이블에서 풍겨오는 진한 커리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다. 사직동 그 가게에서는 토마토와 양파, 향신료를 넣고 오랜 시간 졸여내는 인도식 커리를 선보인다. 전분, 밀가루, 시판용 소스나 인공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고 천연 향신료를 사용해서 맛과 건강을 모두 신경 썼다. 매콤한 치킨 커리, 부드러운 새우 커리, 우리 입맛에 익숙하게 재해석한 담백한 두부 커리 등이 있으니 식사 시간에 방문해도 좋을 것 같다.
사실 사직동 그 가게는 단순히 ‘인도 음식을 파는 곳’이 아니다. 인도 다람살라에 거주하는 티베트 난민을 지원하는 비영리 민간단체 ‘록빠’에서 운영하는 공간으로, 발생하는 수익금은 운영비를 제외하고 전부 난민을 지원하는 데 쓰인다. 사직동 그 가게의 직원들은 ‘지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전부 티베트 난민 사회에 힘을 보태기 위해 모인 자원봉사자다. 누구나 참여하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지기가 될 수 있다. 모집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https://www.instagram.com/p/C7tZIRwOXjR/)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직동 그 가게의 두 번째 공간은 짜이집 오른편에 위치한 상점. 공간은 넓지 않지만 눈길을 끄는 소품들로 가득하다. 한땀 한땀 손으로 새겨 넣은 자수 책갈피, 몇 겹의 천을 손수 누빈 천 가방, 사원에서 빚어낸 인센스, 뜨개 가방 등은 모두 인도에서 건너온 수공예품이다. 록빠는 단순 후원을 넘어 티베트 난민의 자립을 돕기 위해 인도에서 수공예 기술을 가르치는 작업장을 운영한다. 그곳이 록빠 1호점이라면, 사직동 그 가게는 록빠 2호점으로 티베트 난민 사회와 한국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전부 정성이 깃든 하나뿐인 수공예품이라 같은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꽃잎 같은 자수와 비즈로 엮인 책갈피를 하나 구매했다. 작은 소품을 구매하면 제공되는 포장도 귀엽다. 이면지로 접은 종이봉투에 담아 자투리 천을 붙인 클립으로 귀엽게 포장해 준다.
사직동 그 가게
서울 종로구 사직로9길 18 (월 휴무)
@rogpashop (https://www.instagram.com/rogpashop/)
➋ 카페
일인용 1P()
혼자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하기도 한다. 운이 좋으면 적당한 백색 소음 속에서 편안한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간혹 몰입이 어려울 때도 있다. 옆자리 대화 소리가 크게 들리거나, 노트북 배터리가 없는데 콘센트 좌석은 만석일 때, 매장이 좁아 오래 앉아있는 게 눈치 보일 때… 카페 ‘일인용’에 가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정해진 시간 동안 온전히 나만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니까.
미리 네이버로 예약하고 정해진 시간에 방문하면 된다. 1시간이나 2시간 중 선택해 예약할 수 있는데, 나는 촬영 시간을 감안해 2시간을 예약했다. 사장님의 안내에 따라 2층으로 올라오면 나를 위한 1인용 공간을 만날 수 있다. 가장 매력적인 건 정면의 통창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나무. 바람이 불면 싱그럽게 잎을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인 기준 1시간에 2만 원, 2시간에 3만 원이다. 여기에는 시간당 음료 한 잔과 디저트, 책 한 권의 대여비가 포함되어 있다. (아주 긴밀한 사이일 경우 최대 2인까지 예약할 수 있다고 안내하고 있으나, 혼자 방문해 온전히 나만의 공간을 누려보기를 바란다.)
책과 음료는 예약할 때 미리 선택할 수 있다. 커피와 카모마일 차, 위스키 중에 선택할 수 있는데 커피는 아메리카노, 라떼, 비엔나 커피, 비엔나 라떼 중에 고를 수 있다. 나는 비엔나 커피를 추천한다. 비엔나 커피로 유명했던 을지로 카페 ‘투피스’ 사장님이 새로 차린 공간이라, 보장된 크림 맛을 느낄 수 있다.
책의 종류는 많지 않다. 막상스 페르민의 ‘눈’,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롤 베 스타인의 환희’ 등 프랑스 소설 몇 권과 사진집 ‘사로잡는 얼굴들’ , 안미옥 시인의 시집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등 6권의 선택지가 있다. 나는 생소한 이름들 사이에 우연히 좋아하는 안미옥 시인의 시집이 껴있어서 골랐는데, 원하는 책이 없다면 직접 가져오거나 아예 책을 읽지 않고 시간을 보내도 된다.
하지만 책을 선택하면 좋은 점이 분명히 있다. 미리 고른 책에 맞춰 큐레이션한 음악 CD를 함께 제공하기 때문이다. CD플레이어에 헤드폰을 연결해 노래를 들어도 되고, 사장님께 요청해 뒤쪽의 스피커로 빵빵하게 음악을 감상할 수도 있다. 내가 고른 시집 OST CD에서는 가사 없이 전자음과 장작 타는 소리, 바람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로 이루어진 음악이 흘러나왔다. (앰비언트 뮤직이라는 장르라고 한다.)
오늘은 취재를 위해 찾아왔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지면 다시 이곳을 찾게 될 것 같다. 사장님의 표현을 빌려 설명하자면 ‘내 집같이 편하진 않지만 친구 작업실에 온 것처럼 자연스러운 공간’. 적당한 편안함과 적당한 긴장감(집처럼 벌러덩 드러누울 순 없으니) 속에서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일인용 1P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 33-1
@1p_news (https://www.instagram.com/1p_news)
➌ 문구 편집숍
파피어 프로스트
문구 덕후라면 이미 익숙할 브랜드, ‘아날로그 키퍼’가 운영하는 편집숍이 서촌에 있다. 상점의 이름은 ‘파피어 프로스트’. 파피어(papier)와 프로스트(prost)는 독일어로 각각 ‘종이’와 ‘건배’를 뜻한다. ‘기록하는 순간, 내 마음에 짠하고 울려 퍼지는 경쾌한 감각’이라는 의미로 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날로그 키퍼’라는 유명한 브랜드명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이름을 지은 건, 단순히 문구를 만들고 판매하는 브랜드를 넘어 기록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공간으로 첫 발자취를 내딛고 싶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 고민이 공간 곳곳에서 느껴졌다. 우선 기록을 위한 다양한 재료가 준비되어 있다. 단순히 제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것을 넘어 기록 초보자를 위한 좋은 가이드를 제시한다. 메모지와 노트, 형광펜, 볼펜 하나하나 직접 사용한 예시들을 함께 두어 이건 이렇게 써볼 수 있겠구나, 이건 저렇게도 활용할 수 있네, 하며 구경하는 맛이 쏠쏠하다. 정갈한 기록들을 보고 있으면 아날로그 기록이 익숙지 않은 사람도 ‘나도 한 번 써볼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것 같다. 파피어 프로스트는 이미 기록을 즐기는 사람도, 아직 시작하지 않은 사람도 모두 아우르는 공간이다.
쓰는 사람들이 느슨하게 연결될 수 있는 커뮤니티의 역할도 한다. ‘릴레이 레코드북’ 코너가 마련되어 있는데, 매일 달라지는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기록을 남길 수 있다. 글을 써도 되고, 그림을 그려도 좋다. 주제는 ‘생각만 해도 달콤한 언어’, ‘나의 귀여운 습관’,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등등. 기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파피어프로스트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7길 68-4
@papierprost (https://www.instagram.com/papierprost/)
➍ 독립서점
책방오늘
뭐든 온라인으로 쉽고 편리하게 살 수 있는 요즘이지만, 책만큼은 오프라인에서 사고 싶을 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 위주로 진열된 대형서점과는 달리 주인장의 취향이 십분 반영된 책들을 살펴볼 수 있으니까. 제한된 책장 공간에 고심 끝에 개성과 철학과 취향을 담아 채워 넣은 책들은 특별하다.
거기에 이런 쪽지가 붙어있으면 더 매력적이다. 왜 이 책이 여기에 있게 됐는지,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는지, 주인장이 해석한 책 설명 같은 것. 그 문장들 덕분에 책이 더 궁금하게 만든다. 베스트셀러만 읽는 것에 질렸다면 작은 독립서점을 찾아가 보자.
책방오늘이 여느 독립서점보다 조금 더 특별한 이유는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선 ‘비밀의 책 꾸러미’를 구매할 수 있다. 표지는 가려져 있고 책에 대한 짧은 감상이나 설명만을 읽고 선택해 책을 구입하는 방식이다. 어떤 책이 들어있을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열어볼 수 있다.
한쪽에서는 ‘작가의 서가’를 운영한다. 4월부터 6월까지는 소설가 최진영이 직접 고른 책들과 그 이유로 서가가 채워져 있었다. (우연히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의 이름을 발견하니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공중전화 부스가 눈에 띈다. ‘오늘의 전화부스’에서는 듣고 싶은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 박완서 등 원하는 작가의 번호를 누르면 50초 동안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외에도 북클럽, 낭독회, 글쓰기 워크숍 등 다양한 오프라인 이벤트가 열리니 관심 있는 사람은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되는 공지를 눈여겨보자.
책방오늘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6길 11
@onulbooks_in_seocho (https://www.instagram.com/onulbooks_in_seochon/)
➎ 셀프사진관
영카이브 서촌점
오늘 하루가 너무 완벽해서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면, 셀프 사진관에 방문해 보자. 인생네컷부터 하루필름, 포토이즘, 포토그레이 등 다양한 셀프 사진관이 있지만 ‘영카이브’는 조금 특별하다. 자체 개발한 아날로그 필름 필터를 씌워 서촌의 고즈넉한 옛 느낌과 정서를 사진에 담아낸 느낌이랄까.
홀로 남기는 사진이 어색한 사람이라면 부스 앞에 붙어있는 예시 사진의 포즈들을 참고해 보자. 나도 그중 하나라 ‘박명수 인생네컷’을 검색해 보고 따라 했다(ㅋㅋ). 혼자 사진 찍기, 별거 아니다.
영카이브에는 여러 부스가 있다. 각기 다양한 배경지와 프레임 컬러를 제공한다. 나는 서촌에만 있는 ‘온리서촌’ 부스에서 시그니처인 9컷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었다. 9컷의 A컷을 건지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결과물을 보니 마음에 들었다. 시간이 지나서 사진을 보면 오늘 하루가 더욱 또렷하게 기억날 것 같다. 참고로 QR코드는 모니터에만 띄워주고 인쇄되어 나오지 않으니 꼭 미리 찍어두시길. QR코드를 통해 빈티지한 필름 프레임이 씌워진 동영상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 참고로 서촌점 외에 망원점과 성수점도 있는데, 동네의 특성과 분위기를 살려 부스를 만드는 만큼 길에서 마주친다면 한 번쯤 들어가 보길 추천한다.
영카이브 서촌점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 47
@youngchive_official (https://www.instagram.com/youngchive_offi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