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뚫고 온 서신”…제5회 포항 장기유배문화제 개최
강진·남양주·포항 잇는 ‘3도 유배문화 교류’ 첫 추진
서간문 백일장·자발적 유배체험 등 인문 프로그램 운영

사람은 때로 가장 멀리 밀려난 자리에서 가장 깊은 문장을 남긴다.
권력에서 쫓겨난 선비들은 바람 거센 변방으로 유배되었지만, 그곳에서 삶을 다시 바라보았고, 자연을 읽었으며, 인간의 마음을 오래 응시했다. 누군가는 편지를 썼고, 누군가는 물고기의 이름을 기록했으며, 또 누군가는 끝내 돌아가지 못한 시간을 시로 남겼다.
경북 포항 장기가 올여름 다시 그 오래된 사색의 시간을 깨운다.

포항 장기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배지 가운데 하나였다. 동해 바람이 거칠게 스치는 이곳에는 수많은 유배객이 머물렀다. 그들에게 유배는 단순한 형벌이 아니었다.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자리였고, 동시에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화려한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사람은 오히려 자연의 숨결과 인간의 본성을 더 가까이 바라보게 된다. 장기의 바다와 숲, 오래된 길 위에는 그런 사유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장기면에는 이러한 유배의 역사를 오늘로 이어가기 위한 공간들이 하나둘 자리하고 있다. 장기유배문화체험관은 유배 제도의 역사와 장기로 유배 왔던 인물들의 삶, 당시의 생활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유배객들이 머물렀던 시대의 풍경과 기록을 통해 방문객들은 단순한 역사 지식이 아니라 '유배의 정서'를 체감하게 된다.

그 길 맞은편에는 장기 유배인 '심해용기념관'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조선 영조 시기 정치적 사건에 연루돼 장기로 유배 온 심해용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후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순수 민간 기념관이다.

이번 문화제는 단순한 전통행사나 역사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유배를 '고립의 역사'가 아니라 '사유와 교류의 문화'로 다시 읽어내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특히 올해는 경북 포항과 전남 강진, 경기 남양주를 잇는 '3도(道) 유배문화 교류'를 중심으로 축제가 펼쳐진다.
강진은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수백 권의 책을 집필하며 실학사상의 꽃을 피운 곳이다. 남양주는 다산 정신을 계승하며 인문 전통을 이어온 도시다. 그리고 포항 장기는 동해의 바람 속에서 수많은 유배객의 삶과 기록을 품어온 공간이다. 서로 다른 지역이지만, 유배라는 공통의 기억을 통해 하나의 인문적 길로 이어진다. 이번 교류는 단순한 지역 연계 차원을 넘어, 흩어진 유배문화 자산을 하나의 전국적 문화 네트워크로 확장하려는 첫걸음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문화제는 학(學)·문(文)·식(食)·락(樂)·풍(風)의 다섯 개 주제로 구성된다. 각각의 프로그램은 단순한 체험이 아니라 '유배의 시간'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살아보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먼저 '학(學)'에서는 3도 유배문화 학술교류와 인문해설사 교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유배문화 연구자와 해설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 지역의 유배 역사와 문화 자원을 공유하고, 오늘날 어떤 방식으로 계승할 수 있을지를 함께 모색한다. 장기가 단순히 귀양지의 이름이 아니라 학문과 기록, 인간적 성찰이 축적된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다.
'문(文)' 분야는 이번 축제의 정서를 가장 깊게 보여주는 프로그램들로 채워진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착안한 서간문 백일장은 떠나 있는 사람의 마음과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써보게 한다. 유배객들에게 편지는 단순한 안부가 아니었다. 외로움과 희망, 회한과 다짐이 담긴 삶의 기록이었다.
또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모티브로 한 자연관찰기록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흑산도의 바다를 바라보며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했던 정약전처럼, 참가자들도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사유의 시간을 체험하게 된다. 여기에 유배객들의 문장을 직접 써보는 서예·캘리그라피 체험도 마련된다. 붓끝으로 한 글자씩 눌러 쓰는 과정 자체가 곧 느린 성찰의 시간이 된다.
'식(食)'은 유배의 삶을 음식으로 풀어낸다. 화려한 진수성찬 대신, 오래 견디는 소박한 밥상이 중심이다. 열무비빔밥과 잔치국수, 우뭇가사리 같은 음식은 유배객들의 검소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 소박함 속에는 오히려 삶의 본질이 담겨 있다.
강진과 남양주, 포항의 차를 함께 맛보는 '3도 다례연'도 열린다. 서로 다른 지역의 물과 잎, 향기가 하나의 자리에서 어우러진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단순한 음용이 아니라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의식에 가깝다.
또 새끼줄 꼬기 체험과 전통 굿즈, 지역 특산물이 함께하는 '3도 물산 교류전'도 운영된다. 과거 유배지 사람들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 손으로 만들고 나누었던 생활문화의 감각을 시민들이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번 문화제에서 가장 인상적인 프로그램은 단연 '자발적 유배체험'이다. 참가자들은 현대의 유배객이 되어 장기중학교에서 출발해 유배문화길을 따라 장기유배문화체험관과 유배문화체험촌, 심해용 유배기념관 일대를 천천히 걸어간다. 유배의 제도와 역사, 이름난 유배객들의 흔적, 그리고 실제 이 땅에 정착한 한 인간의 삶까지 함께 이어지는 길이다.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시대 속에서 일부러 느린 길을 걷는 경험은 오늘의 사람들에게 낯설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후 참가자들은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의 적거지에 머물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휴대전화와 소음, 일상의 속도에서 잠시 떨어져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현대인에게 유배는 더 이상 물리적 형벌이 아니라, 어쩌면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 필요한 '잠시의 고독'인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해배행렬 재현'은 축제의 감정을 절정으로 이끈다. 유배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주민 참여형 마당놀이 형식으로 재현한다. 시민들은 포졸과 유배객, 마을 주민 역할을 맡아 이별의 편지와 한시를 읊으며 해배의 순간을 연기한다.
떠나는 사람과 남겨진 사람, 돌아오는 사람의 마음이 뒤섞이며 장기의 들녘 위로 오래된 감정들이 되살아난다. 그것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한국인의 집단적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리움'과 '귀향'의 정서를 불러내는 장면에 가깝다.
유배는 멀리 떠나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이 자기 안으로 가장 깊이 걸어 들어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빠른 속도와 소음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장기의 유배문화제는 잠시 걸음을 늦추고 자기 마음의 문장을 다시 읽어보라고 건네는 한 통의 편지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장기면 서촌리의 작은 기념관처럼, 누군가는 지금도 사라질 뻔한 시간을 조용히 기록으로 붙들고 있다.
올여름 장기에서 도착하는 '겨울을 뚫고 온 서신'은, 어쩌면 오래 잊고 지냈던 인간의 온기와 사유의 시간을 다시 떠올리게 할지 모른다.
포항문화재단 관계자는"장기는 단순히 유배객이 머물렀던 공간이 아니라 학문과 기록, 사람과 문화가 교류하던 장소였다"며 "이번 문화제를 통해 시민들이 유배문화의 가치를 직접 경험하고 공감하는 인문역사축제로 발전시켜 나가고자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