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도전·협력… 재계 신년사가 말하는 2026 생존 키워드

정효림 기자 2026. 1. 13. 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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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대 그룹 및 주요 대기업 신년사 키워드 분석
'미래·가치'는 퇴장하고 'AI·도전·변화'가 급부상

[우먼센스] 국내 10대 그룹이 올해 신년사에서 가장 많이 꺼내든 키워드는 '인공지능(AI)'이었다. AI가 산업의 경계를 넘어 업무 환경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면서, 거의 모든 기업이 이를 대응해야 할 위기이자 핵심 경쟁력을 좌우할 기회의 영역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와 함께 신년사 언급 톱 10 키워드에도 지각변동이 나타났다. 지난해 상위권이었던 '미래'와 '가치'는 순위권에서 밀려났고, 대신 '도전'과 '변화'가 부상했다. 재계의 중심 메시지가 어디로 이동했는지, 신년사에 담긴 주요 키워드를 통해 그 흐름을 짚어본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톱 10 키워드 지형의 변화…'미래' 빠지고 '도전'이 신규 진입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가 10대 그룹의 2026년 신년사를 분석한 결과, 올해의 키워드 판도는 지난해와 확연히 달라졌다. 이번 조사는 10대 그룹이 발표한 신년사 전문 또는 보도자료에서 주요 키워드를 발췌해 빈도를 집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삼성은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의 신년사로 대체했고, 재계 11위인 신세계는 농협을 대신해 조사 대상에 포함됐다.

'AI'는 지난해 9위에서 올해 1위로 급상승했고, 언급 횟수도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반면 지난해 1위를 차지했던 '경쟁'은 7위로 내려왔다. 특히 눈에 띄는 변화는 '미래'와 '가치'의 이탈이다. '미래'는 지난해 3위, '가치'는 공동 9위였지만, 올해는 모두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대신 '새로움'과 '도전'이 새롭게 순위권에 진입했다. 중장기 비전이나 경영 철학을 선언하는 표현보다, 당장의 위기에 대응하고 새로운 시도를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단어들이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경쟁'보다 '협력'과 '연대' 강조

올해 대기업 총수들은 경쟁보다 연대를 강조했다. 지난해 41회 언급되며 1위에 올랐던 '경쟁'은 올해 7위까지 밀려났다. 과거 신년사의 단골 문구였던 '경쟁에서 이기자' 대신, 올해는 '협력', '파트너', '생태계' 같은 단어가 더 자주 등장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AI를 중심으로 글로벌 산업 판도와 사업 구조가 재편되는 격동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가운데, AI는 이미 우리 일상 깊숙이 들어온 현실"이라며 "SK그룹은 세계 유수의 빅테크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AI 생태계의 핵심 파트너로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에너지, 통신, 건설, 바이오 등 SK그룹 계열사들의 역량 결집을 주문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역시 "내부의 힘만으로는 고객의 기대를 넘는 제품이 완성될 수 없다"며 "다양한 파트너들과 과감한 협력으로 생태계를 넓혀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AI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한 기업의 역량만으로는 생존이 어렵다는 판단 아래, 그룹사 간 협력은 물론 서로 다른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과의 연대, 나아가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과의 협력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사진=현대자동차그룹

높아지는 불확실성…빠른 대응 속도·민첩한 실행력만이 살 길

총수들의 발언을 종합하면 '미래'와 '가치'를 언급한 빈도는 줄어든 반면, 위기에 대한 인식과 대응 방식에 대한 주문은 한층 구체화됐다. 중장기 비전 선언을 넘어, 그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업무 속도와 조직의 민첩성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두드러진다. 

손경식 CJ그룹 회장은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며 "AI를 중심으로 촌각을 다투며 진화하는 디지털 기술은 국가와 기업의 최우선 경쟁력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이어 "사업의 모든 영역에서 속도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이제는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가 미래 시장의 승자를 결정할 것"이라며 속도감 있는 도약을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 사진=LG그룹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우리의 노력 못지않게 세상의 변화도 더 빨라지고 있다"며 "기술의 패러다임과 경쟁의 룰은 바뀌고 고객의 기대는 더욱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성공방식을 넘어 새로운 혁신으로 도약해야만 한다"고 주문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도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라며 "그동안 우리가 우려하던 위기 요인들이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는 한 해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빠르고 명확한 의사소통,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민첩한 의사결정"이라며 "보고는 적시적소에 빠르게 공유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현재의 속도를 끌어올리자는 메시지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기존 전략을 개선하는 수준이 아니라 룰을 새로 세우는 패러다임 시프트가 필요하다"며 "한 발 앞서서, 한 박자 빠르게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사진=신세계그룹

노태문 삼성전자 사장 역시 "시장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센싱하고 경영 활동 전반에서 민첩하고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빠른 실행력과 도전을 장려하는 문화를 정착시키자"고 밝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기술과 솔루션이 쏟아지는 AI 시대에, 몇 년 뒤의 청사진을 그리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중장기 성장 전략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제는 당장의 위기 속에서 기회 요인을 포착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실행력이 기업의 경쟁력과 생존을 좌우한다.

"가장 확실한 것이 미래의 불확실성이고, 가장 불확실한 것이 미래의 확실성"이라며 신년사를 마무리한 정의선 회장의 말처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의 도전, 오늘의 실행, 오늘의 변화다. 이것이 재계가 제시한 2026년의 생존전략이다.

신년사로 보는 총수별 리더십 스타일

신년사 한 편에도 리더의 성격이 묻어난다. 같은 위기를 말해도 표현 방식은 제각각이다. 올해 신년사를 뜯어보면 총수별 리더십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고전에서 답을 찾는 학자형

최태원 회장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사자성어를 꺼냈다. 그는 전체 구성원에게 이메일로 신년사를 전하며 "'승풍파랑(乘風破浪)'의 도전에 나서자"고 당부했다. 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쳐나간다는 뜻이다. 여기에 "법고창신(法古創新)"도 덧붙였다.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하자는 의미다. 위기 상황에서 고전의 지혜를 빌려 메시지를 전하는 스타일.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한자 대신 영어형

"1등 기업에 맞는 탑(Top)의 본성을 회복하자." 정용진 회장은 10분가량의 유튜브 영상을 통해 새해 인사를 전했다. 그는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패러다임 시프트가 필요하다", "룰을 새로 세워야 한다"처럼 직설적인 문장을 던진다. 사자성어 대신 영어 표현을 즐겨 쓰는 것도 특징이다. 79만 팔로워를 거느린 재계 대표 SNS 인플루언서답게, 신년사도 유튜브로 공개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함께 논의하는 소통형

현대차그룹은 딱딱한 발표문 대신 정의선 회장과 경영진이 대화를 나누는 좌담회 형식의 신년 영상을 공개했다. 혼자 선언하기보다, 임직원들과 함께 논의하는 모습을 통해 소통형 리더십을 선보였다. 그는 "결국 한 팀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며 팀십을 강조했고, 정주영 창업주의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면 된다"는 말을 인용하며 현대차 DNA를 환기시켰다.

구광모 LG그룹 회장: 발 빠른 PD형

구광모 회장은 지난해 연말, 전사 구성원에게 신년사 영상을 이메일로 전달했다.  LG는 구성원들이 한 해를 차분히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할 수 있도록 신년사를 연초가 아닌 연말에 전하고 있다. 올해는 MIT 연구원, 하버드 교수 등 외부 전문가 인터뷰까지 신년사 영상에 담았다. 마치 TED 강연처럼 신년사 자체를 하나의 콘텐츠로 기획하는 'PD형 리더십'이 엿보인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비공개 귓엣말형

이재용 회장은 올해도 신년사를 내지 않았다. 2014년 이건희 선대회장의 마지막 공식 신년사 이후, 삼성에서는 회장 명의의 신년사가 사라진 상태다. 대신 전영현 부회장과 노태문 사장이 DS·DX 부문별로 각각 메시지를 전했다. 이 회장은 공식 신년사 대신 주요 계열사 사장단과의 만찬을 가지며 경영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외 선언보다 내부 전달에 무게를 둔, 조용한 '귓엣말형 리더십'이다.

정효림 기자 jhlim@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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