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정책 당국자가 정답 없는 킬러 문항 풀어야 할 때”

김지영 기자 2024. 9. 26.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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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 가계·국가부채 3000조 시대]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진단

● 부채 증가는 주택 가격 상승과 경기침체가 주요 원인
● 기본과 원칙에 충실한 정책 외에는 방도 없어
● 재정지출보다 감세가 경기부양책으로 효과적
● 청년이 집 살 걱정 안 하도록 정부가 도와야
● 주택공급↑+감세+금리인하+재정지출↑
● 부도로 악화할 징조는 보이지 않아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주택공급을 늘리고, 금리를 내리고, 감세를 하고, 재정지출을 늘리는 기본적인 정책에 집중할 때”라고 강조했다. [박해윤 기자]
"가계부채가 1000조 원을 넘어선 10년 전부터 한국 경제의 뇌관으로 가계부채가 지적돼 왔다. 가계부채가 다른 나라에 비해 과도하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라면 국가경제를 흔들 만큼 위험한 것이 맞지만 우리나라의 현재 가계부채가 부도(不渡)로 연결될 확실한 징조는 보이지 않는다."

9월 2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만난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개인적 생각"이라며 세간의 우려를 이렇게 맞받았다. "가계부채가 1900조 원에 가까워 부도를 걱정하는 이가 많다"는 기자의 전언에 이어진 답이다. 가계부채가 1900조 원에 육박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가계부채는 1896조2000억 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1분기(1882조4000억 원)보다 13조8000억 원이 늘어난 수치다. 가계부채가 1800조 원을 처음 넘어선 것은 2021년 2분기다. 그해 1분기보다 41조2000억 원이 늘어난 1805조9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부가 가계부채를 관리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눈에 띄는 개선 효과는 없어 보인다.

무엇이 문제일까. 가계부채를 잡을 해법은 없는 것일까. 한국 경제 격변기마다 풍파를 견뎌내 온 강 전 장관에게 답을 물었다. 강 전 장관은 1970년 경주세무서 과장으로 공직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국세청, 재무부, 관세청, 통상산업부, 주미대사관을 두루 거치며 재정과 국내외 금융, 세입과 세출, 내국세와 관세를 모두 경험한 흔치 않은 경제 관료다. 또 1997년 IMF 외환위기 때는 재정경제부 차관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한국 경제에 닥친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기도 했다.

8월 초 세상에 나온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도전실록'이라는 경제 서적은 그가 40여 년간 경제정책의 현장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가늠케 한다. 한때는 온갖 욕을 먹은 그이지만, 현재는 "우리나라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이겨내는 데 앞장선, 실전에 강한 경제통"이라는 평가가 이어진다.

강력한 규제는 임시방편

가계빚이 1900조 원에 육박한다. 국가부채를 합치면 3000조 원을 넘는다(2분기 말 기준 3042조1000억 원). 주택담보대출 규모가 크게 늘어난 탓이라고 한다. 주택담보대출이 급증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근본 문제는 주택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데 있다. 주택 가격 상승이 예상되면 아무리 규제해도 주택담보대출 수요가 줄지 않는다. 경기침체도 주요 요인이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는 장사가 안돼 주택을 담보로 사업자금을 빌려 쓴다. 가계빚이 늘면 원리금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여윳돈이 없어 소비가 위축된다. 돈이 돌지 않으니 경제성장 둔화로 이어지고 경기가 좋지 않아 빚이 늘어나는 악순환이 거듭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스트레스 DSR'(대출 이용 기간 중 금리상승으로 인해 원리금 상환 부담이 증가할 가능성 등을 감안해 DSR 산정 시 일정 수준의 가산금리를 부과해 대출한도를 제한하는 제도)을 도입하는 등 주택담보대출 규제 강도를 한층 높였다. 가계부채 상승세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을까.

"최근 가계부채 증가 요인은 주택가격 상승과 경기침체가 아닌가 한다. 주택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영끌' 수요를 대출 규제로 막을 수 있을까. 일부 투기 수요는 억제되겠지만 근본적인 수요 억제는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코로나 사태로 인한 소비 패턴의 변화와 소비 위축에 따른 자영업자의 부채 증가는 금융대출 규제와 관계없는 생존형 부채여서 규제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앞서 "1900조 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가 부도로 연결될 확실한 징조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인가.

"위험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얼마나 위험한지, 어떤 것이 문제인지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그래야 제대로 된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판단된다. 다만 미국 경제이론을 바탕으로 답을 찾아선 안 된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상황이 많이 다르다. 미국은 한국처럼 전세 제도가 없고 집을 소유하기보다 임차하기를 선호하는 이가 많다. 아파트(apartment)는 임대 공동주택을 의미하고, 소유하는 공동주택은 콘도미니엄(condominium)이라 한다. 집을 소유하기 위해 담보대출을 받을 이유가 별로 없다. 미국은 경상수지 적자도 우리와 다르다. 돈이 없으면 찍어내면 되고, 달러 패권을 위해 무역적자를 만들기도 한다. 전 세계에서 달러가 쓰여야 통화로서 가치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미국 상황이 한국과 같을 수 없다. 아니 정반대다. 그런데 국내 경제학자 상당수가 미국에서 경제이론을 공부해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대책을 내놓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소형 공공주택 공급 확대 절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이하 연준)가 금리를 내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지금 집값이 다시 상승하는 추세인데 금리가 떨어지면 가계대출 규모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지 않을까.

"DSR이나 유주택자 대출 규제 등으로 억제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말한 대로 금리는 금융통화위원회(이하 금통위)의 고유 권한인가.

"우리 금통위는 미국 연준과 다르다. 미국 연준은 연방정부 부처고, 한국은행은 정부 권한을 법률로 위임받은 특수법인이다. 미국은 법률로 연준이 금리를 결정하게 했다. 한국의 금리 결정은 법률로 금통위에 위임돼 있지만, 한국은행법 92조에 기획재정부 장관의 재의요구권과 대통령의 최종 금리 결정권이 명백히 규정돼 있다. 이러한 권한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과 협의를 거쳐 세계적 통례에 따라 결정됐다."

가계부채를 효율적으로 줄인 해외 사례가 있나.

"미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의 가계부채는 우리같이 높지 않아 마땅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우리나라같이 전세 제도가 있는 나라도 없고, 주택을 소유하는 데 집착하는 나라가 없다."

인구 소멸 시대에 주택공급을 늘리는 것이 집값을 잡는 좋은 방법인가.

"인구구조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수요를 충족하는 방향으로 주택공급을 확대해야 한다. 1인 가구가 크게 늘어나는 추세인 만큼 작은 평수의 공공주택을 많이 공급해야 한다. 청년세대가 집 살 걱정을 하지 않도록 정부가 적극 나서서 도와야 한다. 그러면 주택가격도 안정되고, 경기침체와 저출산 문제도 해소하는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여건상 가계빚을 줄이기 위한 바람직한 정책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가계부채의 구조를 면밀히 분석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런 다음 정책을 세워야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있다. 특히 전세 제도와 전세담보대출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제도이니 관련된 부채 조사가 정확히 이뤄져야 한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로머 보스턴칼리지대 교수는 재정지출보다 감세가 경기부양에 효과적임을 실증적 연구를 통해 증명했다. [뉴시스]
‌현 상황에서 효율적 경기부양책은 국민지원금을 나눠주는 재정지출인가. 아니면 세금을 줄여주는 감세정책인가.

"재정지출보다 감세가 효과적이다. 미국 하버드대의 알베르토 알레시나 교수와 실비아 아르다그나 교수가 연구한 결과다. 이들이 1970년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1개 회원국의 92개 경기진작책을 비교한 결과 견실한 경제성장을 이끌어낸 성공한 경기부양책은 기업과 소득에 대한 감세정책이었다. 거의 전적으로 법인세와 소득세 감면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반면 실패한 부양책은 대부분 정부지출 확대에 의한 것이었다. 재정지출 증가는 대부분 실패한 것으로 분석됐다. 또 미국 대통령경제자문위원장을 지내고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로머 보스턴칼리지대 교수도 실증적 연구를 통해 이를 증명했다. 이 연구에 의하면 1달러의 감세는 3달러의 GDP를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다."

세계적으로 지금 경제 상황이 어떤가.

"미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 돈을 찍어내고 재정지출을 확대해 해결했다. 그 과잉유동성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2018년 미·중 무역 분쟁이 벌어져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세계 공급망 재편이 일어났다. 이어서 2020년 코로나 사태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2023년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나 경제의 불확실성이 최근 들어 가장 커진 상태다. 그런데 이 중 어느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세계 경제 전망은 밝을 수 없다. 인공지능(AI) 산업이 희망을 주고 있으나 기존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경제 규모를 크게 확대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최근 증권시장의 하락세가 이를 방증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밝은 면은 눈에 띄지 않는다."

농업, 교육, 의료가 미래 먹거리

우리나라는 코로나 사태 이후 경기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먹고 살기가 좋아질 거라 기대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너무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경기를 살아나게 할 방도는 없나.

"지금은 정답이 없는 킬러 문항을 풀어야 하는 것이 정책 당국자의 입장인 것 같다. 어쩌면 출제가 잘못됐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정부는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기본과 원칙에 충실한 정책 이외에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먼저 주택공급을 늘리고, 금리를 내리고, 감세를 하고, 재정지출을 늘리는 기본적인 정책에 집중할 때다. 각 부문 여건이 허락하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반도체, 자동차 산업이 한국 경제 부흥을 주도했지만 30대 이하 젊은이는 미래가 안 보인다고 말한다. 미래 일자리 창출과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산업은 무엇인가.

"지금은 AI산업에 기대를 많이 하지만 AI산업의 본질은 '사람을 대체하는 산업'이기 때문에 일자리 창출과 경제 활성화에 영향을 미치는 데 한계가 있다. 미래에는 수명과 소득이 늘어난 이들을 겨냥한 산업이 각광받을 것으로 전망한다. 인간에 이로운 최상급 농산물을 길러내는 농업, 우수한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산업, 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부응하는 의료산업이 그렇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IMF행을 서두른 한국은행과 이를 어떻게든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 재경원을 '국가 부도의 날'이라는 영화에서 정반대로 스토리를 설정했다는 비판이 들린다. 이를 바로잡는다면.

"기본 설정이 거꾸로 돼 있다고 하더라. 외환에 관한 정책은 정부 소관이다. 한국은행은 IMF에 가고 안 가고 선택할 권한이 없다. 정부에 조언은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역할은 없다. 실제로 IMF 외환위기 때도 한국은행이 한 역할은 별로 없다. 내가 한 대책 회의에 부르지도 않았고 참석할 수도 없었다."

경제관료로 가장 잘한 일과 후회되는 일을 떠올린다면.

"스스로 자랑하려니 민망하다. 굳이 말하면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IMF 회원국에서 최고의 재정건전성을 확립한 것, 그리고 미국 월스트리트에 채권발행을 함으로써 꿈의 한 자릿수 금리의 교두보를 마련한 일, 세계 어느 나라도 하지 않는 연구 인력비에 대한 25% 세액공제제도를 시행해 우리가 연구개발(R&D) 투자 1위가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후회스러운 일은 종부세를 완화만 하고 폐지하지 못한 것, 금융감독청을 미루다 설립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마음 아픈 일은 금융실명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금융실명제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계좌 정보가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많은 지도급 인사가 과도한 수사를 당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아프다."

윤석열 정부에 조언하고 싶은 것이 있나.

"작년 대(對)미국 경상수지 흑자 폭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지만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를 뺀 나머지 제조업 분야의 실적은 저조하다. 이제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는 한국 기업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다른 기업이 잘 풀려야 우리 경제가 살아난다. 두 회사를 배제하고 다른 기업도 성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국민은 정부에 기대하는 것이 많다. 지금 경제적 어려움은 우리 혼자의 노력으로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인 것 같다. 그렇더라도 정부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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