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억 유로 규모 ‘비밀 무기 계약’
미국이 중동에 대규모 군사력을 전개한 가운데, 이란이 러시아산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대량 구매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유출된 러시아 문서를 인용해, 이란이 약 5억 유로(약 8500억 원) 규모의 첨단 휴대용 미사일을 도입하는 비밀 계약을 체결했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란은 지난해 12월 러시아와 계약을 맺고, 베르바 발사대 500대와 9M336 미사일 2500기를 3년에 걸쳐 인도받기로 했다. 수량과 계약 규모 모두 단순 시험 도입을 넘어 체계적 전력 보강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제재 속 이어지는 러·이란 군사 협력
이번 거래는 서방의 대러·대이란 제재가 강화된 상황에서 성사됐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전문가들은 이를 통해 러시아와 이란 간 군사 협력이 여전히 긴밀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란은 러시아에 드론과 미사일을 제공해 왔다. 그러나 미국이 이란 핵시설을 공습했던 ‘12일 전쟁’ 당시 러시아는 실질적 지원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전직 미국 관리는 FT에 “러시아는 이번 거래를 관계 회복의 수단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며 전략적 이해관계를 강조했다.

‘러시아판 스팅어’ 베르바의 위력
베르바는 저고도 항공기와 헬리콥터, 순항미사일, 무인기 등을 요격하도록 설계된 휴대용 대공미사일(MANPADS)이다. ‘러시아판 스팅어’로 불릴 만큼 기동성과 실전성을 강조한 무기체계다.
이 시스템은 자외선(UV), 근적외선, 중적외선 등 3개 대역을 동시에 탐지하는 광학 시커를 탑재해 기만 플레어에 대한 대응 능력을 강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거리는 최대 6.5km, 요격 고도는 약 4km에 달하며, 미사일 속도는 초속 600m 수준이다.
대형 방공 시스템과 달리 복잡한 통합 절차 없이 운용이 가능해 신속한 실전 배치가 가능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파리 정치대학의 니콜 그라예프스키 교수는 “이란 군사력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않겠지만, 분쟁을 장기화하는 변수는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저고도 항공 작전의 새로운 변수
러시아 전략기술분석센터의 루슬란 푸호프 소장은 베르바가 저고도 헬기 운용이나 특수작전 항공 임무에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휴대가 가능하고 분산 배치가 쉬운 MANPADS는 비대칭 전장에서 특히 위력을 발휘한다.
중동처럼 광범위한 지역에서 드론과 헬기 운용이 잦은 환경에서는 항공 우위 확보가 더욱 복잡해질 수 있다. 이란이 수천 기를 확보할 경우 특정 지역의 저고도 항공 작전에 대한 위험도가 크게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중동 안보 지형의 불확실성 확대
이번 계약은 단순 무기 거래를 넘어 러시아·이란 전략 관계의 재확인을 의미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러시아는 제재로 고립된 상황에서 이란과의 협력을 외교·군사적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고, 이란은 방공 능력 강화를 통해 억지력을 높이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베르바 자체가 전쟁 판도를 즉각 바꾸는 ‘게임 체인저’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항공 작전의 위험을 높이고 군사적 계산을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중동 긴장이 고조된 시점에서 이뤄진 이번 거래는 역내 안보 환경에 또 하나의 불확실성을 추가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