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췌장암 정복에 다가선 하버드 출신 한국인 과학자
차세대 CAR-T 치료제 개발사 셀렌진 안재형 대표
아이폰으로 세계를 호령한 스티브 잡스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췌장암이다. ‘돈이 있어도 치료 못하는 병’으로 꼽히는 췌장암은 소리 소문 없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 5년 생존률이 10% 안팎일 정도로 위험하다.
바이오 스타트업 셀렌진의 안재형 대표는 췌장암 치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연세대에서 학사와 석박사까지 마친 그는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연구원과 강사로 활동한 과학자다. 현재는 셀렌진에서 차세대 CAR-T(카티)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안 대표를 만나 과학자의 창업 도전기를 들었다.
◇하버드 의대 연구원 출신이 창업을 결심한 이유
연세대 생화학과 88학번이다. 동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후 하버드 의과대학 박사 후 연구원과 전임강사로 재직했다. 이후 연세대 의과대학 내분비연구소와 서울대 세균의사소통창의연구단에서 연구 부교수와 전임연구원을 역임했다. 창업 이전에는 쎌바이오텍에서 연구 총괄 부문장 및 World Class 300 부문장으로 근무했다.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기초연구를 탄탄히 했다. 2008년에는 생명과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있는 과학 저널인 셀(Cell)에 논문을 게재했다.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드문 일이다. 포스텍이 선정하는 ‘한국을 빛내는 사람들’에 5차례 선정됐다.
- 연구자로서 훌륭한 커리어를 쌓았는데, 창업을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하버드 의대에서 보낸 6년 4개월이 시발점이었어요. 2000년대 초반을 함께 보낸 교수나 동료들이 기초연구 내용을 토대로 창업하는 일이 잦았어요. 당시 한국에서는 드문 일이라 신기했습니다. 연구자가 연구를 하는데 그치지 않고, 질병의 원인을 알아낸 후 치료제를 개발해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보고 시야가 탁 트인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성공한 분 중 가장 유명한 분이 모더나에 초기에 투자한 티모스 스프링거 교수입니다. 면역 분야에서 이미 유명한 분이었는데요. 좋은 연구를 사업화해서 큰 돈도 벌고, 인류에 크나큰 공헌을 했죠. 저도 연구 내용을 사업화해서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 연구와 창업은 결이 다르지 않나요.
“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빠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본인의 연구 영역이 최고라고 생각 하는 것이죠. 경험이 부족한데 사업화에 도전하면 실패 확률이 높아요. 기초 연구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그 내용이 진짜 약이 돼 사람들에게 투여되는 과정은 다른 이야기거든요. 연구자가 모두 할 수 없는 부분이죠. 2006년 귀국하자마자 창업을 결심했지만 오랜 시간 무엇을 하는 게 좋을까 고민했습니다. 제 연구와 관련이 있으면서도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는데 13년이 걸렸어요. 결론을 내리고 2019년 셀렌진을 창업했죠.”
- 어떤 결론을 내렸나요.
“췌장암을 타깃으로 한 카티 치료제입니다. 하버드에 있을 때 인슐린을 주로 연구했습니다. 인슐린이 당뇨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상식인데요. 하버드에서 인슐린과 인슐린의 신호전달이 노화와 암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어요. 관련 논문도 많이 냈죠. 췌장은 인슐린을 분비하는 생체 기관입니다. 췌장에 문제가 생기면 당뇨병에 걸리고 당뇨병 환자들이 췌장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요. 인슐린과 암, 당뇨의 연관성을 오래 연구한 경력을 살려 치료가 어려운 편으로 꼽히는 췌장암 치료제를 개발하기로 했죠.”
◇신개념 췌장암 치료제
카티란 환자로부터 채취한 T 세포 표면에 암세포의 특정 항원을 인지할 수 있도록 유전정보를 도입한 후 환자 몸에 주입하는 방식의 면역항암치료제다. 카티 치료제는 혈액암 치료에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췌장암 같은 고형암을 타깃으로 한 카티 치료제의 상용화 사례는 없다.
셀런진은 고형암 카티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개발 중인 치료제의 핵심 기술은 고형암에서 과발현되는 당 단백질 ‘메소텔린’(Mesothelin)을 표적하는 것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인정받아 중소벤처기업부, 한국연구재단, 국가신약개발 등에서 11개의 난치성 고형암 카티 개발 과제에 선정됐다. 덕분에 연구에 집중하며 후보물질을 발견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 왜 췌장암인가요.
“췌장암은 발견 시 수술이 어려운 경우가 많고, 재발율이 높아 생존율이 낮은 난치성 고형암입니다. 화학성 항암제가 있지만 효과가 일시적이며 독성으로 인한 부작용이 많습니다. 암 치료를 위해 유전자세포치료제가 개발되고 있지만, 가격이 높아서 접근성이 떨어지는 편이죠. 치료제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고형암 타깃의 카티 세포치료제를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 개발한 치료제의 핵심 기술이 궁금합니다.
“셀렌진의 카티는 췌장암, 난소암 같은 고형암에서 높게 발현하지만 정상 조직세포에서는 발현율이 낮은 메소텔린을 표적하는 항체를 탑재했습니다. 기존의 메소텔린 SS1은 쥐에서 유래한 항체인데요. 저희가 발굴한 메소텔린 항체 (CG34)는 인간항체이기 때문에 면역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메소텔린 단백질을 발견된 지는 오래됐지만 한국인 환자들의 메소텔린을 분석한 건 저희가 처음이죠. “
-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싶어요.
“메소텔린 단백질에 결합할 수 있는 미니 항체를 개발했습니다. 메소텔린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요. 기존의 메소텔린 항체는 앞부분을 인식해 표적율이 낮습니다. 항체가 암세포를 찾아서 죽여야 하는데 다른 단백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치료 효과가 떨어지는 것이죠. 실험실에서는 효과가 좋았지만 사람에게 적용되는 덴 무리가 있었습니다. 저희 항체는 메소텔린의 중간 부위를 인식합니다. 중간부는 다른 단백질이 결합하지 않은 빈자리입니다. 세포막과 가까운 부분을 인지하기 때문에 더 높은 항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 개발 과정을 알고 싶습니다.
“먼저 종양에 과발현한 메소텔린을 표적할 수 있는 미니항체를 발굴하고, 후보물질들의 암세포 살상 효능을 확인했습니다. 이중에서 항암 효능이 높은 미니항체를 카티로 제작해 면역이 결핍된 쥐를 대상으로 치료 효과를 확인했습니다. 치료제 투입 3주 뒤 종양이 거의 사라지는 걸 확인했습니다. 치료제를 투입한 쥐 6마리의 종양이 완전히 다 사라졌습니다. 좋은 실험 결과를 보고 ‘아 이건 되겠구나’ 확신했죠. 같은 실험을 통해 개발한 치료제의 난소암과 중피종 종양 억제 효능도 입증했습니다.”
- 개발한 치료제는 하나뿐인가요.
“하나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극히 드물지만 카티 치료제가 암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미국 식품의약국(FDA) 보고가 있습니다. 이를 참고해 치료제에 이상 반응이 나타날 때 이를 스스로 즉시 제거하는 자살유전자(suicide gene)가 삽입된 카티 치료제를 개발 중입니다. 단단한 종양도 뚫는 강력한 치료제도 개발해서 테스트하고 있어요.”
- 어떤 인력이 연구에 투입됐는지 궁금합니다.
“상주 인원 14명 중 11명이 생명과학을 연구한 연구자입니다.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의 췌장암 전문의도 비상주 인원으로 참여하고 있어요. 대부분의 인력이 연구 기간이 긴 40~50대인 해외 경험자들과 전도유망한 30대 연구자들입니다. 모두 본인의 분야를 꾸준히 연구하고 지적인 개발에 성취감을 느끼는 훌륭한 분들입니다.”
◇'세계 최초'란 꿈을 뒷받침해준 든든한 지원군들
지금까지 췌장암 카티 치료제 성공 사례는 없었다. 셀렌진이 성공하면 세계 최초가 되는 것이다. ‘세계 최초’의 무게는 무거웠다. 학계에서 존경받는 과학자인 안 대표도 창업가가 된 이후에는 끊임없이 의심의 눈초리와 싸워야 했다.
하지만 뚝심을 알아주는 이들이 더 많았다. 중소벤처기업부의 민간투자 주도형 기술창업 지원 프로그램 팁스(tips)에 선정되며 주목을 받았고 킹슬리벤처스, 한국벤처투자, 하이투자파트너스, 에스제이투자파트너스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서울시가 조성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 고려대가 운영하는 바이오, 의료 창업 혁신 플랫폼인 ‘서울바이오허브’의 지원도 받고 있다. 지원과 인정을 받은 덕에 우리나라와 미국, 중국, 일본, 호주, 캐나다, 싱가포르 등 한국을 포함한 7개국에서 특허를 받았다.
- 의심과 회의와 싸우는 과정이 쉽지 않았겠어요.
“치료제라는 물적인 성과가 있다면 인정도 받고 투자를 더 많이 받을 텐데, 개발단계에서는 매일같이 증명해야 하니 힘들었습니다. 연구내용을 사업화 하려면 충분한 인프라와 자금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가능성을 의심하는 시선과 매일같이 싸워야 했죠. 지원자와 받는 사람의 의견차가 도돌이표 같았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요. 저 역시 ‘나야말로 연구자의 오류에 빠진 게 아닐까’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잘 설득하고, 어떤 점을 보완해야 하는지 생각하지만요.”
- 서울바이오허브에서는 어떤 지원을 받았나요.
“2019년 6월에 창업해 11월에 서울바이오허브에 입주했습니다. 사무실과 연구 공간을 지원받았죠. 바이오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시설 확충이 큰 부담입니다. 한 대에 3억~5억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장비가 필요하니까요. 공용실험실 덕분에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죠. 세무, 노무 등 행정적인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홍보 창구도 마련했고요. FTO 분석 프로그램도 유용했습니다. 보유한 특허의 기술성을 평가하고 침해요소가 없는지 확인하는 절차인데요. 서울바이오허브와 연계해 메이저 로펌인 법무법인 율촌을 통해 FTO 분석을 했습니다. 무단으로 저희 특허를 쓰고 있는 기업도 포착했어요. 타 기업의 기술과 상충되는 게 없는지 확인하면서 해외 진출의 초석을 마련했죠.”
- 입주 공간이 아주 깨끗하고 좋습니다.
“현재 입주한 글로벌센터는 올해 4월에 개관한 새 건물입니다. 글로벌센터 내 독립공간에서 습식 실험이 가능할 뿐 만 아니라 서울바이오허브 내 공용장비도 이용할 수 있어요. 치료제 개발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죠. 또한 홍룽 강소연구개발 특구에 위치한데다 주변에 국내 유수의 대학 및 병원이 많아 지리적으로 협업이 용이합니다. “
- 7개국 특허라니, 아주 큰 성과 아닌가요.
“그동안 핵심 기술을 공개하지 않았더니 기술이 없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제는 밝힐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미국 특허 등록 전과 후의 반응이 크게 달라졌어요. 해외에서 저희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유명 기업의 연락을 많이 받았습니다. 기술이전 방안이나 협력 포인트를 모색 중이죠. 세계 2위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과도 접촉해 파트너십 기반의 생산 방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1조원 신약의 꿈
췌장암 카티 치료제는 ‘블록버스터’ 신약이 될 수 있을까. 매년 전세계적으로 50만면에 가까운 췌장암 환자가 발생하는데 이 중 약 35만명이 메소텔린 발현 환자다. 현재 카티 치료제의 국내 단가는 3억6000만원, 해외 단가는 5억~6억원인데 메소텔린 발현 환자의 0.8%만 타깃으로 해도 예상 판매량은 3000개다. 췌장암 카티 치료제가 1조원 이상의 매출을 내는 약물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블록버스터의 꿈을 위해 2025년까지 핵심 기술을 기반으로 사업 확장에 집중할 계획이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 시험도 준비 중이다. 2026년 코스닥 상장 후 본격적으로 해외 시장에 진출할 구상이다.
- 지금까지의 소회가 궁금합니다.
“세상의 누구도 하지 못했다고 저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시선에 대해서 답답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현재 100% 이루진 못했더라도 본질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합니다. 췌장암의 본질을 알아야 이에 걸맞은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으니까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저는 셀렌진의 카티 치료제가 상용화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치료효과가 좋은 약을 널리 보급해서 사람들에게 건강한 삶을 선사하고 싶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요.
“파이프라인을 다양화할 겁니다. 기반을 잘 다져두면 글로벌 제약사나 경쟁사도 무시할 수 없는, 믿을 수 있는 회사로 성장할테니까요. 경쟁은 두렵지 않아요. 저희가 가장 잘 하고 있으니까요. 세계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서 경쟁하는 하버드에서도 배운 게 바로 경쟁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최고였던 과거를 잊고 선 자리에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라는 주문이죠. 암 치료제 시장은 앞으로 커질 겁니다. 저희는 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겁니다.”
/진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