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합쳐지기 싫다”…편입 거부한 지역들, 무슨 이유길래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2023. 11. 2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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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울의 확장사를 따라 걷다 (2)
경기도에 예속된 경성부
1910년 한일 병합과 함께 한성부는 일본 제국의 식민 중심지로서 ‘경성부’라는 이름으로 개칭됩니다. 한성부가 지금의 ‘서울특별시’와 마찬가지로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반면 경성부는 경기도 안에 예속된 지역이었습니다. 수도의 지위를 낮추고 경기도청 관할의 한 도시로 격하시키려는 조선총독부의 의도였습니다.
1926년 남산에서 내려다본 경성 시가지의 전경. [서울역사아카이브]
이듬해인 1911년 총독부는 경성부 성내를 5부, 성외를 용산·서강·숭신·두모·인창·은평·연희·한지의 8면으로 구분하는 5부 8면제를 실시합니다. 이렇게 조선은 비록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초기 경성의 행정구역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습니다. 일본의 조선지배체계가 자리 잡지 않았기도 했지만, 수백 년 세월이 쌓인 수도의 역사성을 거스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청에서 교열하고 경성일보사에서 1914년에 편찬한 <경성부명세신지도>. 도성 안과 용산에 국한하는 경성부의 범위가 나타나 있다. 한성부의 위치에는 체신국이, 의정부 터에는 경기도청이 자리잡았는데 이는 조선이 식민지화되면서 수도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울역사아카이브]
1914년은 사상 처음으로 서울의 영역이 축소가 된 해였습니다. 대대적인 부군면 통폐합을 시행하여 숭신면과 한지면 일부만 경성부에 소속하고 나머지는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시켜 버립니다. 지금으로 치면 사대문 안과 창신동과 숭인동, 용산구와 마포구의 일부만 경성부의 테두리 안에 둔 것입니다. 이 지역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류하던 장소였습니다. 동시에 행정구역 단위를 동·정·통·정목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시가지 계획으로 경성을 개조하라
1930년대 전 세계에 불어든 대공황은 경성의 도시계획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제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일본의 대륙 진출이 확대됨에 따라 조선의 병참 기지화가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경성의 근대도시화가 선제되어야 했고,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경성 개조’ 사업을 역점에 두었습니다. 경성은 급격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였습니다. 1934년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법인 ‘조선시가지계획령’이 발표되며 서울은 동아시아 거대 도시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26년 10월 완공 직후의 경성부청(왼쪽). 해방 이후 경성부청 청사는 서울시청으로 사용되었다. 서울시청 신청사 준공 후 2012년 새단장하여 서울도서관으로 개관했다. [서울역사아카이브·한주형기자]
근대화를 거치며 일본에서는 도시계획이 국가의 입장에서 인구와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운용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인식이 마련되었습니다. 조선시가지계획령은 이러한 흐름을 경성에 적용한 도시계획입니다. 즉, 경성을 자원 동원이 용이한 식민지형 도시로 만들기 위한 법령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선시가지계획령은 지역 및 지구의 지정, 토지구획정리 등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토지이용규제를 위한 용도지역제도와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위한 최초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조선시가지계획에는 경성의 행정구역이 확장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시가지계획령의 시행 취지가 경성부 내의 각종 도시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경성 외곽지역을 신시가지로 개발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920년대 숭인면(현 성북구) 일대의 토막민 수용지의 모습. 이 시기에는 경성의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주거문제가 심각해졌고, 도시빈민은 외곽지역으로 떠밀렸다. 이들은 ‘토막’이라 불리는 멍석집을 만들어 살았는데, 일제는 교외지역에 토막민 수용지를 설정하였다. [성북문화원]
조선시가지계획령이 발표된 것은 1934년이지만, 사실 그보다 십여 년 전부터 경성의 확장계획은 차근차근 준비되어 왔습니다. 1920년대 초부터 도시화와 이촌향도현상으로 경성부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였습니다. 경성 외곽 지역에도 인구가 증가해 이곳에도 자연스럽게 도시가 형성되었습니다. 경성부는 1921년 ‘대경성’을 건설한 도시계획 준비를 위해 조사계를 신설합니다. 조사계 서기 시무라 기즈오는 매일신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경성부 중심부로부터 일대 ‘콤파스’를 돌려 (중략) 일정 범위 안이 장래 경성부의 범위가 되겠고 지금 시계는 약 2배 넘게 확대될 터이라”라고 말합니다.

경성부는 이 구상에 기초해 실무 작업을 이어갑니다. 1923년에는 행정구역의 확장안과 교외 도로망의 초안을 만들었고, 2년 뒤인 1925년에는 부내 지역 뿐 아니라 뚝도·숭인·연희·용강·은평·한지면 등 인접 지역의 인구 증가 추이 분석까지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교통과 인구에 대한 조사를 완료하고, 1926년 ‘경성도시계획 구획설정서’를 완성합니다. 이 계획안이 제시한 모습대로 경성이 바뀌진 않았지만, 이 내용은 1936년 ‘대경성계획’에 반영되어 더 넓은 범위의 경성 확장이 이루어졌습니다.

편입 거부한 영등포, 반대 의결서 제출한 고양·시흥
그때도 지금처럼 경성의 확장에 대해 이해관계가 얽혀 있던 경성부와 경기도 지역들 사이에서는 갑론을박이 오갔습니다. 1934년 편입 관련 협의를 위해 경기도지사와 경성부윤, 경성부 주요 관리, 편입 지역 대상의 군수와 읍·면장들이 참여한 협의회가 열렸습니다. 결론적으로 협의회에서는 경성부가 제출한 안이 가결되었지만, 강경한 의견이 오가는 등 사뭇 무거운 분위기에서 회의가 진행되었습니다. 그해 연말 경기도가 경성부 확장안의 최종 심의를 시작하자 ‘쪽제비 꽁지 같은 긴요한 곳’, 즉 시군 내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을 경성부에 통째로 내주게 생긴 고양시와 시흥군은 반대 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합니다.
1901년 8월 영등포역에서 경부철도(북부)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영등포구청]
1901년 8월 경부철도 개통 초창기 영등포역 일대의 모습. [영등포구청]
그중에서도 영등포읍은 경성의 편입에 대해 반대가 거셌습니다. 조선 제일의 공업지역인 동시에 경부선 철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였던 영등포는 굳이 경성에 속하지 않아도 공업도시로 성장하여 자족적으로 발돋움할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부채가 90만원에 이를 정도로 재정이 취약한 경성부에 편입되면 부담만 가중될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또한 지역 유지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도 경성 편입 반대에 한몫했습니다. 10석인 읍회 의석수가 경성 편입 이후 3~4석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측되어 의원직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지역 유력자들의 불안감이 작용한 것입니다.
1930년대 경성방직 영등포공장의 모습(왼쪽). 경성방직 공장은 방직기 224대를 소유하였고 영등포역 앞에 위치했다. 오른쪽은 1936년 종연방적 영등포공장의 전경. 종연방적 공장은 8만 평의 부지에 방적기계 5만 추와 직기 1,600대를 갖춘 최신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영등포구청·서울역사아카이브]
영등포역 동쪽에 인접한 소화기린맥주 영등포공장의 전경을 담은 ‘경성부 영등포 명소’ 사진엽서. 1930년대 후반 제작 배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33년 창립한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는 일본의 ‘기린맥주주식회사’의 자매회사로 약 2만 평 규모의 맥주제조공장이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영등포에서는 경성 편입과 관련한 몇 번의 회의가 거듭되었지만 답을 내지 못했습니다. 조선인 유지로 구성된 조건부 찬성 측에서는 편입에 동의하는 대신 영등포 부회 의원을 많이 배당하고 읍의 재산을 대가로 간선도로나 지하도로 부설권, 학교 등 기타 설비 증설 우선권을 받을 것을 주장합니다. 일본인 유지로 구성된 반대 측은 ‘편입의 이유를 근본적으로 따져 물었을 때, 이는 경성부에 지방적 이해관계일 뿐이며 편입하면 후에 화근이 될 것’이라며 오히려 영등포읍에서 영등포부로의 독자적인 승격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지난한 논의 끝에 나온 결론은 다소 아리송했습니다. ‘영등포의 경성 편입은 반대하나, 당국에 대해 반항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영등포에 시가지계획령을 적용하는 것은 찬성, 그 결과로 경성부 소속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936년 4월부로 영등포읍, 연희면, 은평면, 숭인면, 뚝도면, 북면, 양동면이 경성부로 편입됩니다. 경성부의 면적은 종전 36.18㎢의 약 3.64배인 133.9㎢가 되었고, 인구는 63만 6,8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행정구역 확장 중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경성부가 영등포 일대를 모두 포함해, 서울이 역사상 처음으로 한강 이남지역을 행정구역으로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에는 주요 공업지역인 영등포를 경성부에 편입시켜 일원적으로 통제하고자 했던 총독부의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1936년 제작된 <경성시가지계획평면도>. 노란색으로 칠해진 구역이 토지구획정리사업 대상지이고 붉은색과 녹색의 선이 신설 예정인 가로망이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일제는 1937년 새로 경성부에 편입된 지역을 대상을 7개 지구(영등포·대현·한남·사근·돈암·번대·용두지구)를 첫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정하였고, 1940년부터 1942년도 사이에 청량리와 신당, 공덕지구를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추가 지정합니다. 총독부는 각 구역마다 개발 구상을 선제적으로 정하고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연희(신촌)와 용강(마포)은 주거와 공업 혼용, 은평(홍제)은 주거와 풍치지구, 숭인(청량리)과 한지(왕십리)는 주거 위주에 소규모 공업, 한지(한남)는 고급주거지, 영등포는 공업, 북면(노량진)은 주거 위주로 개발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메가서울의 구상
1948년 미군장교 노브 파예가 촬영한 부평 캠프 하이예스와 캠프 마켓의 전경. 이곳은 미군기지 이전에 일본육군조병창이 위치해 있던 곳이다. 1939년 일제는 부평에 일본군의 전쟁 물자를 조달하던 병기 공장인 조병창을 설치했다. 해방 직후 미군은 이곳을 접수, 구역을 나누어 각각 캠프 마켓, 캠프 그랜트, 캠프 타일러, 캠프 해리스, 캠프 하이예스로 이름지었다. 이 사령부의 두문자어를 따서 그 일대를 ‘ASCOM(애스콤) 시티’라고 불렀다. [노브 파예]
1930년대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며 식민지 조선의 모든 물자와 인력은 전쟁 수행을 위해 소모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영등포로부터 인천까지 늘어선 공업단지는 군수물자를 만드는 중요한 생산지였습니다. 이곳에서 제작한 물자는 경인선 철로와 서해를 통해 내륙 격전지로 조달하는데도 용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1939년 10월 2일자 동아일보. ‘대확장되는 경성부역’의 제목과 ‘경인공업지 대부분 경성에 편입’이라는 부제가 적혀 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쳐]
1939년 일제는 경성에서 인천 사이의 광대한 구역을 개발하는 내용이 담긴 경인시가지계획을 발표합니다. 이 계획은 경인공업단지를 개발해 군수기지로 만들려는 목적이 짙었습니다. 개발 범위는 타 시가지계획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넓은 3억 5000만 제곱미터의 면적으로, 부천군과 시흥군, 김포군 등 서로 다른 행정구역이 하나의 시가지계획으로 구획되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도시계획에는 총독부의 여러 의중이 담겼지만, 시중에서는 이 계획지의 대부분이 경성부로 편입될 것이라는 판단이 우세했습니다. 1939년 ‘대확장되는 경성부역’이라는 제목의 동아일보의 기사는 이 분위기를 잘 설명합니다.
1939년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경인시가지계획 평면도. [인터넷 캡쳐]
1940년대 들어 경인시가지계획구역의 상당부분이 인천시가지계획구역으로 편입되며 이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또한 태평양전쟁의 기세가 기울며 경인권역을 중심으로 하던 시가지 계획들도 동력을 잃고 흐지부지됩니다. 우리의 자율적인 권한 없이 식민지 지배 아래서 나온 구상이었지만, 80여 년 전 ‘메가 서울’에 대한 발상이 등장한 점은 짚어볼 만 합니다. 다음 화에서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의 서울의 확장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참고자료>

ㅇ 서울역사박물관 상설전시

ㅇ 김기호 외 6인, 서울도시계획사 제1권 「현대 이전의 도시계획」, 서울역사편찬원

ㅇ 염복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이데아

ㅇ 임범택, 「부평 토지구획정리지구의 환경적 연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ㅇ 「서울역사 2000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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