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 사정 봐서 월세 5년 동결했는데.." 계약 끝나는 날 받은 내용증명에 손이 떨렸다

세를 놓고 사는 노인들은 세입자와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처럼 지내기도 합니다. 형편이 어렵다는 사정을 들으면 월세를 올리지 못하고, 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반찬 한 그릇이라도 챙겨 주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베푼 인정이 언제나 고마움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대구 수성구에 사는 박말자 씨는 올해 일흔둘입니다. 남편과 함께 40년 동안 서문시장에서 포목점을 하며 모은 돈으로 낡은 2층 주택 한 채를 마련했습니다. 1층은 부부가 살고, 2층은 세를 놓아 그 월세로 노후 생활비를 보탰습니다.

포목점 시절 말자 씨는 시장에서 '인심 좋은 박 사장'으로 통했습니다. 혼수 이불감을 사러 온 가난한 신부에게는 남는 천을 덤으로 끊어 주었고, 외상값을 못 갚는 단골에게는 "형편 풀리면 갚으라"며 장부를 덮어 주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보며 "당신은 장사꾼이 못 된다"고 웃었지만, 그 인심 덕에 가게는 40년을 버텼습니다.

남편은 8년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 말자 씨는 혼자 1층에 살며 2층 월세 65만 원으로 생활을 꾸려 왔습니다. 연금이 많지 않은 말자 씨에게 그 월세는 한 달 생활비의 절반이 넘는 소중한 돈이었습니다.

남편이 남긴 것 중에는 가계부 습관도 있었습니다. 남편은 살아생전 집에 들어가는 돈은 동전 하나까지 적어 두라고 잔소리를 했습니다. "말자야, 정은 정이고 기록은 기록이다." 말자 씨는 귀찮다면서도 그 말을 따라 남편이 떠난 뒤에도 꼬박꼬박 가계부를 적었습니다.

5년 전, 2층에 젊은 부부가 이사를 왔습니다. 남편은 작은 인테리어 가게를 한다고 했고, 아내는 어린 딸 둘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계약하던 날 세입자 남편 강현우 씨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습니다.

"사모님, 저희가 요즘 가게 형편이 좀 어렵습니다. 월세를 조금만 깎아 주시면 정말 열심히 살겠습니다."

말자 씨는 어린 두 딸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원래 받던 월세에서 5만 원을 깎아 60만 원에 계약했습니다. 그리고 계약을 갱신할 때마다 주변 시세가 올라도 월세를 한 번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말자 씨는 2층 아이들을 손주처럼 아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1층 마당에서 놀게 했고, 김장철이면 김치 한 통씩을 계단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겨울에 보일러가 고장 나면 자기 돈으로 수리공을 불렀고, 장마철 2층 천장에 물이 새면 바로 방수 공사를 해 주었습니다.

큰딸 하은이는 말자 씨를 "1층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 오면 2층 엄마보다 1층 할머니에게 먼저 달려와 자랑했습니다. 말자 씨는 그 상장을 받아 들 때마다 용돈 만 원씩을 쥐여 주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텅 비었던 마음이 아이들 덕분에 조금씩 채워졌습니다.

동네 부동산 사장은 말자 씨를 볼 때마다 혀를 찼습니다. "사모님, 요즘 이 동네 월세가 80만 원이 넘어요. 5년째 60만 원이면 사모님이 1년에 240만 원씩 손해 보시는 거예요."

말자 씨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애들 키우는 집인데 어떻게 올려요. 나 혼자 먹고살 만하면 됐지."

그렇게 5년 동안 말자 씨가 올리지 않은 월세를 따져 보면 천만 원이 훌쩍 넘었습니다. 하지만 말자 씨는 그 돈이 아깝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2층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혼자 사는 집의 적막을 채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올해 여름, 말자 씨는 무릎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혼자 2층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든 몸이 되자 딸이 함께 살자고 했습니다. 말자 씨는 고민 끝에 집을 정리하고 딸 집 근처 작은 아파트로 옮기기로 결심했습니다.

계약 만료를 석 달 앞두고 말자 씨는 세입자 부부에게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미안해요. 내가 몸이 이래서 집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계약 끝나는 날짜에 맞춰 보증금은 꼭 돌려드릴게요."

현우 씨는 "아, 네. 알겠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했습니다. 말자 씨는 그 반응이 조금 서운했지만, 갑작스러운 이사 소식에 당황했으려니 생각했습니다.

그 뒤로 2층 부부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계단에서 마주쳐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고, 아이들도 1층 마당에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말자 씨는 이사를 앞두고 서운해서 그러려니 했습니다. 마지막 달 월세는 받지 않겠다고 미리 말해 두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계약 만료 당일, 말자 씨의 우편함에 두툼한 우편물 한 통이 꽂혀 있었습니다. 내용증명이었습니다. 보낸 사람은 2층 세입자 강현우 씨였습니다.

[임대인의 일방적인 계약 종료 통보로 인해 임차인이 입은 손해 배상을 청구합니다. 이사 비용 300만 원, 새 집 중개 수수료 200만 원, 그동안 임차인이 자비로 수리한 인테리어 비용 1,500만 원, 총 2,000만 원을 보증금 반환 시 함께 지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미지급 시 법적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말자 씨는 마당 평상에 주저앉았습니다. 손에 든 종이가 바르르 떨렸습니다. 5년 동안 손주처럼 아낀 아이들의 아버지가, 마지막 날 이런 서류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딸 은정이가 달려왔습니다. 은정이는 내용증명을 꼼꼼히 읽더니 이를 악물었습니다. "엄마, 인테리어 비용 1,500만 원이라니요. 엄마가 보일러며 방수며 다 고쳐 줬잖아요. 저 사람이 한 건 벽지 바르고 조명 몇 개 단 게 전부예요."

말자 씨는 장롱 깊숙이 넣어 둔 공책 한 권을 꺼냈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부터 집에 관한 모든 지출을 적어 온 가계부였습니다. 보일러 교체 180만 원, 2층 방수 공사 230만 원, 창호 수리 90만 원. 영수증까지 꼼꼼히 붙어 있었습니다.

다음 날 말자 씨는 딸과 함께 법률구조공단을 찾았습니다. 상담을 맡은 변호사는 서류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습니다.

"계약 기간이 끝나 임대인이 갱신을 거절한 건 정당한 권리입니다. 세입자가 집주인 동의 없이 한 인테리어는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의무가 있는 경우가 많고요. 오히려 사모님이 그동안 해 주신 수리 내역이 이렇게 다 남아 있으니, 저쪽 주장은 받아들여지기 어렵습니다."

말자 씨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답변서를 보냈습니다. 그동안 시세보다 낮게 받은 월세 내역과 집주인이 부담한 수리비 영수증 사본, 그리고 세입자가 계약 당시 원상복구를 약속한 특약 조항까지 빠짐없이 첨부했습니다.

답변서를 받은 현우 씨에게서 일주일 만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목소리는 한껏 기가 죽어 있었습니다.

"사모님, 제가 주변에서 이렇게 하면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내용증명은 없던 일로 해 주십시오."

말자 씨는 수화기를 꼭 쥐고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현우 씨, 나는 5년 동안 월세 한 번 안 올렸어요. 당신 아이들 얼굴 보고 그랬어요. 그런데 마지막 날 나한테 보낸 게 고맙다는 인사가 아니라 2,000만 원짜리 청구서였네요. 보증금은 약속대로 돌려드리겠어요. 다만 계약서대로 원상복구는 해 놓고 나가세요. 그게 마지막 예의예요."

현우 씨 부부는 결국 자기 돈으로 벽지와 조명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이사를 나갔습니다. 이삿날 아침, 두 딸이 1층 마당으로 내려와 말자 씨에게 꾸벅 인사를 했습니다. "할머니, 그동안 김치 감사했어요." 말자 씨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말자 씨는 딸과 함께 동네 단골 칼국숫집에 갔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손칼국수 두 그릇을 앞에 두고 은정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이제 베푸는 것도 좀 가려서 하세요." 말자 씨는 웃으며 칼국수를 한 젓가락 떴습니다. "베푼 건 후회 안 한다. 다만 기록은 꼭 남겨야 한다는 걸 배웠지. 네 아버지가 가계부 쓰라고 잔소리한 게 이렇게 쓰일 줄 몰랐다."

김원일 작가의 소설 제목 『마당 깊은 집』은 전쟁 직후 대구의 한 집에 세 들어 사는 여러 가족의 고단한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한 지붕 아래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정도 있고 갈등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정을 베푸는 쪽이 지켜야 할 선과 기록이 있어야 그 정이 상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베풂은 아름답지만, 베풂만으로는 나를 지킬 수 없습니다. 특히 돈과 집이 얽힌 관계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기록과 계약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내 노후를 지키는 길이자, 결국 상대에게도 선을 지키게 하는 길입니다.

올가을 말자 씨는 딸 집 근처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신천 둔치를 내려다봅니다. 강변 산책로를 따라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었고, 저녁노을이 물 위에 길게 번집니다. 40년 정든 집은 떠났지만, 말자 씨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합니다.

출처 : '마당 깊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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