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가는 줄 모를 풍광에 시인묵객 흘러드는 제일경이라

거창(居昌) 심소정(心蘇亭)은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지낸 윤자선(尹孜善)에게서 시작된 정자이다. 윤자선의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화곡(華谷)으로, 윤장(尹將)의 손자이자 윤빈(尹玭)의 아들로 태어났다. 윤장은 문과에 급제해 장령(掌令)의 벼슬을 지냈고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자 화를 피해 합천(陜川)에 은거했다. 이후 윤자선은 처음 거창으로 이주했고 영호(瀯湖) 가에 심연대(心淵臺)를 경영하여 거창 파평윤씨(坡平尹氏)의 기틀을 열었다.

윤자선의 심연대는 세월의 흐름으로 사라졌지만 이후 18세기 윤동야(尹東野·1757∼1827)에 의해 되살아난다. 윤동야는 윤자선의 방계(傍系) 6세손으로 학문에 뜻을 두어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선현의 자취를 추존하여 정온(鄭蘊)의 묘소가 있는 곳에 용천정사(龍泉精舍)를 중건했고, 만년에는 윤자선의 유허로 심연정(心淵亭)을 이건해 학문에 힘쓰는 장소로 삼았다. 심연정은 바로 지금의 심소정을 가리키는 듯하니 과연 역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닌 곳인지 궁금하다. 과거 이곳을 다녀간 문인들의 기록을 통해 그 면모를 살펴본다.

심소정은 조선 세종 때 단성현감을 지낸 윤자선이 1450년 하향하여 이곳에 정자를 건립하고 산수를 즐기며 강학하덕 곳이다. /국가유산포털

이종기(李種杞·1837∼1902)는 1878년(고종 15) 무주(茂朱) 적상산(赤裳山)과 안의삼동(安義三洞) 일대를 유람한 적이 있다. 이때 여정의 막바지에 거창에 들렀고 심소정에 들른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20일 저녁에 아림읍(娥林邑: 거창)에 들러 시내를 사이에 두고 조망하니 숲이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인정(人定) 때에 전항(箭項)의 심소정으로 들어갔고 화동(華洞)에서 온 윤경재(尹敬在)를 만나 가질(家姪)의 안신(安信)을 들었다. 21일, 윤현오(尹見五)·이효중··박하건(朴夏建) 여러 사람이 정자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정자는 이 세 성씨의 소유이다. 수석이 대단히 아름답고 마룻대와 추녀 끝이 자못 장려해 부앙(俯仰)하느라 즐거워 해가 이미 저문 줄 깨닫지 못했다.

-이종기(李種杞), <만구속집(晩求續集)> 권7, '적상(赤裳)을 유람한 기록(遊赤裳錄)'

이종기는 중양절(重陽節)에 유람을 시작했고 이상은 9월 20일과 21일에 해당하는 여정이다. 저녁 무렵 거창에 이르러 심소정에 묵었다고 하였다. 인정은 대략 2경에 해당하는 통행금지 시각으로 몹시 늦은 밤에 해당한다. 전항은 우리말로 '살목'이라 하고 심소정이 자리한 지명을 가리키며 다른 기록에 전촌(箭村) 등으로 적은 경우가 보이는 곳이다. 애초 일족이 기거하는 화동으로 향한 유람이었기에 그곳에서 연락을 받고 안부를 확인한 정황도 볼 수 있다.

이종기는 심소정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다음 날 정자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다. 윤씨(尹氏)·이씨(李氏)·박씨(朴氏) 등의 인물이 주도하여 자리를 베풀었으니 심소정은 바로 이들 세 집안의 소유라는 언급이 보인다. 윤자선의 후손이 함께 관리하였음을 명시한 대목으로 이는 심소정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거듭 기억되었다. 이때 이종기는 화락한 만남과 정자의 아름다움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몰랐던 하루의 일정을 고백했다. 특히 심소정에 주목하면, 주변의 빼어난 풍경과 정자의 수려한 제도가 즐거움을 안겨다 주었음을 돌아보게 한다.

허전(許傳), 〈성재집(性齋集)〉 권15. '수목재기(修睦齋記)'. 심소정의 동쪽에 경영한 수목재의 기문이다. 합천과 거창 일대에 흩어져 사는 일족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건립했다고 하였다. /김세호

이러한 심소정은 구한말 거창의 중요한 문화공간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두훈(李斗勳·1856∼1918)의 기록에 그 과정이 자세하다.

숭정(崇禎) 5 기축년(1889) 맹하(孟夏)에 남주(南州) 인사들이 거창 전촌의 심소정에 강학하는 일로 모였다. 젊은이와 어른들이 모두 모였고 멀고 가까운 사우들 가운데 소문을 듣고 온 자 또한 많았다. 정자는 산에 기대고 물을 굽어본다. 시야가 밝게 트이고 또 모랫가의 새, 안개와 구름의 승경이 있다. 윤·이·박 세 성씨가 대대로 지키고 이를 주관한다. 교우(膠宇) 윤충여(尹忠汝: 윤주하(尹胄夏)) 어른이 마침 세 가문의 자제를 앞장서 거느리니 행동거지가 빈빈(彬彬)하여 문학의 풍모가 있었다.

-이두훈(李斗勳), <홍와문집(弘窩文集)> 권9, '모리기행록(某里紀行錄)'

이두훈은 1889년(고종 26) 여름, 경남 지역 인사들과 함께 모리(某里)를 유람했다. 모리는 정온(鄭蘊)이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은거하여 절의를 드러낸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때의 유람에 참석한 이들은 모리에 모여 강회(講會)를 열고 향음주례(鄕飮酒禮)의 의식을 거행했다. 심소정은 이러한 모임의 시작점이 되었으니 이두훈의 기록은 당시 심소정이 지닌 지역적 위상과 영향력을 그대로 증언한다.

이상의 내용에는 심소정의 특징과 일가 문인들의 만남이 생생하다. 앞서 이종기는 인근의 풍경과 제도적 측면에 기대 아름다움을 예찬했다. 이두훈의 기록에는 이와 더불어 심소정이 지닌 또 하나의 면모가 부각되어 나타난다. 당시 윤주하의 주도로 선대의 학문적 위상을 계승한 모습이다. 이두훈은 이들의 모습에서 학자의 품격을 느꼈고 단지 심소정이 화려한 제도에 그치지 않는 별서임을 평가했다. 모리를 향한 여정이 이곳에서 시작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지점이다.

거창군 남하면에 있는 심소정. /연합뉴스

다만 심소정이 어떠한 의미를 지녔든지 간에 그 승경은 거창 일대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것으로 짐작된다. 송병선(宋秉璿·1836∼1905)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그 다음날 서로 작별한 뒤 청연치(靑淵峙)를 넘고 연수사(演水寺)를 지나니 거창 땅이다. 박치량(朴致良: 박기용(朴夔鏞)) 군이 길가에서 기다려 함께 거창부(居昌府)로 들어갔고 침류정(枕流亭)에 올라 구경했다. 다시 10리를 가서 심소정에 오르니 정자는 냇가 우뚝한 바위 꼭대기에 있다. 시원하게 트이고 그윽하고 상쾌해 자못 침류정보다 빼어났다. 이곳은 세 집안이 주인으로 윤(尹)·이(李) 두 가문의 여러 노인과 젊은이가 접견해 잠시 대화했다. 전촌으로 들어가 치량(박치량)의 서실(致良書室)에 묵었다.

-송병선(宋秉璿), <연재집(淵齋集)> 권22, '교남을 유람한 기문(遊嶠南記)'

송병선은 1891년(고종 28) 영남 지역을 유람한 적이 있다. 이상은 합천(陜川)과 삼가(三嘉)를 거쳐 거창으로 들어와 일대를 묘사한 기록 일부이다. 청연치를 넘고 연수사를 경유해 거창에 들어왔다고 하였고, 오늘날 거창군 남상면에 전하는 연수사가 바로 이곳이다. 이어 송병선은 침류정과 심소정 등을 구경하고 이들의 경관을 품평했다. 심소정의 모습이 앞서 구경한 침류정보다 훨씬 빼어나다는 평가를 덧붙였다.

침류정은 조선 전기 이래 거창의 대표적인 누정으로 이름을 올린 공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영천(瀯川) 강가에 자리했다고 기록한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도록 그 이름은 지리지와 읍지 등에서 민멸되지 않았다. 이러한 위상에도 불구하고 송병선은 심소정의 풍광이 침류정에 앞선다고 단언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지세상 탁 트인 경관에다 일가 문인들의 관리를 통해 이루어낸 결과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심소정은 단지 거창에 자리한 하나의 누정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심소정의 동쪽에는 과거 윤자선이 머문 유허에 기대 수목재(修睦齋)가 들어섰다. 일족의 모임을 도모하기 위해 <예기(禮記)>의 고사를 취하여 명명한 이름이다. 1899년(광무 3)에는 심소정 앞에 소심재(小心齋)가 건립되었다. 현재 소심루(小心樓)란 이름으로 전하는 공간이니 역시 <예기>에 근거하여 근신(勤愼)함을 드러낸 당호로 추정된다. 허전(許傳)의 <수목재기>와 곽종석(郭鍾錫)의 <소심재기>를 통해 심소정을 중심으로 하나의 원림이 형성되었음을 돌아볼 만하다.

심소정은 일제강점기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며 거창 최고의 명승으로 이름을 올렸다. 동아일보 1927년 8월 23일 자 기사에 거창과 안의(安義)의 여러 명승고적을 소개했고 그중 심소정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전 세 집안이 소유하던 것과 달리 윤씨가 관리하는 곳으로 변화했고 뛰어난 풍광으로 인해 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이 찾았다는 설명이 보인다. 오늘날 심소정은 그 위상을 바탕으로 경남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힘입어 여러 사전에 설명이 보이지만 일부 착종된 기술도 간취된다. 그 위상에 어울리는 역사의 회복을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김세호 경상국립대 한문학과 교수

#경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