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잔디 전문가 “기후가 바뀌었다. 우리는 그때와 완전히 다른 곳에서 축구한다”
“올해 날씨가 이변이 아니라면 앞으로도 계속 천연 잔디에서 축구를 할 수 있을까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짙은 절망이 묻어났다. 2024년 여름, 생때같은 잔디가 녹아내리는 걸 지켜봐야 했던 그라운드 키퍼의 한탄이었다.
K리그 최초의 축구전용구장인 포항 스틸야드 잔디를 책임지는 이춘복 동원개발 팀장은 올해처럼 날씨가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고 했다. 폭염과 열대야가 길어지면서 잔디도 힘을 잃었다.
이 팀장은 기자와 통화에서 “봄과 가을에는 문제가 없었어요. 역시 여름이 문제입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인) 태풍도 오지 않으니 34도를 웃도는 날씨가 멈추지 않았어요. 잔디도 녹아 내렸죠. 천재지변입니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2003년 포스코 산하 협력사인 동원개발에 입사해 포항 스틸러스 송라클럽하우스 잔디 관리를 맡았고, 2013년부터는 포항 스틸야드를 책임지고 있다.
이 팀장은 “처음 잔디 관리를 할 때만 해도 여름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고 떠올린 뒤 “5~6년 정도 지나면서 여름이 길어졌고 그때부터 여름에 잔디가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태풍이 적당한 시기에 와주면 잔디가 살아서 버티고, 아니면 죽는다. 멀쩡하던 잔디가 밥 먹고 돌아오면 죽는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올해는 송풍기 6대를 하루종일 돌려도 큰 힘을 쓰지 못했다. 올해 같은 날씨가 계속된다면 천연 잔디를 관리한다는 게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회의감도 든다. 해가 가면 갈 수록 더워지고 있는 현실에서 나온 이야기다. 내년에는 올해가 더 시원했다고 하면 어떡하느냐”고 덧붙였다. 기상청에 따르면 2002년 8월 평균 최고 기온은 27.5도였지만, 올해 8월은 33.3도로 크게 올랐다.
국내에선 한·일 월드컵 이후 한지형 잔디인 켄터키 블루그래스 미드나잇 품종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한지형 잔디는 생육에 알맞은 온도가 16~25도로 서늘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데, 당시 날씨에는 무더운 여름에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녹빛을 유지하는 기간이 난지형보다 3~4개월 길어 경기할 수 있는 기간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각광받았다.
그러나 한국의 기후가 점점 고온다습하게 바뀌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한지형 잔디 중에에서도 여름에 강한 켄터키 블루그래스 HGT 품종을 심거나 아예 27∼35도의 조건에서 왕성하게 자라는 난지형 잔디를 도입하자는 의견이 나온다.
이 팀장은 “일본 쪽에 조언을 구한 결과 난지형 잔디를 기본 뼈대로 삼으면서 겨울에는 한지형 잔디를 오버시딩(잔디 씨앗을 뿌리는 것)해서 유지한다고 한다. 국내에선 골프장들이 난지형 잔디로 바뀌고 있다”며 “다만 선수들이 화상을 입거나 축구화에 걸릴 가능성도 있다.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민국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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