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엘팬알백] ⑨1982년 이광은 김재박, 1983년 이해창 입단 이야기

1982년 프로야구 원년 MBC 청룡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름은 ‘개막전 만루홈런의 사나이’ 이종도와 ‘4할 타자’ 백인천일 것이다.
그런데 원년 멤버지만 역사적인 창단식과 개막전을 함께하지 못한 특급 스타들이 있었다. 공군 야구단인 ‘성무’에서 군복무 중이던 이광은과 그해 9월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로 인해 프로 진출이 강제로 유보된 국가대표 최고 스타 김재박. 이들은 1982년 MBC 청룡에 ‘지각 입단’했지만 실력과 인기 면에서 빠르게 MBC 청룡의 간판으로 자리 잡았다. 나아가 1990년 LG 트윈스의 첫 우승 멤버가 되고, LG 트윈스 감독까지 맡는 인연을 이어갔다.
여기에 1983년 국가대표 출신의 이해창, 김정수, 오영일 등이 줄줄이 입단하면서 청룡은 스타 군단으로 도약하게 된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9번째 주제는 1982년과 1983년 입단 후 청룡의 여의주처럼 빛난 추억의 스타 이야기다.

◆ ‘공수주 만능’ 33번 이광은의 지각합류…청룡의 천군만마
“1982년 프로야구가 생겼을 때 저는 공군팀 성무에 있었어요. 4월 30일에 제대했으니 말년이었죠. 원년 개막전은 동대문구장(서울운동장) 관중석에서 지켜봤던 기억이 납니다. 이종도 선배가 만루홈런을 쳐서 극적으로 이겼잖아요. 저도 하루 빨리 프로야구 무대에서 뛰고 싶은 마음에 몸이 근질근질했죠. 아~. 벌써 세월이 40년도 훨씬 더 지났네요. 그래도 5월 2일에 광주에 가서 해태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던 기억만큼은 생생합니다. 태어나서 처음 광주에서 게임을 해봤으니까요. 전국 주요 도시를 다니며 야구를 한다는 게 프로 시대에서 달라진 일이었죠.”
이광은은 기억의 저편에 묻어뒀던 1982년 이야기를 묻자 웃음을 터뜨렸다. 1955년생이니 그의 나이도 벌써 칠순. 현재 용인특례시 수지구에 살고 있다.
등번호 33번. 요즘 팬들이야 박용택의 영구결번으로 알겠지만, 청룡 시절부터 야구를 봐 온 올드팬들이라면 이광은을 33번의 원조로 떠올릴 것이다. 배재고 삼총사 친구였던 우익수 신언호는 32번, 에이스 하기룡은 34번을 나란히 달고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32, 33, 34번은 우리에게 그런 추억이 묻어있는 번호다.

[엘팬알백] ⑥편에서 설명했듯이, 이광은은 1981년 12월 29일 OB 베어스와 2대1 드래프트를 통해 MBC 청룡에 지명됐다. 배재고와 연세대를 나와 실업팀 포철에서 활약하던 그는 군복무를 위해 1979년 11월 1일 공군팀 성무에 입대했고, 1982년 4월 30일 제대할 예정이었다.
(참고로 성무와 현재의 상무는 다르다. 기존 공군야구단 '성무'와 육군야구단 '경리단'이 1984년 합병하면서 '상무 피닉스 야구단'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 사이 프로야구는 먼저 출항했다. MBC는 3월 27일 개막전에서 이종도의 기막힌 만루홈런으로 역전 드라마를 썼지만 그 기세가 한풀 꺾이며 4월까지 15경기에서 7승8패의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이때 이광은이 제대하면서 MBC는 천군만마를 얻었다.

“사실 1982년에는 제대 말년이었기 때문에 부대에서 편의를 봐줘서 2월부터 3월초까지 강릉과 진해로 이어진 청룡의 전지훈련(스프링캠프)을 다 소화했어요. 그리고는 다시 공군에 복귀해 4월 30일에 제대를 했죠. 5월 1일 MBC에 입단했는데 당시 ‘청룡이 여의주를 품었다’라는 신문기사를 봤던 생각이 납니다. 기분이 좋았어요. 항상 해오던 야구이긴 하지만 진짜 프로야구를 한다는 게 실감이 났죠.”

이광은은 아마추어 시절 투수면 투수, 타자면 타자, 내야수면 내야수, 외야수면 외야수, 맡겨만 주면 모든 포지션을 볼 수 있었던 만능 선수였다. 오늘날로 치면 ‘5툴 플레이어’에 가까웠다. 게다가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플레이어. 에너지 넘치는 그의 공·수·주 활약에 매료된 팬들이 많았다.
포지션 교통정리가 필요했다. 백인천 감독은 제대한 이광은에게 3루수를 맡겼다. 개막 이후 주로 3루수를 봐 온 ‘악바리’ 김인식이 2루수로 투입됐다. 유격수 정영기와 함께 내야진 짜임새가 견고해지는 맛이 생겼다. 실책이 잦았던 개막전 2루수 조호는 백업요원으로 돌았다.
MBC는 5월 9일부터 23일까지 7연승을 올리며 OB와 삼성이 양분하던 선두권 싸움에 뛰어들었다. 당시는 전기리그(40경기)와 후기리그(40경기)로 나눠 우승팀끼리 한국시리즈를 치르던 시절. 결국 전기리그 우승은 OB로 넘어갔다. 전기리그에서만 무려 18승을 올린 미국 유학파 투수 박철순을 보유한 덕분이었다. MBC는 22승18패로 분전했지만 3위에 그쳤다.

◆ 잠실구장 시대 개막
1982년 후기리그의 가장 큰 화두는 ‘잠실야구장’ 개장이었다. 1980년 4월에 착공해 2년 여의 공사 끝에 1982년 7월에 완공했다.
잠실야구장은 그해 9월 한국에서 최초로 개최하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겨냥해 건설한 야구장으로, 전통 악기인 장구 모양을 본따 만들었다. 그동안 동대문야구장을 야구의 성지로 여겨오던 우리나라에 당시 3만5000명(입석 포함 최대 5만 명)을 수용하는 규모의 최신식 야구장이 출현하자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프로 시대에 3만500석, 2만5000석 등으로 좌석수를 줄였고, 요즘엔 쾌적한 관람을 위해 좌석 간격을 넓히고 테이블석을 마련하면서 잠실구장 관중 수용규모는 2만3750명으로 축소된 상황이다.
잠실야구장을 가장 먼저 사용한 쪽은 고교야구였다. 개장을 기념해 7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우수고교초청야구대회’가 개최됐다. 17일에 경북고의 류중일이 부산고 좌완투수 김종석(KIA 좌완투수 김대유 아버지)을 상대로 그 유명한 잠실구장 개장 1호 홈런을 날렸다.
MBC 청룡이 처음 홈구장으로 사용한 것은 후기리그가 한창 진행되던 8월 1일. 전날까지 MBC는 후기리그 8승2패로 삼성과 공동 1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잠실구장에서 펼쳐진 역사적인 프로야구 최초 경기에서 MBC는 롯데에 3-6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MBC는 단 1경기만 치르고 다시 홈구장을 동대문으로 옮겨야만 했다. 당시 국가적 이벤트로 여긴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9월 4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관계로 구장 관리를 위해 잠실야구장을 쓸 수 없었던 것. 세계선수권대회가 끝난 뒤 시즌 막바지인 9월 23일 잠실구장에서 홈경기가 1게임 더 열렸다. 이때 MBC는 롯데를 3-2로 꺾고 역사적인 잠실구장 첫 승을 기록했다. 그러니까 1982년에는 잠실구장에서 MBC의 홈경기가 총 2게임 펼쳐졌던 셈이다.

◆세계선수권 우승 ‘개구리번트’ 영웅…“김재박 데려와라” 팬들 성화
한국은 사상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9월 14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대회 마지막 경기 일본전은 그야말로 드라마. 한국은 일본에 7회까지 1안타로 끌려가며 0-2로 뒤졌으나 8회말 5-2 역전극을 펼치며 정상에 올랐다. 바로 이날 잠실야구장에 수용한 관중수가 5만 명이었다.
[엘팬알백]에서 굳이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 이야기를 다루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시 대표팀 우승의 주역들이 대회 직후 속속 MBC 청룡에 입단하기 때문이다.
우승이 걸렸던 일본전 8회말 역전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이어 이해창(한국화장품)의 중전안타와 장효조(경리단)의 내야땅볼로 2사 1·2루가 된 상황. 타석에 들어선 한대화(동국대)가 좌측 파울폴을 때리는 장쾌한 3점홈런을 날려 5-2 역전에 성공했다. 고려대 2학년으로 대표팀 막내였던 투수 선동열이 9이닝 2실점 완투승을 올리면서 한국은 대역전승의 드라마를 완성했다. 한국야구의 한일전 ‘약속의 8회’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가뜩이나 당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로 국민들의 대일 감정이 극도로 악화돼 있던 상황. 그래서 대표팀 선수들은 그야말로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특히 실업야구 시절부터 슈퍼스타였던 김재박은 영웅 중의 영웅이 됐고, MBC 청룡 팬들은 연일 MBC 측에 전화를 걸어 “세계선수권대회가 끝났으니 지명해 놓은 김재박 이해창을 당장 데려오라”며 압박을 가했다.
김재박과 이해창은 1981년 12월에 MBC가 OB와 2대1 드래프트(MBC 2명 지명하면 OB가 1명 지명하는 방식)를 할 때 1순위로 가장 먼저 호명한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둘은 세계선수권대회 대표팀 차출로 인해 강제적으로 프로 진출이 유보된 상황이었다. 첫 시즌에는 사실상 활용할 수 없는 선수들이었다. 그런데 그 점을 감수하고서라도 MBC가 먼저 1순위로 주어진 2장의 티켓을 이들에게 행사했다는 것은 그만큼 실업야구 시절부터 둘의 기량과 인기가 워낙 출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임박해질 쯤 MBC는 후기리그 선두싸움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삼성이 8월말부터 9월초까지 7연승을 달리는 동안 MBC는 8월 19일부터 9월 1일까지 거꾸로 7연패를 당했다.
특히 8월 26일 대구 삼성전 몰수게임패가 치명적이었다<엘팬알백 ⑧편 참고>. 4할 타자 백인천 감독 겸 선수가 5경기 출장정지를 당했고, 그 충격 여파로 MBC의 연패 골은 더 깊어지기만 했다.
9월 말 다시 5연승을 올리며 막판 스퍼트를 펼쳤지만 후기리그 우승은 산술적으로도 물건너간 상황이었다. 우승은 삼성과 OB의 2파전으로 좁혀졌다.

◆‘그라운드의 여우’ 후기리그 3G 남기고 입단
『한국야구 최고의 스타 중의 한 명인 김재박이 프로야구 선수가 되었다. 김재박은 30일 프로구단 MBC와 계약한 데 이어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선수등록을 마침으로써 2일 삼성과의 대구 경기에서 MBC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출전한다.』 <1982년 10월 2일자 동아일보>
“MBC 청룡에 지명을 받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원년 개막전부터 뛸 수 없게 대표팀에 묶여 있었어요. 그건 어쩔 수 없었죠. 세계선수권대회가 끝나고 나니까 MBC 구단에서 ‘팬들이 김재박 선수를 보고 싶어하니 하루 빨리 계약하자’면서 입단을 권유하더라고요. 대표팀 다른 선수들은 1983년에 입단했는데 저만 1982년 시즌 말미에 프로에 먼저 들어가게 됐죠. 사실 저도 '다음 시즌까지 놀면 뭐하나’ 싶어 빨리 입단을 하게 됐습니다.”
김재박. 한국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불세출의 유격수. 1954년생으로 이광은보다 한 살 위다. 영남대 졸업 후 1977년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에 입단하자마자 신인으로서 7관왕을 차지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타율상(148타수 65안타, 0.439), 홈런상(13개). 타점상(37개), 도루상(24개)에 3관왕상(타율, 홈런, 타점), 신인상, 최우수선수상을 휩쓸었다.
“유격수는 수비만 잘하면 된다”라는 그 시절의 통념을 깬 신개념의 유격수. 빠른 발을 바탕으로 한 넓은 수비 범위와 강한 어깨, 야구센스가 투영된 영리한 경기운영과 주루플레이까지…. 그래서 그의 별명은 ‘그라운드의 여시(여우)’였다.
김재박은 계약금 2000만 원, 연봉 2400만 원의 특급 대우 속에 1982년 9월 30일 MBC 청룡 유니폼을 입었다. 등번호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자신의 분신과도 같이 사용해 온 7번을 받았다. 당시 ‘7번’ 하면 김재박이었고, 김재박 하면 ‘7번’이었다.
크라운제과는 7개 들이 '밀크카라멜' CF모델로 7번의 대명사 김재박을 발탁했다. 어린이들이 “김재박 아저씨, 아저씨는 왜 7번만 달아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 CF에서 김재박은 “행운의 넘버 세븐!”을 외치기도 했다.
신발 브랜드 슈퍼카미트를 비롯해 각종 업체들이 너도나도 김재박을 광고모델로 모시기 바빴을 정도였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은 “김재박 선배님이 롤모델이었다”면서 “김재박 선배님 같은 유격수가 되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나도 등번호를 선배님과 같은 7번을 달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야구에서 유격수 수비 번호는 6이지만, 이종범뿐만 아니라 박진만, 김상수, 김하성 등 유격수 계보를 이을 만한 선수들은 김재박의 영향으로 공식처럼 등번호 7번을 선호했다.
김재박이 MBC에 입단했을 때 남아 있는 경기는 후기리그 1경기와 전기리그에서 치르지 못한 2경기로 총 3경기뿐이었다.
팬들과 언론의 관심 속에 프로 데뷔전인 10월 2일 대구 삼성전을 치렀다. 김재박은 여기서 4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그리고 남은 2경기에서도 무안타. 첫해 3경기에서 총 13연타석 무안타를 기록했다.
‘천하의 김재박’이 안타를 치지 못한 게 오히려 더 화제가 됐고, 언론에서도 이를 연일 대서특필했다.
김재박은 결국 해를 넘겨 1983년 4월 3일 시즌 개막 2연전(잠실 OB) 두 번째 경기, 두 번째 타석에서 프로 무대 첫 안타를 쳤다. 데뷔 후 18연타석 무안타의 터널에서 벗어났다.



“실업야구 시절까지 알루미늄 배트를 쓰다가 갑자기 입단해 나무 배트를 처음 사용하니까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어쨌든 1982년 3경기 남겨놓고 입단한 건 지금 생각해도 잘했다고 봐요. 안타를 못 쳤지만 그래도 프로 무대에 빨리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됐으니까요. 프로 시대 이전에 실업야구도 인기가 있었지만 프로야구와는 비교가 안 됐죠. 항상 관중석이 북적북적했고, 거의 매 경기가 TV와 라디오로 중계되니 야구를 할 맛이 났어요.”
MBC는 후기리그에서 24승16패로 0.600이라는 높은 승률을 올렸다. 하지만 후기리그에서도 최종 순위는 3위. 삼성이 28승12패(승률 0.700)의 압도적 성적을 거두면서 OB의 한국시리즈 파트너가 됐다. MBC는 1982년 전·후기리그를 합쳐 46승34패로 선전했지만 종합승률(0.575)에서도 3위에 머물고 말았다.

◆ 1983년 국가대표 이해창 김정수 오영일도 입단…전력 업그레이드
1982년 먼저 입단한 김재박에 이어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들이 1983년 대거 입단하게 된다.
MBC는 사실 김재박과 함께 세계선수권대회 주장이었던 이해창도 1982년 말미에 계약해 팀에 합류시키려 했다. 그러나 대회 직후 협상을 했지만 입단 조건에 이견이 발생하면서 불발됐다. 결국 이해창은 이듬해인 1983년에 입단했다.
이해창은 타격도 타고났지만 가장 돋보이는 건 역시 압도적인 주력이었다. 바람 소리처럼 ‘쌕쌕’ 달린다고 해서 별명도 ‘쌕쌕이’였다. 어릴 때 어깨를 다쳐 송구가 약한 점이 단점이라면 단점. 그래서 중전안타만 나오면 어깨가 좋은 유격수 김재박이 거의 중견수 자리까지 달려가 송구를 받은 뒤 홈이나 3루로 달리는 주자를 잡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둘 중 누가 더 빨랐을까.

“김재박은 노력으로 최고 스타가 된 반면 이해창은 타고난 재능으로 최고 선수가 된 케이스죠. 이해창은 훈련도 잘 안 하면서 실전만 되면 어찌나 야구를 잘 하던지…. 발은 둘 다 엄청 빨랐어요. 야구는 짧은 거리를 달리기 때문에 우열을 가리기 쉽지 않지만 이해창이 약간 더 빨랐던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독립구단 연천 미라클 김인식 감독의 말이다. 김인식은 원년에 35개의 도루로 팀 내 최다 도루이자 리그 전체 3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김재박과 이해창의 입단으로 1983년 MBC 청룡의 기동력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됐다. 도루 부문에서 김재박은 34도루로 해태 김일권(48도루)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이해창(26도루)은 3위, 이광은(17도루)은 5위, 이종도(16도루)는6위, 김인식(14도루)은 8위에 오르면서 상대를 압박했다.
특히 김재박과 이해창은 1980년대에 항상 도루 부문에서 최상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1985년에는 김재박이 50도루로 1위를 차지하며 원년부터 4년 연속 도루왕에 도전하던 김일권(39도루)의 아성을 깨기도 했고, 이해창은 MBC 시절엔 도루왕 타이틀을 따내지 못했지만 청보 시절이던 1987년 54개의 도루를 성공하며 도루왕에 오르기도 했다.
1983년에 이해창만 MBC에 입단한 게 아니었다. 당시엔 연고지 선수라면 무제한으로 1차지명을 할 수 있었는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당시 8회말 중월 2루타로 추격 타점을 올린 김정수(신일고-고려대)가 1차지명을 받았고, 역시 세계선수권 대표팀 투수였던 우완 정통파 오영일(배명고-인하대)도 1차지명으로 들어왔다.
김용수(동대문상고-중앙대)는 세계선수권대회 국가대표는 아니었지만 1983년 MBC 1차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위해 실업팀 한일은행에 입단하면서 프로행을 포기하는 듯했다. 그러다 결국 1985년 시즌 중반에 청룡 유니폼을 입고 훗날 구단 역사상 최초 영구결번이 되는 간판투수로 자리잡게 된다(이 스토리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1982년 이광은과 김재박이 뒤늦게 합류하고, 1983년 이해창 김정수 오영일 등이 입단하면서 MBC 청룡은 스타 군단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투수력이 업그레이드된 것은 물론 공·수·주 전반적으로 전력의 짜임새가 높아졌다.
그리고 1983년 후기리그에 ‘빨간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청룡은 마침내 서울팀으로는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역사를 쓰게 된다.
[엘팬알백] ⑩편에서 계속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