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 없다' 놀림 받은 청년들은 어떻게 '한강'에 빠졌나...'1020 한강 키드'의 등장
흰.
노래 '시든 꽃에 물을 주듯'으로 알려진 가수 박혜원(26)의 활동명이다.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흰'에 푹 빠져 책 제목의 영어 발음과 유사한 'HYNN'으로 지었다.
23일 소속사 뉴오더엔터테인먼트 관계자에 따르면, 박혜원이 '흰'을 읽은 건 소설이 나온 2018년쯤. 가수 데뷔를 준비하며 불안해하고 있을 때 지인으로부터 책을 선물받았다. 그는 책 속 "내가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만을 건넬게"라는 글귀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 문장을 읽고 '어떤 풍파나 상처가 있더라도 진심 어린 순수한 마음을 담아 음악을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한강의 책을 읽고 창작의 꿈을 키운 이른바 '한강 키즈'의 등장이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낸 한강의 강렬한 시적 산문"(스웨덴 한림원)은 세계를 달군 20대 K팝 스타들에게 인생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 지난겨울 입대한 그룹 방탄소년단 멤버 뷔(본명 김태형·29)는 군대에서 한강이 쓴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1020이 가장 많이 봤다"
"어린애들은 책을 도통 읽지 않는다"는 기성세대의 편견과 달리 한강의 문학은 청년들의 삶에 스며들었다. '내 여자의 열매' 등이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린 데다 학교에서 독서 토론 등을 통해 한강의 책이 두루 읽히고 있어서다.
여론조사 업체인 한국갤럽에 따르면, 최근 한강 관련 설문에 응한 18~29세 응답자의 25.5%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기 전에 그의 소설을 읽었다"고 답했다. 모든 연령대 중에 가장 높은 비율이었다. '문해력 저하 논란'의 화살받이가 된 10, 20대가 알고 보니 한강의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세대였던 셈이다. 실제로 10, 20대 10여 명을 한국일보가 따로 인터뷰해 보니 "한강의 소설이 독서에 큰 전환점"(김모씨·22)이 됐다는 이도 있었다. 지난 18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의 한강 책 판매대엔 "내가 중학생 때부터 (한강을) 응원했는데 벌써 고등학생이 됐다"는 문구가 적힌 청소년 독자의 메모지도 붙어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 한강의 문학에 매료됐을까.
근현대사 질곡 겪지 않아도 몰입하는 이유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먼저, '격정의 체험'을 꼽았다. "'채식주의자'를 읽었는데, 눈으로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그 힘든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몰입"(박모씨·25)했고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가슴이 찔리는 것 같은 고통을 체험"(최모씨·24)했다는 것이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각각 광주 5·18 민주화운동과 제주 4·3 사건 피해자 입장에서 썼다. 송지언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10, 20대는 기성세대와 비교해 근현대사의 질곡에 대한 경험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지만, 어느 세대보다 인권 감수성이 풍부해 역사적 폭거에 따른 개인의 희생과 상처에 더 몰입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문학평론가인 고명철 광운대 국문과 교수는 "'채식주의자'에서 육식을 거부하는 주인공을 보며 가부장중심주의에 대한 폭력을 떠올리고 그 폭력이 일상에 만연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학생들의 감정이 고양되는 과정을 토론 수업을 통해 확인하곤 한다"고 말했다.
"왜 죄 저지른 '어른'들은 죄책감이 없죠?"
10, 20대는 한강의 책으로 존재감을 확인하고 위로받았다. "한강 소설에 혈우병에 걸린 환자('바람이 분다, 가라')나 전쟁 피해자 등 약자들의 고통에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아, 아직 인간성이 있구나'라고 새삼 느끼고"(박모씨·23), "역사적 내용을 정치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대신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는 엄마의 고백('소년이 온다')으로 표현해 모성애를 대리 체험했다"(장모씨·24)는 의견이 나왔다. "'소년이 온다'에서 어린 동호가 군인들이 무서워서 총에 맞은 친구에게 달려가지 못한 죄책감으로 도청에 남아 죽는 장면을 눈물을 흘리면서 봤는데 정작 죄를 지은 '어른'들은 왜 죄책감이 없나"(임모씨·18)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김헌식 중원대 사회문화대 교수는 "한강이 묘사한 고통의 연대를 통해 젊은 세대가 존재를 확인한다는 건 그들이 둔감해져야 생존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에 길들여져 무감각해지려 애쓰고 인공지능(AI) 혁명에 존재감을 더욱 위협받는 데 대한 반작용"이라고 진단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김민지 인턴 기자 maymay05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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