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 후 한국 해군의 무장과 전투함 부재 상황
1945년 해방 직후, 대한민국 해군은 전투함이라는 개념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경제적 상황은 극도로 열악해 제대로 된 군함 구입 자금 확보가 어려웠다.
해방 이후 신생 한국 해군은 거의 모든 군사 장비가 없었으며, 해군력도 미약해 해외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함 없는 해군력을 보완하고자 해군 초대 참모총장이었던 손원일 제독이 중심이 돼 전투함 확보 노력이 시작됐다.

손원일 제독의 각고의 모금운동과 정부 지원
손원일 제독은 전투함 구입을 위해 해군 장병들과 국민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전 군인들이 월급의 10%를 기부하고, 고철 수거, 심지어 군복 반느질까지 동참할 정도로 국방 의지가 강력했다.
이렇게 모인 성금 약 15,000달러와 이승만 정부가 지원한 45,000달러 등 총 60,000달러가 전투함 구매에 쓰였다.
당시 외화 관리가 엄격해 20달러 이상 경비 집행 시대통령 결재가 필요했는데, 정부는 군 장병들의 열정을 인정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으로 건너가 군함 구입과 개조 과정
손 제독과 한국 해군 대표단은 미국으로 건너가 군용 및 교육용 선박을 조사한 후, 실습용 군함을 구매했다.
구입한 배는 배수량 450톤급으로 PC 461형 미국 해안경비대용 군함인 ‘화이트헤드(PC-701)’였다.
이 함정을 한국 상황에 맞게 수리하고 무기를 장착하는 개조 작업이 현지와 귀국 후 한국 내에서 진행됐다.
3인치 함포, 소형 기관총 등 최소한의 전투 장비들이 장착되었으며, 선원들은 배를 직접 수리하고 보강하는 힘든 과정을 겪었다.

백두산함의 명명과 첫 출항, 군함으로서의 역사
구입된 함정은 손원일 제독이 국토의 상징인 백두산에서 이름을 따 ‘백두산함’이라 명명했다.
‘백두산’이라는 이름은 민족과 국가의 자긍심을 상징하며 한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1949년 말부터 1950년 초까지 함포와 장비를 갖추고 훈련과 정비 작업을 마친 뒤 1950년 4월 10일 한국으로 입항했다.
백두산함은 귀국 후 군내에서 전투함으로서 첫 출항을 하며, 국민과 군이 큰 기대와 환호 속에 맞이했다.

한국전쟁과 백두산함의 전투 활약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직후 백두산함은 첫 실전 임무에 투입됐다.
부산 앞바다에서 북한 특수부대가 탑승한 적선과 교전해 최초의 해상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해군 작전 중 대한해협 해전을 비롯해 인천상륙작전 지원 등 여러 전투에 참여하며 한국 해군의 자존심을 세웠다.
이 작은 경비정 급 전투함은 열악한 장비와 인력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민과 군의 단결된 힘을 상징하는 상징적인 함정이었다.

백두산함 퇴역과 역사적 의의
1959년 7월 1일 백두산함은 공식 퇴역했다.
전투함으로서 역할을 마친 후에도 대한민국 해군 발전의 초석이 되었으며, 군인과 국민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백두산함은 ‘국가 해양 자주권과 안보 수호’의 상징으로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해군 초기 전력의 한계 속에서도 국민과 장병의 희생과 노력으로 건조되어 6·25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최초 전투함으로 영원히 기념된다.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국민과 군의 결집으로 탄생한 백두산함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은 단순한 군함을 넘어, 한겨레가 합심해 만들어낸 자주국방 의지의 산물이자 한국 해군 역사에서 빛나는 ‘첫 성전’이었다.
손원일 제독의 헌신과 국민·군인의 자발적 성금 모금, 미국에서의 함정 구입과 개조라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백두산함은 이후 한국 해군의 발전과 국가 안보의 초석으로 자리잡아,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자긍심과 역사적 교훈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