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조선 국민 대부분이 문맹이던 일제시대에 한글 널리 퍼트렸다 한국과 일본의 문법이 비슷한 이유도 그때문이다"
일본내 한글
전쟁으로 끌려가서 일본에서 살게된 조선인들도 사용하던 한글
일본에 있는 임진왜란 당신 끌려간
조선인 도공 후손 집안인 심수관 가문 소장품을 통해서 17세기 중반에도
조선에 한글 소설이 널리 퍼져있는걸 확인할수 있음
조선에서 온 무역상한테 구입한 한글 소설 "숙향전"
(17세기 중반)
<조선인 도공 후손 심수관 가문 소장품>
한글이 적혀 있는 <표민대화>
조선후기 일본에 표류한 조선 전라도 어부,상인들과 일본 전어관(통역관)의 대화를 기록한 교재
이 책에는 서문 및 발문이 없어 편찬 경위를 정확히 알수없다. 다만 본문의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1836년경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글 본문의 오른쪽 행에는 한자와 가타가나가 섞인 일어역(日語譯)이 작은 글씨로 제시되어 있고 한글 본문의 왼쪽 행에는 한자음이 작은 글씨로 제시되어 있다
상권의 전반부에는 전라도 순천 어부 11명과 일본 전어관의 문답 내용이 수록되어 있고, 상권의 후반부에는 전라도 해남 상인 16명과 일본 전어관의 문답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인 도공 후손 심수관 가문 소장품>
끌려온 조선인 도공이 만든 찻잔속 한글
"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이 모두 도둑인가
자목지 호고려 님이 계신 곳에 다녀올 것이다.
그 개도 호고려의 개로다.
듣고 잠잠 하는구나."
호고려 =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부르던 일본내 호칭
임진왜란 종전 직후인 1600년대 초에 일본 야마구치 현으로 끌려갔던 한 이름 모를 조선인이 만든 찻잔
일본의 교토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조선도공의 작품으로 17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국립중앙박불관에 기증된 이 찻그릇의 표면에는 한글로 고향에 돌아가고픈 마음을 구구절절히 시로 읊었다.
일본에 있다는 한글 불화
<안락국태자경변상도〉
조선 선조 7년 (1576년)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그려진 조선 왕실 발원 작품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기리기 위해 제작
임진왜란 때 출전했던 쵸소카베 모토치카(長曾我部元親)가 일본으로 가져갔다
전쟁 중에
조선의 왕이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 공문서
(1593년)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피난하여 의주에 있을때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로 쓴 교서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백성은 포로가 되어 왜적에 협조하는 자가 많았다. 그 때문에 선조는 일반 대중이 쉽게 알 수 있는 한글로 쓴 교서를 내려 포로가 된 백성을 회유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이것은 선조가 한양으로 다시 돌아오기 한 달 전에 내려진 것인데, 당시 김해성을 지키던 장수 "권탁(1544년∼1593년)은 이 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몰래 들어가 적 수십 명을 죽이고 우리 백성 100여명을 구해 나왔다. 권탁 후손 집에서 보관해왔다
[어쩔수 없이 왜인에게 붙들려 간 백성은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과 왜군을 잡아오거나 왜군의 정보를 알아오는 사람, 또는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을 많이 데리고 나오는 사람에게는 천민, 양민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내릴 것을 약속]한 내용들이 실려있다
백성에게 이르는 글이다.
임금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처음에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서
(왜적을) 이끌어 다니는 것은 너희의 본마음이 아니라
(도망쳐) 나오다가 왜적에게 붙들려 죽지 않을까 여기기도 하며
도리어 의심하되 왜적에게 들어가 있었던 것이니
나라에서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하기도 하여
이제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그런 의심을 먹지 말고 서로 권하여 다 나오면
너희에게 각별히 죄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중에 왜적을 잡아 나오거나
왜적이 하는 일을 자세히 알아 나오거나
포로가 된 사람을 많이 데리고 나오거나 해서
어떠하든 공이 있으면 양천(良賤)을 막론하고 벼슬도 시킬 것이니
너희는 생심이나 전에 먹고 있던 마음을 먹지 말고 빨리 나오라.
이 뜻을 각처의 장수에게 다 알렸으니
생심이나 의심하지 말고 모두 나오라.
너희들이 설마 다 어버이나 처자가 없는 사람이겠느냐?
너희가 살던 데로 돌아와 예전처럼 살면 좋지 않겠느냐?
이제 곧 나오지 않으면 왜적에게 죽기도 할 것이고
나라에서 평정한 후에는 너희들인들 뉘우치지 않겠느냐?
하물며 명나라 군사가 황해도와 평안도에 가득히 있고
경상·전라도에도 가득하여 왜적들이
곧 급히 제 땅으로 건너가지 않으면
조만간 (조선군과 명군이) 합병하여
부산과 동래에 있는 왜적들을 다 칠뿐 아니라
중국 배와 우리나라 배를 합하여 바로 왜국에 들어가 다 토벌할 것이니
그 때면 너희도 휩쓸려 죽을 것이니
너희들이 서로 (이런 이야기를) 전하여 그 전에 빨리 나오라.”
가장 오래된 한글 편지
군관 나신걸 (1461~1524)
530년전 함경도 변방에서 근무하는 하급 장교가 충청도 고향 집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편지
훈민정음이 반포된지 대략 45년 정도후 15세기 훈민정음이 반포된후 당시 실상을 전해주는 가장 오래된 한글 편지. 2011년 대전 유성구 금고동에 있던 나신걸의 무덤을 이장할 당시 함께 묻힌 부인 맹씨의 목관 속 피장자의 머리맡 부분에서 여러번 접힌 상태로 발견됐다.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보낸 한글 편지
31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보낸 아내의 한글편지
(1586년)
원이 엄마의 편지
안동 신도시 택지개발지구 조성을 위해 주인 없는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철성 이씨'라 적힌 명정(무덤에 덮는 천)이 발견됐다. 이 무덤의 주인은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응태(1556~1586)로 밝혀졌고 부장물 중에는 아내가 쓴 한글 편지와 '미투리' 한 쌍이 온전한 형태로 있었다. 자신과 뱃속 아이를 남겨둔 채 젊은 나이에 요절한 남편을 그리며 쓴 한글편지
원이 아버님께 올림
병술년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
자네 항상 나더러 이르되 둘이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자네 먼저 가시는가. 나하고 자식하고는 누구에게 구걸하고 어찌하여 살라 하고 다 던지고 자네 먼저 가시는가. 자네 날 향한 마음을 어찌 가졌으며 나는 자네 향한 마음을 어찌 가졌던가. 늘 자네더러 함께 누워서 내가 이르되 여보, 남들도 우리같이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 남들도 우리 같을까? 하여 자네더러 이르더니 어찌 그런 일을 생각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 자네 여의고 아무래도 나는 살 수가 없으니 얼른 자네한테 가고자 하니 날 데려가소. 자네 향한 마음을 이 생에 잊을 줄이 없으니 어떻게 해도 서러운 뜻이 그지없으니 내 이 마음을 어디다가 두고 자식 데리고 자네를 그리며 살까 하나이다. 내 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자세히 와 일러 주소. 내 꿈에 이를 보고 하실 말 자세히 듣고자 하여 이렇게 써넣네. 자세히 보시고 나더러 일러 주소. 자네 내 밴 자식이 나거든 보고 사뢸 것 있다며 그리 가시면 밴 자식이 나거든 누구를 아빠 하라 하시는가. 아무리 한들 내 마음이나 같을까. 이런 천지 같은 한이
〈윗부분〉 하늘 아래 또 있을까. 자네는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러울까. 그지그지그지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으니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자세히 와 보이시고 자세히 일러 주소. 나는 꿈에서 자네를 보리라 믿고 있나이다. 몰래 모습을 보이소서.
〈첫부분〉 하도 그지그지없어 이까지만 적나이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보낸 한글 편지
(1845년)
친정에 간 며느리로부터 편지를 받은 풍산 김씨 23세손 김중후가 마을에 역병이 발생한 사실을 알리고 '편히 지내다 오라'는 요지로 보낸 한글 편지 <풍산(豊山) 김씨 허백당 문중 소장품>
궁궐에 널리 퍼졌던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
김만중(1637~1692) 작품
조선시대 숙종 15년에 인현왕후가 폐출된 것을 반대하여 귀양을 가서 쓰게 된 소설
인현황후가 잘못도없이 폐비가 된걸 풍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당시 일반서민들 뿐만 아니라 궁녀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한자공부도 한글로
정약용이 쓴 천자문 책 '명물소학(名物小學)'
정약용 (1762~1836)
정약용은 이 책에서 "천자문은 글자가 체계적으로 배열돼 있지 않아 초학자에게 학습의 관계성이나 난이도가 무시돼 있다"며 "내용과 체계상의 결점을 극복하고자 이 책을 저술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여성이 쓴 한글 상소문
김만중의 딸이 당시 왕인 영조에게 쓴 한글 상소문
(1727년)
김만중의 딸이자
좌의정을 지낸 "이이명"의
아내인 김씨부인(1655~1736)의 상소문
손자와 시동생의 구명을 위해 영조에게 올린 상언으로‚ 일종의 서간문(편지)이자 호소문
이는 제도적 차원에서 여성의 한글 문서가 공적으로 처리됐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흔했던 양반가의 한글편지
정철의 어머니인 죽산 안씨가 아들 정철,정화에게 보낸 한글 편지
(1571년)
정철의 한글 시, 한글 작품
송강 "정철" (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많은 한글 가사 작품을 남겼다
작품들을 모아 엮은 책이 《송강가사》
임금님에 대한 충정을 여인의 심경으로 표현한
<사미인곡>, <속미인곡>
백성들을 계몽하고 교화하기 위해 지은 <훈민가> 등이
《송강가사》에 수록되어 있다
백성들을 계몽하고 교화하기 위해 지은 <훈민가>
<송강가사>
가장 오래된 한글 비석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
(1536년)
조선 중기의 문신 "이문건"이 1536년에 부모님의 묘 앞에 세운 한글 묘비이다.
이 묘비는 이문건이 부친인 이윤탁의 묘를 모친인 고령 신씨의 묘와 합장하면서 세운 것이다.이 묘비에는 앞면과 뒷면에 각각 묘주의 이름과 그 일대기가 새겨져 있다. 또 왼쪽과 오른쪽 옆면에는 한글과 한문으로 경고문이 새겨져 있다.
한문을 모르는 이들이 묘를 훼손시킬까봐 이를 경고하기 위하여 한글 비석을 세운 것
<<“영험한 비다. 건드리는 자는 화를 입으리라. 이를 글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리노라”>>
양반가의 여인이 만든
가장 오래된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
(1670년 추정)
안동장씨 장계향 (1598~1680)
1670여년경, 양반가 여성인 장계향이 후손들을 위해 일흔이 넘은 나이에 지은 한글 조리서
조선 중후기 양반가문의 식생활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전통음식 연구의 지침서
경상도 지방의 가정에서 실제 만들던 음식의 조리법과 저장 발효식품, 식품 보관법 등을 소개하고 있다.
예로부터 전해오거나 스스로 개발한 음식 등 양반가에서 먹는 각종 특별한 음식들의 조리법들이 있다
가루음식과 떡 종류의 조리법 및 어육류, 각종 술 담그기를 자세히 기록
새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한글 조리서
양반가에서 만든 김치 및 음식 한글 요리 조리서
<최씨음식법>
(1660년 추정)
해주 최씨(1591~1660)/ 맹세형의 부인
지금까지는 "음식디미방"이 가장 오래된 한글 조리서로 인정 받아왔지만
최씨가 장씨보다 7년 일찍 태어나 20년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최씨음식법" 책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조리서가 되었다
최씨 음식법 에는 김치류 6종을 포함해
총 20종의 17세기 충정도 양반가의 음식조리법이 적혀있다
1600년대 고추가 한반도에 널리 전파되기 이전 맨드라미와 할미꽃을 사용한 김치 제조법이 눈에 띈다. .
지금까지 김치의 붉은색을 내던 맨드라미 사용 조리법을
확인한 첫 기록은 농서인 <증보산림경제>(1766)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씨음식법은 이보다 100여년 앞선 1600년대의 것이다.
김치에 항균작용을 하는 할미꽃을 넣은 것도
15~16세기 "산가요록", "수운잡방" 에서 확인된 바 있지만
이번 발굴로 17세기까지 이런 조리 풍속이 이어졌다는 것을 알수있다.
양반이 소작농에게 보낸 한글편지
(1692년)
1692년 10월 7일에 "송규렴"이 자신의 노비 "기축(긔튝)"에게 보낸 한글편지
전토에서 나온 소출의 양을 제대로 보내지 않는 것을 꾸짖는 내용이다.
<선찰> 제9책에 수록되어 있다
<선찰>은 송규렴(1630~1709) 중심으로 은진 송씨 가문 사람들 간에 주고받은 친필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수많은 조선 왕족들의
한글책과 한글편지 모음
왕부터 왕비 후궁 왕실사돈 친척 까지 다양했음
선조 (1552~1608)
선조가 딸인 정숙 옹주에게 보낸 한글편지
천연두에 걸린 동생 정안옹주를 걱정하는 정숙공주의 편지에 대한 선조의 답장이다. 당시 14세의 어린 딸의 병을 염려하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과 다른 자식들을 안심시키려는 배려가 담겨있다
숙종 (1661 ~ 1720)
숙종이 어머니인 왕후에게 보낸 한글편지
효종(1619 ~ 1659)
효종이 딸인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편지
효종의 둘째 딸인 숙명공주는 평소에 부모, 형제들과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다. 이 편지는 아버지 효종에게 보낸 숙명공주의 문안 편지와 왼쪽 우측 여백에 효종이 쓴 답신이 모두 남아있어서 흥미롭다.
왼쪽 작은 글씨: 숙명공주
문안을 여쭤보고 밤 사이에 기체 안녕하신지 문안 올리기를 바라며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섭섭하여(보고싶어) 아무런 할 말이 없사옵니다
오른쪽 큰 글씨: 효종
글을 받아 보고 잘 있다고 하니 기뻐하노라.
어제 두 가지 색의 초를 보냈는데 보았느냐
면자등(등불의 종류)을 이 수대로 보내노라.
효종이 숙명공주에게 보낸 편지2
"너는 시댁에 가 바친다고(윗 어른께 정성을) 하거니와
어찌하여 고양이는 품고 있느냐
행여 감기나 걸렸으면 약이나 해서 먹어라"
현종 (1641~1674)
숙명공주의 남동생인 "현종"이 보낸 한글편지
조자의 편지 보고 보는 듯 든든하고 반기며 어제 봉상에서 부채 두르던 것이 그 누구인가 안다 하거니와 아무날이나 따로 볼일이 있으면 내가 뵙겠습니다.
숙휘, 숙정 두 누이에게 한가지로 말하십시오.
이년 신축년 윤칠월 십칠일.
악착스럽고 독하게 한 장은 보내라 하였으니 이렇게 보낸다.
숙명공주의 남동생인 현종이 보낸 편지2
"밤사이 평안하옵신 일 없길 바라오며 오늘은 정겨운 편지도 못 얻어보니 그립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 황감(귤) 일곱개가 극히 적어 보잘것없으나 정으로 모은것이라 보내오니 적다고 마시고 웃고 잡수십시오"
효의왕후 김씨 (1753~1821)
효의왕후 김씨가 한글로 쓴 "곤전어필"
(1794년)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 김씨가 쓴 <곤전어필>은 한문으로 된 ‘만석군전’ 과 ‘곽자의전’을 한글로 옮겨 쓴 소설이다.
곤전(坤殿)이란 왕비가 기거하던 궁전을 가리키는 말이자, 그곳에 있던 왕비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효의왕후 김씨가 조카 김종선에게 '만석군전' "곽자의전'을 한글로 번역하게 한 다음 그 내용을 필사한 한글 어필이다.
한글 필사가 유행하던 18세기 문화를 엿 볼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자 한글 흘림체의 범본이라 할 정도로 수준이 높은 효의왕후 한글 글씨로 보물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