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상업’ 황금비율 유지… ‘자연 속 예술공간’ 年66만명 찾았다[지역을 살리는 사람들]

김준구 기자 2025. 9. 2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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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을 살리는 사람들
(8) 이명섭 헤이리 예술마을 이사장
허허벌판 녹지에 작가들 모여
국내 최대 문화예술촌 만들어
코로나 창궐로 위기 겪었지만
올상반기에만 41만명이 찾아
헤이리 이어 프로방스·아웃렛
‘관광코스’로 체류시간 길어져
상업공간 40% 이하 원칙 고수
‘문화예술촌’ 설립 취지 지켜내
이명섭 헤이리 예술마을 이사장이 마을 안에 있는 생태습지공원에서 ‘헤이리(HEYRI)’ 대형 글씨가 새겨진 상징물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문호남 기자

파주=김준구 기자

문화와 예술이 지역경제 활력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곳, 바로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이다. 서울에서 임진각 방향으로 자유로를 달리다 보면 50만㎡의 드넓은 초록 속에 자리 잡은 국내 최대 문화예술촌 ‘헤이리 예술마을’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국인이 반드시 가봐야 할 관광지로 꼽히며 2023∼2026년 연속 ‘한국관광 100선’에 이름을 올린 대한민국 대표 관광명소다. 지금은 300여 명의 예술인이 함께 어울려 사는 거대한 창작 공동체가 됐다. 이곳은 갤러리·공방·박물관·카페가 마을 곳곳을 수놓으며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마을이 만들어진 초창기부터 주민협의체에서 활동해오다 지금은 헤이리 예술마을을 대표하고 있는 이명섭(65) 이사장을 지난 18일 만나봤다.

◇예술인들, “한국에도 문화예술촌 만들자” 한뜻

헤이리가 지금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길은 순탄치 않았다. 1997년에 마을이 만들어지기 몇 해 전, 국내 출판업계 대표 몇 명이 세계 책의 해를 맞아 영국의 ‘헤이온와이(Hay-On-Wye)’라는 조그만 책 마을을 방문하게 됐다. 30∼40여 가구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 전 세계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서점과 책을 주제로 한 카페와 예술 공간이 어우러진 모습은 충격과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다. 이후 ‘우리나라에도 이런 문화예술촌을 만들자’며 국내 문화예술계 여론이 한데 모였다. 당시 이명섭 이사장은 영동대에서 화학공학과 교수로, 그의 아내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한 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0년 가까이 큐레이터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이 이사장 내외도 문화예술인들과 뜻을 함께하며 헤이리 마을에 합류했다. 지금은 헤이리 맞은편에 있는 씨제이 이엔엠(CJ ENM) 부지가 초기에 문화예술지구로 지정된 서화촌(書화村)이었다. 이후 현재 위치로 문화예술지구가 옮겨지면서 2000년에 헤이리 마을 기공식을 다시 갖게 됐다.

◇허허벌판에서도 싹 트는 ‘희망’

이 이사장 내외가 헤이리에 처음 입주했을 때는 드넓은 대지에 공방이나 갤러리는 고작 20여 동에 불과했다. 그는 “지금 이곳이 380필지 정도 되는데 당시에는 드문드문 세워진 건물만 있을 뿐 온종일 찾아오는 사람 한 명 구경하기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이들 부부를 포함해 초기에 입주한 문화예술인 모두 각자 창작활동과 갤러리 운영에 묵묵히 매달렸다. 30대 후반이던 이 이사장은 아내와 함께 문화예술 공동체 만들기라는 꿈을 향해 초창기 멤버들과 30여 년을 달려왔다. 그는 아내와 함께 ‘아트팩토리(Art Factory)’라는 갤러리를 짓고 지금까지 운영을 해오고 있다. 미술전시를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과 아동에게 교육 효과를 주고, 젊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예술(아트)과 공장(팩토리)을 결합시킨 갤러리를 만든 것이다.

그는 마을 조성 초창기부터 마을이사회에 참여해 헤이리 가꾸기에 정성을 쏟았다. 초기 헤이리 건설 단계에서는 마을이사회 건설소위원회 위원으로 건축 및 환경 관련 분야에서 활동을 하며 힘을 보탰다. 이후에는 환경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생태친화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헤이리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현재 헤이리의 녹지율이 45%로 높게 유지돼 방문객들의 힐링장소로 인기를 끄는 것도 그가 이때부터 마을의 내실을 다져왔던 영향이 크다. 헤이리 조성 초기에는 마을부지 안에 나무들이 듬성듬성 있을 정도로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자연미를 그대로 살리면서 풍성한 녹지를 갖춰야 헤이리가 국민 관광지로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이때부터 마을 곳곳에 직접 나무를 옮겨 심고 오솔길을 내며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는 헤이리 가꾸기에 집중했다. 이 이사장은 “수목이나 임야 등 녹지 비율을 엄격하게 지켜 자연친화적으로 가꿔나가야 방문객들도 자연과 함께 편히 쉬고 간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란 생각에 초창기부터 녹지와 조경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했다.

헤이리 문화예술인들의 노력은 점차 입소문을 타게 됐다. 자연 속에서 전시와 공연도 하고 다양한 종류의 박물관도 있다고 언론에 연이어 보도되면서 찾아오는 방문객도 크게 늘었다. 하지만 마을이 유명해지기 시작할 때쯤인 2020년 1월에 코로나19로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았다.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그를 포함한 헤이리 문화예술인들 모두가 된서리를 맞았다. 이 이사장은 “코로나19가 한창 창궐했을 때는 방문객 수가 이전에 비해 90% 넘게 줄어들기도 했다”고 했다. 생계가 막막했던 일부 문화예술인들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해주는 지원금에 의존하며 간신히 생활을 유지했다. 2023년이 돼서야 헤이리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코로나19의 터널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지난해 방문객 66만 명… 지역경제 ‘마중물’ 역할 톡톡

파주시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23년 헤이리를 찾은 방문객 수는 총 51만3800명을 기록했으며 지난해에는 66만1000명으로 크게 늘었다. 파주시 관계자는 “올해 상반기에만 41만1800여 명이 방문한 것으로 나타나 연말까지 사상 최대 방문객 수 기록을 깰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고 전했다.

방문객 발길이 이어지면서 파주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한몫하고 있다는 평가다. 지난 2019년 파주 통일동산 관광특구 지정으로 지금은 헤이리·프로방스·오두산통일전망대·파주프리미엄아울렛 등이 하나의 관광벨트로 연계돼 있다. 파주시는 헤이리가 다른 관광지 동선과 결합되면서 관광객 체류시간을 길게 해 교통·식음·쇼핑·문화 소비가 확대되는 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헤이리를 들른 대부분의 방문객은 인근 지역 곳곳에서 식사나 문화를 즐기며 파주 경제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파주프로방스 맛고을에서 파주장단콩 등 지역특산품을 재료로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식당 대표는 “찾아오는 손님들 상당수가 헤이리 관광을 마치고 곧바로 이곳으로 오는 사람들”이라며 “식사를 하면서도 헤이리에서 재미있었던 경험담을 많이 얘기한다”고 전했다. 이 이사장은 “지역경제와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문화예술마을 정체성 유지가 목표

이 이사장은 헤이리를 문화와 예술이 꽃피는 마을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재임기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마을 설립 당시 만들어진 자체규정 중 하나인 ‘문화공간 60% 이상·상업공간 40% 이하 유지’ 원칙을 고수해 문화예술마을 당초 설립취지를 지키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마을 설립 초기에 문화예술로 방문객들과 의미 있는 교류를 하자는 취지에서 이 원칙을 만들었다”며 “일부 예술인들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공간 일부를 상업 목적으로 임대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고 지적했다. 이 이사장은 “상업 공간은 방문객 편의를 위해 불가피하게 있을 수밖에 없지만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고 했다. 설립 초기에 다짐했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수준 높은 문화예술 체험이나 갤러리 운영에 집중한다면 상업시설이 부족해도 문화예술촌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헤이리에서 열리는 각종 문화예술 행사를 위한 마을 기금 조성도 그가 준비하고 있는 계획이다. 매년 치러지는 문화예술 프로그램들이 외부 지원과 함께 마을 기금도 투입되는 매칭사업이어서 그동안 기금의 상당 부분이 여러 행사를 위해 투입됐다. 이 이사장은 “하나의 문화행사를 치르려면 지원금 80%에 마을 자체기금 20% 정도가 투입된다”며 “여러 공연과 행사를 위해 마을주민을 대상으로 기금을 추가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제는 헤이리 예술마을이 국내 문화지구로서의 위상은 확고하게 다졌다는 게 이 이사장의 판단이다. 다만 마을 내 공방과 갤러리를 늘리고 문화예술 공연과 전시의 질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다면 국내외 방문객이 더 늘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이사장은 “이곳을 찾는 전체 방문객 중에 중국·일본·동남아 등 해외 관광객이 20% 정도 된다”면서도 “헤이리 안에 있는 개별 구성과 콘텐츠 홍보는 아직 부족해 세부 정보를 알리는 데 집중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 이사장은 초창기 회원들이 마을에 들어와서 함께 문화예술을 꽃피우도록 동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헤이리 예술마을은 회원들이 350여 명 정도 되지만, 현재까지 270동 정도의 건물만 지어졌다. 그는 다양한 문화 활동과 행사를 열어 ‘젊은 층이 가보고 싶은 헤이리’를 만들어 나간다는 구상이다. 이 이사장은 “국내외 방문객 유치를 위해 매년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를 기획하고 실제로 열고 있다”면서 “국내 문화예술의 수준을 높이고 지역경제 활성화까지 이어지도록 지속적으로 콘텐츠를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헤이리 예술마을 한 공방에서 방문객들이 만들기 체험을 하고 있다. 헤이리 예술마을 제공
270여개 건물서 예술강연·전시투어… 이색 테마 갤러리·박물관도 ‘눈길’

1년내내 다양한 문화행사 열려

경기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서는 1년 내내 각종 문화예술 공연과 체험행사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자연 그대로 만들어진 흙길을 걷다 보면 270여 개의 건물에서 저마다 독특한 테마로 운영 중인 갤러리와 공방, 박물관도 둘러볼 만하다.

헤이리에서 열리는 문화예술행사 중 가장 규모가 큰 행사는 ‘구석구석 문화배달’이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을 중심으로 지역 간 문화 격차를 해소하고, 누구나 가까운 생활권에서 수준 높은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기획된 공공문화 프로그램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파주시가 주최하고 지역문화진흥원과 사단법인 헤이리가 주관한다.

올해는 지난 4월에 시작해 오는 11월까지 마을 내 여러 공간에서 공연·공방 체험활동·예술강연·전시 투어 등을 총 77차례 진행한다. 9월 이후에도 콘서트와 버스킹, 예술 수업 등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특히 모든 프로그램은 무료로 진행된다.

지난 8월 3일부터 9월 6일까지 한 달 동안은 ‘제5회 헤이리 국제음악제’도 열렸다. 특히 헤이리체임버오케스트라는 지난 2020년부터 상주단체로 세계적인 거장들과 함께 주옥같은 연주를 선보이며 음악의 진수를 들려주고 있다.

헤이리 예술마을 ‘악기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악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헤이리 예술마을 제공

매년 가을에는 ‘판(PAN) 페스티벌’도 개최된다. 판 페스티벌은 헤이리 예술마을의 주요 철학인 평화(Peace)·예술(Art)·생태(Nature)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평화로운 자연을 이야기하는 예술축제’라는 의미를 담았다. 지난 19일부터 21일까지 개최된 올해 행사는 헤이리 일대에서 클래식 콘서트와 미술전시를 비롯해 사생대회와 야외 영화 상영, 미술품 마켓 등이 열렸다.

이와 함께 매년 여름에는 중·고등학생을 위한 여름방학 교육 프로그램인 ‘헤이리 썸머 캠퍼스’도 개최하고 있다. 문화예술 체험과 진로탐색, 창의활동을 함께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국내외 다양한 전통과 현대의 예술 콘텐츠, 만들고 체험하는 창의적인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자신을 표현하고 진로와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나갈 수 있다.

이명섭 헤이리예술마을 이사장은 “시중에서 최소 몇만 원은 들여야 체험하거나 볼 수 있는 문화예술 프로그램들이 헤이리에서는 대부분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독특하고 특색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방문객들의 만족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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