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49) - 랄리벨라의 암굴교회 풍경 ^^^^^^^

조회 12025. 2. 26.

랄리벨라(Lalibela, 혹은 Lalibala) 는 에티오피아 북쪽에 위치한 도시로

10~13세기까지 300년 동안 자그웨이 왕조의 수도였다.

인구는 약 15,000 명의 작은 마을인 랄리벨라는 전체 주민이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이다.

랄리벨라를 축복 받은 땅이라 생각해 이주해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현재는 약 65,000 명이 거주하고 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이주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은 예멘인들이 주로 이주해 온 것이라고 한다.

현대의 과학으로 정교회 교인이 예루살렘인과는 DNA 근거가 전혀 없다는 과학적 근거가 제시되었지만

여전히 정교회인들은 자신들의 뿌리는 예루살렘이라고 믿고 있다.

랄리벨라 왕은 부친은 왕자였으나 어머니는 종이었다.

부모의 반대로 정글로 피신해 낳은 아들이 랄리벨라였다.

정글에서 아기가 태어나자 하얀 벌들이 아기를 감쌌다고 한다.

랄리벨라는 '꿀을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얀 벌들은 이 아기가 왕이 되리라는 걸 알고 보호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랄리벨라 왕은 7살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13년 동안 체류했다.

그곳에서 새로운 예루살렘을 세우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약속을 지키겠노라 신께 맹세했다.

그 당시 성지 순례를 떠난 에티오피아인은 이슬람교도들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맹수에게 잡아 먹히기도 하고 병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예루살렘 성지 순례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순례였다.

랄리벨라 왕은 예루살렘에서 돌아와 왕이 되었고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암굴교회를 건설했다.

붉은색의 응회암을 11m 깊이로 파 내려가 세 개의 집단으로 분리된 11개의 암굴교회를 만들었다.

12세기에 무슬림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에는

암굴교회가 있는 랄리벨라는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추앙을 받았다.

랄리벨라의 석굴 교회 군은 197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 되었다.

메제나 롯지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암굴교회로 향했다.

필수는 아니지만 교인들이 실제로 예배를 하는 곳이라 예의를 갖추기 위해

우리는 모두 흰색 베일인 '네텔라'를 썼다.

암굴교회 입구

에티오피아의 솔로몬 왕은 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규범을 만들었다.

당나귀가 아프거나 등이 까지면 일을 시키면 안 된다..

닭을 시장에 팔러 갈 때는 고마운 닭을 품에 안고 가야 한다.. 등등.

이런 이유로 솔로몬 왕은 왕이자 성자 요한으로 추앙 받았다고 한다.

아주머니께서 닭을 품에 안지 않고 거꾸로 다리를 잡고 가고 있다. ???

암굴교회 입구에서 사진 모델을 해 주었던 이 소녀에게 볼펜을 선물했다.

마침 장날이라 우리는 랄리벨라 장터에 갔는데 거기에서 이 소녀를 또 만났다.

현지 가이드를 따라 장터의 중심인 큰 도로만 빠른 걸음으로 둘러 보고 나니

장터 입구에서 만나기로 한 시각에서 30분 정도가 남았다.

일행들은 버스로 돌아갔지만 나는 남은 30분이 아까워서 장터로 다시 들어갔는데

이 소녀가 나를 보호하는 듯한 행동을 취하기도 하면서 가이드 역할을 자처했다.

소녀와 함께 장터를 돌다가 약속 시간에 맞춰서 버스로 돌아왔다.

아이들에게는 돈을 주지 않는데 장터 가이드를 해준 고마움에 1달러를 건넸다.

이후로 나는 아이들의 타겟이 되었다.

랄리벨라의 어디를 가던 아이들 대여섯 명이 나를 따라 다녔다.

암굴교회의 흙을 파내어 자루에 담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이드께 여쭈니,

흙을 파서 자기네 고향으로 돌아가 친척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준다고.

동네 사람들에게 성지의 흙을 팔기도 한단다.

그만큼 랄리벨라의 암굴교회는 에티오피아 정교회 교인에게는 제2의 예루살렘으로

죽기 전에 성지순례를 가고자하는 염원이 깃든 성스러운 땅이다.

암굴교회가 예배 중이라 우리는 박물관을 먼저 방문했다.

박물관에는 고대시대의 양피지 성서들, 그 시대 성직자들이 쓰던 모세의 지팡이,

사자 가죽으로 된 왕의 의상, 성직자 의상, 아름드리 나무 하나를 통째로 파내서 만든 장식장,

12세기 왕의 은제 옥쇄, 여러가지 모양의 십자가.. 등이 있었다.

랄리벨라 왕이 만든 각종 모형들과 판결용 깃털도 있었다.

그 시대에는 법관제도가 없고 마을 원로가 판결할 때 쓰던 깃털이라고 한다.

박물관 내부는 컴컴했다.

워낙 오래 된 유물들이고 특히 양피지 성서가 손상될까 우려해서인지 박물관 내부는 촬영 금지였다.

플래시 때문에 사진은 안 되지만 영상은 가능한 박물관도 있었기에

영상 촬영 가능 여부를 문의하기 전에 조도를 확인해 봤는데

촬영에 필요한 기본 조도도 나오지 않을 만큼 어두워서 이내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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