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골병, 남성의 손상…가부장제는 삶을 갉아먹고 유지된다

한겨레 2024. 9. 2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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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장손
인디스토리 제공

뜨거운 김이 가득 찬 화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문 열어라, 이러다 숨 막히 죽겠다.” 이내 김이 빠지기 시작하고 두부공장의 모습이 드러난다. 문을 열라고 소리친 건 ‘장손’의 어머니 수희(안민영)다. 수희는 두부 한판을 챙겨서 공장 옆에 위치한 고옥(古屋)으로 향한다. 두부공장 설립자인 김승필(우상전)씨의 집이다. 그곳에선 30도가 넘는 더위에 여자들이 불 앞에서 전을 굽고 있다. 오늘은 승필 부모님의 제삿날이다.

제수를 마련하면서 하하호호 수다를 떠는 여자들, 방에서 술 한잔 걸치면서 빈둥거리는 남자들, 뒤늦게 나타나 모두의 주목을 끄는 ‘우리 장손’, 장손의 등장에 입이 귀에 걸리는 할머니, 집안 사정 모르는 속 편한 막내 고모, 뭐 하나 친숙하지 않은 것이 없다. 첩첩산중에 위치한 경북 지역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펼쳐지는 제삿날의 풍경은 아직까지 근근이 버티고 있는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한때를 포착한다.

김가네 관계의 동학 묘사하는 미장센

인디스토리 제공

‘장손’은 제삿날이라는 상징적인 ‘집안 행사’를 시작으로 김가네의 계절 변화를 따라간다. 연례행사인 제사가 펼쳐지는 여름, 예상치 못했던 죽음을 맞이하는 가을, 그리고 장손 성진(강승호)이 가족의 비밀을 깨닫게 되는 겨울. 한번의 계절이 바뀔 때마다 부계 혈통주의를 지키기 위해 모든 자원을 쏟아붓는, 때로는 강고하고 때로는 비루한 가부장제의 뼈대가 조금씩 선명해진다. 뜨거운 김이 빠지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두부공장의 모습처럼 말이다.

‘장손’의 놀라운 점은 가족의 면면과 일상은 세밀화처럼 구체적이지만, 그들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맥락들은 마녀의 쿠키 부스러기처럼 교묘하게 흩뿌려져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쿠키 부스러기야말로 관객을 주물냄비 속에서 뜨겁게 끓어오르는 영화의 핵심 주제로 이끄는 요소다.

예컨대 가족 모두가 고목 아래에서 가족사진을 찍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보자. 이 장면은 ‘장손’의 특징으로 꼽히는 익스트림롱숏으로 펼쳐진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큰고모, 작은고모, 작은고모부, 누나, 매형, 그리고 장손, 이렇게 열명의 사람들이 집으로 향하는 모습이 멀리에서 잡힌다. 누가 앞서고, 누가 뒤서는가, 누가 누구의 손을 잡고 걷는가 등의 미장센은 김가네를 움직이는 관계의 동학을 묘사한다. 그들이 걸어가는 길의 배경으로는 제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다른 집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동네 어르신의 한마디가 들린다. “오늘 제사는 다들 일찍 지내네.”

인디스토리 제공

대수롭지 않은 듯 흘러가버리는 이 한마디의 의미는 영화의 말미에 가서야 밝혀진다. 한국전쟁 당시에 벌어졌던 어떤 참극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건 승필이 그토록 싫어하는 ‘빨갱이’(북한군)의 소행일 수도 있고, 국군(남한군)이 마을을 차지했을 때 일어난 일일 수도 있으며, 혹은 보도연맹 때 벌어진 민간인 학살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죽음들을 기리는 제삿날이란 한 집만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연례행사였다. 그 학살의 순간에 승필은 부모의 죽음을 등지고 도망쳐 홀로 살아남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집안”이므로, 그는 자신의 대를 이을 장손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런 사연은 승필의 아들이자 한때는 장손이었고, 이제는 장손의 아버지가 된 태근(오만석)에게도 있다. 그는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서울로 유학을 갔지만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가운데에서 다리를 다치고 낙향한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는 그저 신체의 손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건 그가 수행해야 했던 ‘장손 남성성’의 손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뒤틀린 웃음, 술에 취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폭력성은 이 손상을 처리하는 태근의 방어기제다.

그의 주취 가정폭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터다. 제사가 끝나고 모두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밤, 술에 취한 아버지의 고성이 들리자마자 성진이 하는 첫번째 행동은 방의 불을 끄고 숨을 죽이는 일이다. 아직 그의 몸이 훨씬 작았을 때, 아마도 성진은 그렇게 폭력의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성진은 자신이 더 이상 어린 소년이 아님을 깨닫고 방 밖으로 뛰쳐나가 아버지를 제압한다. 그러자 태근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빈다. “살려주세요, 하란 대로 할게요.” 태근의 다리는 어쩌면, 1980년대의 어느 날, 어느 좁디좁고 습한 방에서 펼쳐졌던 무자비한 고문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 장면 역시 롱테이크로 펼쳐진다.

롱테이크로 펼쳐지는 장면들

인디스토리 제공

‘장손’에서 롱테이크는 김가네 사람들이 위치하는 시대적이고 공간적인 조건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영화의 미학을 완성한다. 여기서 미학이란 그저 ‘아름다움’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영화적 언어의 선택이 작품의 메시지 그 자체라는 의미다. 열명의 가족 구성원 한명 한명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 일상의 디테일이 김가네를 하나의 고유명으로 만든다면, 그들의 얼굴이 지워지고 무심한 듯 대사가 흘러가는 롱테이크에서는 그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보편사가 된다.

그 보편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는 뭉툭한 역사가 아니다. 그건 가부장제가 어떻게 보편사와 분리 불가능하게 얽혀 있는가, 그 얽힘이 어떻게 개인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쳤는가를 드러내는, 날카롭게 벼려진 카메라가 다시 그리는 ‘우리’들의 역사다. 술에 취한 태근의 고함 위로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를 읊조리며 한글 공부를 하는 할머니 말녀(손숙)의 목소리가 함께 들리는 건, 이 덕분이다. 가부장제는 여성과 남성의 시간을 함께 갉아먹으며 영속된다.

제목 ‘장손’은 성진을 의미하지 않는다. ‘장손’은 역사를 지배해온 가부장제라는 성적 시스템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성별화된 신체들을 통해 유지된다. 그래서일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큰고모부에 이르기까지, 영화 속 남성들은 손상된 신체를 안고서도 죽지 않는다. 다만 건강해 보였던 여성만이 한순간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우리는 물론 알고 있다. “숨 막히 죽을” 것 같은 삶 속에서 서서히 퍼져가는 골병이 선사하는 고통을. ‘장손’은 남성들의 손상만큼이나 여성들의 골병을 놓치지 않는다.

손희정 영화평론가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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