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성장하는 것은 암세포뿐이다
10여 년 전 과학자들은 일련의 생물물리학적 한계를 인류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지구위험 한계선’(Planetary Boundaries, 지구행성적 경계)으로 정의했다. 이는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감소, 질소·인 과잉 공급, 담수 고갈, 토지 남용, 해양 산성화, 오존층 파괴, 에어로졸 및 새로운 화학물질 오염 등 9개 영역으로 구성된다.
2019년부터 그 과학자들 중 한 사람인 요한 록스트룀이 공동으로 이끄는 지구위원회(Earth Commission)라는 태스크포스가 만들어졌고, 이 위원회는 이러한 정량화된 경계가 안전할 뿐 아니라 ‘정의로운 것’이 되도록 사회과학 관점을 통합했다. 위원회는 2023년에 새 보고서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 관점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면서 파리기후협정의 지구 평균기온 1.5도 또는 2도 상승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매년 수억 명의 생명과 건강, 삶에 위해를 끼친다는 것을 보여주고 구체적이고 다차원적인 해법을 제안할 것으로 기대된다.
생산이 있으면 폐기가, 얻는 것이 있으면 처리해야
지구행성적 경계는 1972년 로마클럽이 취한 접근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이다. 로마클럽은 <성장의 한계>를 통해 인구, 천연자원, 산업과 서비스 생산, 환경오염 등 몇 가지 변수의 상호 관계와 동학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드러냈다. 연구의 결론은 ‘지구 용량’이 정해졌고 ‘성장의 한계’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추출과 생산이 있으면 폐기가 있고, 얻는 것이 있으면 처리 부담을 져야 하며, 모든 것은 연결됐다는 당연한 이치를 그들은 ‘시스템 사고’라고 불렀다.
<성장의 한계>에서 말한 진실은 과학기술과 인간 지력의 발전을 믿어야 한다는 다수의 목소리 속에 냉대받았지만, 50년 뒤 그들의 예상은 거듭해서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났다. 지구행성적 한계의 연구자들은 국내총생산(GDP) 성장과 기후변화 심화 등 다수의 사회경제적 추세와 지구환경적 추세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사하게 ‘대가속’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이터 연구로 로마클럽의 결론을 뒷받침했다. 케이트 레이워스의 <도넛 경제학>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사회적 기준과 이 9가지 행성적 한계 사이의 도넛 면적이 우리에게 안전하고 정의로운 세계를 보장해주는 바탕이라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탈동조화, 영어로 디커플링(Decoupling)이란 개념은 경제성장과 환경 부하가 함께 커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가 발전하면 오염을 줄이는 친환경 기술도 개발되고 자원 투입 위주의 경제에서 서비스 경제로 전환할 수 있기에, 예를 들어 재생가능에너지와 디지털경제를 통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녹색성장, 지속가능한 발전, 생태적 현대화 등 최근의 중요한 정책 개념은 탈동조화가 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 성립한다. 한국 정부 등 여러 나라의 그린뉴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2019년의 한 보고서(‘Decoupling Debunked’)는 탈동조화는 경험적 증거가 없다고 고발한다. 일부 지역에서 탈동조화가 관찰되지만 세계 전체로 보면 GDP 성장만큼 온실가스 배출은 늘어났다. 탈동조화는 구조적이기보다는 일시적이고 티핑포인트 도달을 막을 정도의 규모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탈동조화를 위한 노력과 부담이 정의롭게 배분되지도 않는다. 전 지구적 물질 발자국은 경제성장과 강력하게 결합돼 있다. 경제 규모가 커지는 만큼 온실가스 배출과 폐기물의 규모도 4배, 8배로 커졌다. 저자들은 부유한 국가의 생산과 소비를 직접 축소하고 녹색성장과 작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론 내린다. 이 역시 시스템 사고에 기반한다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다.
현대 탈성장 이론가 중 한 사람인 세르주 라투슈의 책 <성장하지 않아도 우리는 행복할까?>의 표지에 그려진 달팽이는 세계 탈성장 운동의 상징이다. 나선형으로 자라는 달팽이의 껍데기는 한 바퀴 더 자라면 16배 커지기 때문에, 달팽이는 일정한 크기에 이르면 몸을 약간 수축시켜 남은 일생을 그 크기로 유지한다. 실은 자연 상태의 대부분이 그렇다. 영원히 성장하는 것은 오히려 비정상적인 상태다. 경제인류학자 제이슨 히켈은 신체에서 영원히 자라는 것이 있다면 암세포뿐이며 그것은 전체 생명을 위협한다고 비유한다. 생태경제학을 주창한 허먼 데일리는 인구나 자본재의 총량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정상상태 경제’라는 개념으로 탈성장을 제안한다.
탈동조화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기후위기를 염려하고 행동하려는 우리 다수에게조차 이런 경제의 축소 또는 조절 제안은 두렵게 다가온다. 대가속의 속도감에 익숙해진데다 탈성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큰 혼란과 붕괴를 가져오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할 것이다. 탈성장을 비판하는 이들은 그것이 대안 프로그램으로 분명하지 못하고 대중적 호소력이 부족한 이상론의 모음이라거나, 자본주의 틀 안에서 탈성장이 달성될 수 없고 자본주의는 이미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등 여러 근거를 말한다. 탈성장론자가 축소해야 할 활동과 성장해야 할 활동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성장이 더 정체되거나 역성장이 되면 사회적 취약집단과 제3세계가 큰 고통과 혼란을 겪을 것이라고 염려한다. 그린뉴딜 지지자는 경제가 성장해야 재생가능에너지를 확충할 예산도 확보하고 기후적응 기금도 만들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비판들 다수는 최근 탈성장론의 문헌과 구체적인 프로그램 제안을 오해하거나 오독한 탓이다. 몇 가지만 반박하자면, 탈성장론자는 GDP 감소만을 주된 온실가스 감축 수단으로 삼지도 않고 재생가능에너지와 에너지 효율화에 대한 투자를 거부하지도 않는다.
논자들마다 차이가 있지만 탈성장은 단순히 마이너스성장이나 자발적 가난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정치경제학자 마야 괴펠에 따르면, 탈성장은 ‘성장을 위한 성장’을 의미하는 ‘절대성장’(Crescita)과 자본주의 혹은(그리고) 식민화된 문화현상을 그 대상으로 하며 두 주제에 대한 해결과 탈피를 지향하는 운동이자 슬로건이다. 생태경제학자 요르고스 칼리스는 상호부조와 돌봄이라는 코먼스가 기본이 되도록 사회를 재구축하고, 경제성장이 아니라 좋은 삶과 형평(성)을 지향하도록 집단적 삶의 목표를 재조정하는 길로 안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탈성장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기후위기 시대에 탈성장 제안은 복잡한 설명을 넘어 현실성으로 다가온다. 생태적 붕괴, 멸종, 특히 행성적 한계의 개념과 이미지는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생산과 소비의 상당한 감소 또는 적극적 조절이 필요하다는 공감을 높인다. 탈성장은 지금의 자본주의체제가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 아닌’, 그리고 장기적이고 항상적인 기후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함께 나눠야 할 사회의 형태와 방식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 탈성장과 생태사회주의적 계획경제 또는 급진화된 그린뉴딜과의 연결과 발전도 가능하며 그런 진지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탈성장은 당장 가능하고 필요한 정책과 운동의 집합이기도 하다. 히켈은 책 <적을수록 풍요롭다>에서 계획된 진부화(노후화)를 끝내기, 광고 줄이기, 소유권 대신 이용권의 보장, 식품 폐기 없애기, 생태계 파괴 산업 규모 줄이기, 공공재의 탈상품화와 코먼스의 확장, 부채 탕감과 급진적 풍요, 새로운 화폐, 민주주의의 힘, 정신적 탈식민화와 생태주의 인식에 기반하는 두 번째 과학혁명, 포스트-자본주의의 새로운 윤리학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상품의 수명을 의도적으로 단축하거나 수리를 불가능하게 하는 계획적 진부화를 금지해 노트북과 승용차의 제품 수명을 20% 늘릴 수 있으면 그만큼 자원과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확실한 방법이 된다. 최근 영국의 연구는 주 4일 근무제를 적용하면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21% 줄일 수 있음을 보여줬다. 노동시간 단축은 탈성장뿐만 아니라 기후변화를 완화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유력한 수단이다.
많은 운동이 모르는 사이 밟고 온 길
탈성장과 관련해서 우리가 직면하는 두려움은 두 방향에서 오는 것 같다. 붕괴와 결핍 또는 불편과 관련된 것이 하나라면, 탈성장을 주장하면 순진한 몽상가라는 소리를 들으며 사회에서 고립되리라는 걱정이 또 하나다. 그러나 그것은 50년 전 로마클럽이 경험하고 헤쳐나왔던 길이다. 그 길은 행성적 한계와 도넛 경제학으로, 그리고 거대한 복합적 위기 속에 우리의 경제와 사회, 정치를 개조할 온갖 대안으로 이어진다. 전혀 새로운 길도 아니다. 한국에서는 한살림 선언과 작고한 김종철 선생, 그리고 많은 운동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밟고 넓혀온 길이다. 그래서 탈성장은 현재고 오래된 미래다.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방식으로 말하자면, 영원한 경제성장이라는 ‘베드타임 스토리’(심리적 안정을 주는 이야기)를 그만두고 진실을 말하자. 탈성장은 새로운 세계를 위한 깃발이고 진지한 제안이다.
김현우 탈성장과대안연구소 소장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