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보다 무서운 탐욕: 영풍 vs 고려아연 '밥그릇 쟁탈전'의 속내
영풍-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75년 동업 무색한 다툼
끝내 갈라선 한지붕 두가족
소유와 경영 나뉜 고려아연
고려아연 배당에 기댄 영풍
분쟁 책임 서로 떠넘기지만
결국 밥그릇 지키기 싸움
# 70년 넘게 '동업 관계'를 유지하던 영풍과 고려아연이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습니다. 영풍이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주식공개 매수에 나선 게 신호탄이었죠.
# 양측은 분쟁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면서 '명분싸움'을 시작했습니다. 75년 동업이 무색하게 '법적 다툼'도 시작했죠. 이 싸움에 사모펀드까지 동원됐으니, 말 그대로 '진흙탕 싸움'으로 번질 게 뻔합니다.
# 시장과 미디어는 연일 두 회사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하지만 단발적 소식이 쏟아지고 있어 양측이 이 싸움을 왜 시작했는지, 누구에게 명분이 있는지, 혹시 탐욕의 부산물은 아닌지 등을 따져보기 힘듭니다. 더스쿠프가 이 싸움에 펜을 집어넣었습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됐다." 비철금속 제련업체 영풍과 비철금속 전문업체 고려아연을 두고 나오는 평가입니다. 두 회사는 최근 경영권 분쟁으로 시장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분쟁의 막은 9월 13일 영풍이 고려아연의 주식을 공개매수 하겠다고 밝히면서 올라갔습니다. 영풍이 이날 올린 공시 내용을 볼까요? "고려아연의 지분을 추가로 취득해 경영권을 공고히 하고, 기업가치를 제고해 주주가치를 극대화하겠다."
영풍은 현재 고려아연의 지분 33.13%(영풍 25.4%+특수관계인 7.73%)를 보유하고 있는 대주주입니다. 이런 영풍이 이번에 공개매수하겠다고 밝힌 수량은 고려아연 발행주식의 14.61%에 달하는 302만4481주입니다. 매수가격은 주당 75만원으로 제시했습니다. 2조2000억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해 고려아연의 지분 47.74%(기존 지분 33.13%+매수 지분 14.61%)를 확보하겠다는 게 영풍의 선전포고였죠. 이를 위해 사모펀드 운용사 MBK파트너스와 손을 잡았습니다.
고려아연도 가만히 있진 않았습니다. 법적 다툼을 전개하면서 맞불을 놨죠. 두 회사는 그렇게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경영권 분쟁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당연히 주식시장이었습니다. 영풍의 주가는 13일부터 2거래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했습니다. 그 결과 9월 11일 29만7000원이었던 주가는 19일 50만1000원으로 치솟았죠. 공개매수 대상인 고려아연의 주가도 13일 19.78%(종가 66만6000원) 상승했습니다. 당시 영풍과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에 베팅했다면 적지 않은 수익을 올렸을 겁니다.
하지만 두 회사의 분쟁을 단순한 투자자의 시각으로 봐선 안 됩니다. 여기엔 목적을 위해서라면 적대적 인수·합병(M&A)도 서슴지 않는 기업의 민낯과 돈이 될 만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등장하는 사모펀드 운용사, 경영권을 지키려 75년간 이어진 동맹을 끊고 고소·고발을 남발하는 재계의 냉혹함까지 모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두 회사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기록➊ 함께한 75년 = 영풍과 고려아연이 인연을 맺은 건 1949년입니다. 창업주 장병희(영풍)·최기호(고려아연) 명예회장은 그해 영풍그룹을 함께 만들었죠. 두 사람이 비철금속 전문기업 고려아연을 설립한 건 1974년이었습니다. 이후 독특한 경영 구조를 이어왔습니다. 장씨 일가가 영풍을 소유하고, 고려아연은 최씨 일가가 경영하는 형태였습니다. 이런 구조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영풍은 장씨 일가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2분기 영풍의 지분 70.50% 중 장씨 일가가 보유한 지분은 52.92%에 달합니다. 최씨 일가는 우호지분을 합쳐도 17.59%에 불과합니다. 고려아연은 조금 다릅니다. 대주주 지분 48.78% 중 장씨 일가의 몫이 33.13%로 최씨 일가의 지분 15.65%보다 두배 이상 많긴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지표일 뿐입니다. 우호지분을 합치면 최씨 일가의 지분율이 장씨 일가보다 많은 33.60%가 됩니다.
■기록➋ 동지에서 적으로 = 영풍(장씨 일가)과 고려아연(최씨 일가)의 동맹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최근입니다. 갈등이 터지면 늘 그렇듯 양측은 그 이유를 서로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영풍은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2022년과 2023년에 잇따라 추진한 증자를 경영권 분쟁의 원인이라고 꼬집습니다. 고려아연이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통해 2022년 한화(계열사)에 6.88%, 2023년엔 현대차(해외법인)에 5.0%의 지분을 매각했는데, 이게 갈등의 씨앗으로 작용했다는 겁니다.
고려아연 측은 "2차전지 밸류체인을 만들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반론을 펴고 있지만, 영풍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유상증자를 통해 고려아연 내 영풍의 지분을 희석하고, 우호지분을 확보해 고려아연의 계열분리를 꾀하는 게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반면, 고려아연은 2019년 영풍이 석포제련소에 쌓아둔 산업 폐기물을 처리해달라고 요구했고, 이를 최 회장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관계가 틀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럼 재계의 시각은 어떨까요? 업계 관계자는 "2017~2019년 영풍이 지배구조를 개편하면서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한 것이 갈등의 시작일 것"이라며 말을 이었습니다. "지배구조를 개편하면서 장씨 일가의 영풍그룹 장악력은 높아졌고, 최씨 일가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최씨 일가가 대주주로 있는 또다른 계열사 서린상사(현 케이지트레이딩·비철금속 유통기업)에서 시작해 영풍→고려아연→서린상사로 이어졌던 순환출자고리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고려아연의 계열 분리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영풍과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이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 기록➌ 캐시카우 쟁탈전 = 그럼 영풍은 왜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 법적 소송도 불사하는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고려아연이 영풍의 확실한 '캐시카우'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풍의 실적 보고서만 봐도 분명해집니다.
최근 영풍의 실적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영풍의 영업이익률(개별 기준)은 2021년 –5.46%에서 지난해 –9.21%로 떨어지면서 3년째 당기순이익 적자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메워준 건 다름 아닌 계열사의 실적과 배당입니다.
그 중심엔 실적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고려아연이 있습니다. 고려아연의 영업이익은 2019년 8053억원에서 2021년 1조961원으로 증가했습니다. 지난해 6599억원을 기록하며 주춤했지만 올해 영업이익 전망치는 9800억원에 이릅니다. 매출액이 줄어든 지난해에도 고려아연이 벌어들인 당기순이익은 5334억원을 기록했습니다.
고려아연의 실적이 영풍의 든든한 뒷배라는 겁니다. 실제로 고려아연의 지분 25.4%를 보유한 영풍이 받아간 배당은 2019년 558억원에서 지난해 1607억원으로 3배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영풍의 적자를 고려아연의 배당금으로 충당하고 있는 셈입니다. 영풍이 고려아연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영풍의 전주錢主를 자임하면서 경영권 분쟁에 뛰어든 사모펀드에도 좋은 기회일 겁니다. 매출이 1조원대에 달하고, 당기순이익은 5000억원이 넘는 기업의 대주주 자리를 마다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이쯤 되면 필요한 건 시장을 이해시킬 명분일 겁니다. 영풍과 MBK가 공개매수를 적대적 M&A가 아닌 정당한 바이아웃(buy-out)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참고: 바이아웃은 기업의 지분을 인수하거나 회사 자체를 아예 사들인 후 경쟁력 강화를 통해 기업가치를 높이는 투자전략을 의미합니다.]
■ 경영권 분쟁의 결말은 = 그렇다면 고려아연은 정말 적대적 M&A 대상의 희생양일까요? 꼭 그렇게 여기긴 어렵습니다. 고려아연도 영풍만큼이나 제 밥그릇을 챙기기에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6월 커다란 진통을 겪었던 서린상사의 주주총회 논란을 살펴볼까요? 공교롭게도 서린상사의 상황은 '영풍-고려아연 분쟁'과 정반대입니다. 이 회사의 대주주는 66.67%의 지분을 갖고 있는 최씨 일가입니다. 장씨 일가는 나머지 33.33%의 지분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회사의 경영은 2014년부터 장씨 일가 창업 3세인 장세환 대표가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6월 주주총회를 통해 이사진을 고려아연 인물로 채우면서 장 대표가 회사를 떠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풍이 주주총회를 거부하자 고려아연 측은 "임시 주총 소집을 허가해 달라"며 법원의 문을 두드리기도 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때 고려아연이 "(우리가) 지분이 많으니 경영권도 가져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는 겁니다. 지분을 더 늘려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가져오겠다는 영풍의 지금 주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 그럼 이 지점에서 '투자자의 눈'으로 다시 돌아와 볼까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경영권 분쟁이 벌어진 후 두 회사의 주가는 치솟았습니다. 알았든 몰랐든 두 회사에 베팅한 투자자는 아마도 수익을 올렸을 겁니다.
하지만 상승세는 계속되지 않을 공산이 큽니다. 이 분쟁에 지금의 지분 가치에 경영권 프리미엄까지 얹어 막대한 수익을 챙길 사모펀드가 있다는 점도 따져봐야 합니다. '진흙탕 싸움'으로 번진 영풍과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은 어떤 결말을 맞을까요?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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