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한 상장사 IR팀 관계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선도 기업의 지배구조를 적극적으로 참고했다는 의미로도 들리지만, 실상은 불확실성 속에서 기준점을 찾기 위한 움직임에 가까웠다. 잇따른 상법 개정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참고할 판례나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어 상장사들은 상법개정안을 정관에 어떻게 반영해야 할지 우왕좌왕했다. 결국 비교적 이른 시점에 주주총회소집 공고를 낸 삼성전자의 정관 변경안을 일제히 자사 안건에 차용했다는 고백이었다.
실제로 이번 2026년 정기 주주총회 시즌, 상장사들은 적잖은 혼란을 겪었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이 확대되고 집중투표제 의무화가 순차적으로 도입되는 등 굵직한 법 변화가 있었지만, 이 문구를 어떻게 정관에 녹여야 훗날 법적 리스크를 피할 수 있을지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2월께 삼성전자가 상법 개정안을 반영한 정관 변경안을 내놓자 많은 상장사들이 이를 ‘모범 답안’ 삼아 자사 안건에 반영했다. 당장 닥친 제도적 불확실성 앞에서 선례를 참고해 정관 변경이라는 첫 번째 관문을 무사히 넘긴 셈이다.
하지만 정관 변경을 넘긴 기업들은 주주총회 진행 과정에서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과거 같으면 의례적으로 통과됐을 ‘이사 보수 한도 상향’이나 임원 퇴직 시 거액을 챙겨주는 ‘황금낙하산’ 조항 등이 주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줄줄이 부결되는 이례적인 사태가 속출한 것이다.
이러한 ‘셀프 연봉 인상’ 관행에 제동이 걸린 데는 판례의 변화가 컸다. 지난해 대법원이 “이사인 주주는 자신의 보수를 정하는 안건에서 특별이해관계인이므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판결하면서, 대주주의 압도적인 지분율이 무력화됐다. 대주주가 찬성표를 던질 수 없게 되자, 안건의 가결 여부는 일반 주주와 행동주의 펀드의 손으로 넘어왔다.
대신증권 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주총 시즌에 이사 보수 한도 승인의 건이 부결 또는 미결된 것은 총 168건(중복 포함)에 달했으며, 시장별로는 코스닥 상장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구체적으로 반도체 부품사 월덱스, 광고판재 제조사 스타플렉스, 항공기 부품사 하이즈항공 등은 이번 주총에서 경영진의 보수 한도를 높이거나 퇴직금 규정을 유리하게 변경하려다 주주들의 반대표를 넘지 못하고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물론 경영진의 보수 인상 자체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대주주 의결권 제한에도 주주들의 지지를 받아 보수 인상안이 가결된 사례도 적지 않다. 문제는 실적이 꺾이고 주주환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임원들만 보수를 올리는 관행이다. 깐깐해진 주주들 앞에서 이러한 관행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의결권 제한을 뚫고 가결될 만큼 주주 지지를 받는 보수 구조인가’가 기업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 셈이다.
특히 오는 9월부터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에 도입이 의무화되는 집중투표제는 행동주의 주주들에게 강력한 무기가 될 전망이다. 주주들이 특정 이사 후보에게 표를 몰아줄 수 있게 되면서, 지분율이 낮은 소액주주들도 연대만 한다면 이사회 구성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이사회 내부에서부터 경영진을 견제하는 감시망이 촘촘해질 가능성이 커진 만큼, 경영진이 느끼는 턱밑 압박감은 과거와 비할 바가 아니다.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영향력 확대는 기업 거버넌스를 개선하는 강력한 촉매제가 될 수 있다. 다만, 이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현상을 마냥 환영할 수만은 없다. 주주 권리 강화라는 긍정적 측면 이면에 숨은 ‘양날의 검’ 때문이다. 기업이 본업 경쟁력 강화보다 경영권 방어에 막대한 비용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거나, 펀드가 단기 차익만 챙기고 빠지는 이른바 ‘먹튀’ 논란 등은 여전히 우리 자본시장이 경계해야 할 부작용이다.
결론적으로 지금의 자본시장에는 예전과 다른 고차원적인 균형 감각이 요구된다. 경영진은 관행처럼 연봉을 올리던 타성에서 벗어나 주주와의 진정성 있는 소통과 가치 제고에 나서야 한다. 행동주의 주주들 역시 단기 차익을 좇는 것을 넘어 기업의 장기적 성장을 돕는 러닝메이트로서의 책임감을 증명해야 할 때다.
불확실성 속에서 선도 기업의 선례를 참고하며 숨 가쁘게 대응했던 올해 주총 시즌을 지나, 내년에는 각 상장사들이 주주들을 제대로 설득할 수 있는 자사만의 묵직한 ‘밸류업’ 성적표를 들고 무대에 오르길 기대해 본다.
강기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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