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탄 옥상에서 외친 “고용승계” 300일…두 번째 겨울 겪지 않았으면
경북 구미시 공단로 외국인투자전용단지에 들어서면 빛바랜 펼침막들이 양쪽으로 길게 붙은 길이 있다. “일본 기업의 먹튀, 더 이상 안 된다!” “공권력 침탈 막아내고 옵티칼 투쟁 승리하자!” “고용승계 없이 공장철거 없다” 등이 적혀 있다. 이 펼침막 길을 따라 500m쯤 걸으면, 인적이 끊겨 생기를 잃은 듯한 공장 건물이 나온다. 2022년 10월 불이 난 뒤 가동을 멈춘 한국옵티칼하이테크다.
지난 25일 오후 찾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은 한눈에 봐도 문을 닫은 지 오래된 모습이었다. 공장 정문에는 지난 2월 공장 철거를 위한 법원의 행정대집행을 막으려고 노조가 세운 3m 높이의 철제 망루가 그대로였다. 불에 탄 건물 옥상 외벽의 ‘Nitto’라는 간판엔 붉은색의 작은 연등 두개가 덩그러니 걸린 채 바람에 흔들렸다. 해가 지면, 연등이 켜지며 ‘여기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듯 유일한 빛을 낸다.
9m 높이의 이곳 옥상엔 여성 2명이 298일째 있다. 지난 1월8일부터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고공농성 중인 옵티칼 해고노동자 박정혜(38) 수석부지회장과 소현숙(41) 조직2부장이다. 이들의 ‘옥상 생활’은 11월2일이면 딱 300일이 된다. “찬 바람 부는 새벽에 옥상에 올라올 때 계단에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이렇게 오래 있을 거라고 그땐 생각 못 했는데 벌써 300일이네요.” 공장 옥상에서 전화기 너머로 소씨가 말했다.
이들이 일한 한국옵티칼하이테크는 엘시디(LCD)용 편광필름을 엘지(LG)디스플레이에 납품하던 일본 닛토덴코의 자회사였다. 회사는 공장에 불이 나자 193명에게 희망퇴직을 받고, 이를 거부한 17명을 정리해고했다. 박씨와 소씨는 지난 1월 경기도 평택에 있는 일본 닛토덴코의 또 다른 자회사 한국니토옵티칼로 고용승계할 것을 요구하며 공장 옥상에 올랐다. 이들을 포함한 해고자 7명이 2년째 투쟁 중이다.
“겨울에 올라와서 여름이 되어서야 겨우 샤워를 했어요. 올여름은 정말 숨 막히게 더웠잖아요.”(박씨)
재난급 폭염이 닥친 지난여름, 고공농성장은 더 뜨거웠다. 두 사람이 머무는 옥상엔 에어컨이나 선풍기는 둘째 치고 해를 피하려면 좁은 텐트로 들어가야 했다. 옥상 시멘트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까지 더해져 한낮엔 어지러울 정도였다. 옥상 위에 설치한 2인용 텐트 한동과 텐트 위로 친 그늘막 아래가 그들의 유일한 쉼터였다. 옥상에 수도관이 있어 물이 나오긴 하지만, 수압이 좋지 않아 졸졸 흐르는 물을 받아 써야 한다. 소씨는 “물이 아까워 쉰내가 나서 못 견딜 때까지 참았다가 씻는다”고 말했다.
농성장의 하루는 “딱히 할 일이 없다”. “아프면 농성도 끝난다”는 생각에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옥상 위를 걸으며 운동하고, 뉴스나 책을 읽으면서 하루를 보낸다. 마침 이날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종합국정감사 실시간 중계를 보느라 바빴다. 닛토덴코의 또 다른 자회사인 한국닛또덴꼬 오요안 대표가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했기 때문이다. 이날 오 대표는 평택 공장이 해고자들을 고용승계해야 한다는 야당 의원들의 지적에 “우려 사항을 일본 본사에 잘 전달하겠다”는 책임 없는 답변만 내놓았다. 농성 중에도 회사 쪽은 줄곧 “법인이 달라 고용승계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소씨는 회사의 대응을 보면서 “정말 서글펐다”고 말했다. “회사는 우리를 함께 일한 동료가 아니라 기계의 부품으로 취급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회사가 급하다고 하면 휴일에도 출근하고, 잔업하는 건 기본이었는데 (이 회사에서 일한) 16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정말 많이 슬펐어요.”
이들은 평택 공장으로 고용승계를 할 수 없다는 회사 쪽의 말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박씨는 “모든 직원이 구미와 평택은 같은 회사라고 알고 있었다. 물량을 평택으로 옮기고, 신규 채용도 하면서 왜 구미 직원만 채용할 수 없다는 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농성이 길어지며 이들은 고립감과도 싸운다. 박씨는 “농성장에서 보이는 맞은편 아파트 단지에 우리 집이 있어요. 밤에 불 켜진 아파트를 보고 있으면 나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솔직히 많이 답답해요”라고 말했다. 소씨는 어머니가 아플 때 함께하지 못한 일을 떠올렸다. “얼마나 편찮으신지 제대로 알 수 없고 정말 미안했어요. 어떤 날은 진짜 내려가고 싶더라고요.”
하지만 이들은 옥상에서 내려올 수 없다. “우리가 뭘 잘못한 건지 회사에 묻고 싶어요. 평택 공장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게 당연한 요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내려갈 수 없습니다.”(박씨) “여기서 물러나면 기업과 자본은 또다시 저희를 수단과 도구로만 이용하다 버릴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저항하고 싸워서 반드시 일터로 돌아가겠습니다.”(소씨)
이날 이들은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한국여성노동자회가 주는 제11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자상 ‘김경숙상’을 받았다. 이 상을 받은 여성노동자들은 모두 투쟁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박씨는 “선배들이 없었다면 저는 뭐가 부당한지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라며 “저희도 꼭 좋은 소식을 들려드리겠다”고 했다. 고공농성 300일을 맞는 11월2일 전국에서 노동자·시민 1천여명이 ‘옵티칼로 가는 연대버스’를 타고 농성장으로 와 연대 집회를 연다.
최현환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장은 “고공농성을 하는 두 동지가 또 한번의 겨울을 겪지 않도록 반드시 고용승계를 쟁취해 현장으로 돌아가겠다. 300일 연대 집회에 많은 힘을 모아달라”고 말했다.
김규현 기자 gyuhyu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속보] 민주당, 오늘 윤석열-명태균 직접 통화 녹취 공개
- [속보] 북한, ICBM 추정 장거리탄도미사일 발사
- [단독] 명태균 ‘김진태 컷오프’ 뒤집힌 날 “사모님 그래 갖고…내가 살려”
- ‘여자배구 전설’ 조혜정 별세…“배구야, 널 만나 행복했어”
- 불탄 옥상에서 외친 “고용승계” 300일…두 번째 겨울 겪지 않았으면
- 체코 반독점 당국, 한국과 원전 계약 ‘일시 중지’
- 막걸리 한 잔 붓고 사과나무를 벤다, 40년 전 아버지 모습 생생한데
- 극심한 가뭄 스페인에 ‘8시간 동안 1년치’ 폭우…최소 95명 사망
- 교수 이어 초등교사 ‘윤정부 훈장’ 거부…“받으면 뭐가 좋겠나”
- [단독] “지코 추가해”…방시혁 ‘아이돌 품평 보고서’ 직접 공유 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