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족, 어떻게 살 것인가
가장 최소 단위 가족, 세포가 건강해야 조직이 건강하다
구조적 요소보다 실존적 요소에 최선을
다름을 인정할 때 남도 인정 한다
오빠는 주워 온 여동생에게 묻는다. 한 집에서 함께 사는 할머니와 아줌마가 좋으냐고. 오빠는 고개를 끄덕이는 여동생에게 덧붙인다. "그럼 견딜 수 있지?"
길에 버려진 여자 아이를 주워 온갖 사랑으로 보듬은 엄마는 말한다. 우리가 저 아이에게 선택 당한 거라고. 아이가 부모를 선택해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유대가 강한 아이가 될 수 있다고.
모두가 행복하게 적응 잘 하며 사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할머니도 엄마 말에 이렇게 대꾸한다. "내가 너를 선택한 것처럼"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님에도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꼴임에도 진심과 사랑, 현재를 즐기는 모습에 가슴 절절한 웃음과 눈물을 자아낸다.
코로나19 때 전 세계적으로 집 안에 틀어 박힌 세상을 맛 봤다. 틀에 박힌 '가족'도 재조명 했다. 너무도 당연시 한 개념, 지극히 마땅한 경계로서의 '가족'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계기였다. 코로나19 시대가 물러 났다고 반짝 행사로 취급 할 단어가 아니다. '가족'이란 이름은. '행복'과 '질병'을 오가는 간이 정류장으로서의 '가족'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재정의 할 것인가는 이제 나와 우리를 넘어 사회 전체의 과제다.
사회경제학자 전영수가 쓴 <각자도생 X사회>에도 여러 가족 형태가 나온다. 피붙이로 사는 가족에 있어서는 중년이고 청년이고 간에 고령화에 부응하는 부모 간병, 독립을 미루고 미루다 벌어지는 캥거루 자식, 경제까지 한 술 더 떠 뒤치다꺼리 하는 형제자매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가족 중 하나가 넘어지면 줄줄이 쓰러지는 일명 도미노 가족이다. 갓길로 새로운 가족 형태도 늘었다. 혈연이 아닌 가치 중심의 가족 구성이다. 동식물들과 함께 사는 가족, 동거만 하는 가족(동성, 이성), 성장 파트너로서 주말 또는 주3회만 보는 가족 등.
아빠, 엄마, 아이들이 한 지붕 밑에서 사는 가족은 정상, 그 외는 비정상인 개념은 구닥다리 된 지 오래다. <각자도생 X사회> 책에서는 각자 형편 대로, 처한 상황에 끼워 맞춰 사는 형태인 '테트리스 가족' 시대라고 했다. 개개인의 가치와 행복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가족이다. 목적 달성을 위해 각자의 역할 설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조직에서 업무 분장이 곧 정의 사회를 구현하는 것처럼.
가족 건강이 곧 조직 건강이요, 사회문화이자 국가 건강이다. '몸'이란 건 남에게는 '물리적 요소'이지만 나에게는 '실존적 요소'다. 남은 나의 외모에 괴로움을 느낄 지언정 나의 내부 감각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신성한 가치다. 이처럼 누구와 함께 사는 구조이냐보다 중요한 건 어떤 상호작용으로 존재하느냐다. 일방적이 아닌 쌍방 간에 흐르는 마음인지, 협의된 롤 플레이를 하는지가 가족의 핵심 기능이다.
우리집은 삼대가 산다. 최근 들어 "부모를 모시고 사느냐", "40대가 70대, 20대와 사는 게 어렵지 않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모신다'는 개념. 어쩌면 세대 차이로 70대와 20대가 40대를 모시고 산 건 아닌지. 한 지붕 밑에 살면서 시설 관리는 70대가, 재무 관리는 40대가, 혁신 관리는 20대가 한다. 중간관리자인 팀장은 조직에서만 발휘될 역량은 아니다. 회사와 가정, 겉과 속이 다를 이유가 없다.
나 하나 잘 건사하는 일이 곧 정상 가족이다. 오늘 아침 아무 일 없이 가족 모두가 눈을 떳다. 각자 주어진 소임에도 눈을 뜬다. 그런 가족이라 기적이고 그런 하루라서 기적이다. 우린 어느 가족으로 살아가는가.
글/이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