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옹성 헬기 시장에 균열이 가다
고정익 항공기는 성능과 가격이 명확한 지표가 되지만, 회전익 항공기 즉 헬리콥터는 파일럿의 생명과 직결되는 저고도 작전의 특성상 기체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수십 년간 쌓아온 운용 데이터가 없으면 명함조차 내밀기 힘든 철옹성 같은 시장이다. 미국과 유럽이 양분하고 러시아가 틈새를 메우던 이 견고한 카르텔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는 신호가 2026년 2월 싱가포르 에어쇼에서 감지되었다.
놀랍게도 그 균열의 중심에 대한민국이 만든 수리온과 마린온이 서 있다. 외신과 방산 전문지들이 주목한 것은 화려한 에어쇼의 기동이 아니라, 부스 뒤편에서 오고 간 은밀하고도 구체적인 대화들이었다. 특히 남아시아의 군사 정보 중심지인 방글라데시가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부스를 찾아 수리온과 마린온 도입을 심도 있게 타진했다는 소식은 단순한 세일즈 미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러시아 공급망 붕괴, 방글라데시의 절박한 선택
방글라데시가 처한 현실은 냉혹한 국제정세의 축소판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러시아제 Mi-17 헬기를 '가성비'라는 명분 하에 주력으로 운용해왔다. 대당 200억 원 밖에 안 되는 저렴한 도입 가격과 막 굴려도 버텨주는 내구성은 매력적이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모든 장점을 치명적인 독으로 바꿔버렸다.
러시아의 공급망이 완전히 차단되면서 멀쩡한 헬기를 뜯어 다른 헬기를 수리하는 이른바 '동류전환' 방식조차 한계에 봉착했다. 헬리콥터는 고정익기와 달리 로터의 회전 진동으로 인해 부품의 피로도가 극심하여, 적시에 부품이 교체되지 않으면 공중에서 분해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무기 체계다. 방글라데시 군 수뇌부는 더 이상 러시아를 믿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서방제 헬기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너무 비싸고, 터키는 엔진 문제
여기서 경쟁자로 떠오른 것이 미국의 블랙호크나 아파치였지만, 이는 방글라데시의 국방 예산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그림의 떡이었다. 유지보수 비용이 기체 가격을 상회하는 미국산 헬기는 도입 즉시 재정 파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절묘한 타이밍에 터키의 T129 아탁 공격 헬기가 대안으로 거론되었으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함정이 존재했다.
T129는 이탈리아의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되어 엔진과 주요 부품에서 미국의 수출 통제를 자유롭지 못하다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파키스탄이 T129 도입을 시도했다가 미국의 엔진 수출 금지로 계약이 좌초된 사례는 방글라데시에게 강력한 경고 메시지가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대한민국이 파고든 틈새 전략은 매우 치밀하고 전략적이었다.

수리온의 첫 수출, 이라크가 문을 열다
한국은 수리온과 마린온 무장형을 제안하면서 경쟁국들이 제공할 수 없는 기술적 독립성과 미래 확장성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2024년 12월 KAI는 이라크 정부와 1,358억 원 규모의 수리온 수출 계약을 체결하며 국산 헬기 첫 해외 수출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수리온 헬기 2대뿐 아니라 이라크의 헬기 조종사와 정비 기술자 교육 비용까지 포함된 패키지 계약이었다.
이 성공을 발판 삼아 KAI는 중동과 동남아시아로 수출 지역을 다변화할 계획을 세웠다. 2025년 하반기에는 1조 7,000억 원 규모의 중동 수리온 수출 사업이 집중적으로 추진될 예정이며, UAE에도 수출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사우디아라비아 공군 사령관도 2026년 1월 KAI를 방문해 수리온에 큰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무인 복합 체계, 한국만의 차별화 무기
특히 마린온 무장형은 전용 공격 헬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산 대전차 미사일 '천검'과 20mm 기관포를 통합하여 공격 헬기에 버금가는 화력을 투사할 수 있다. 이는 전용 공격 헬기 도입이 부담스러운 국가들에게 수송과 공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다. 더욱이 방글라데시가 주목한 것은 한국이 제안한 유무인 복합 체계, 즉 MUM-T 기술이다.
현대전에서 헬기 단독 작전은 휴대형 지대공 미사일의 밥이 되기 십상이다.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러시아의 최신예 공격 헬기 Ka-52가 맥없이 격추되는 장면은 전 세계 군 관계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한국은 이를 간파하고 헬기가 직접 위험 지역에 들어가기 전에 정찰 드론이나 자폭 드론을 먼저 투사하여 생존성을 극대화하는 솔루션을 제시했다. 이는 터키나 러시아 구형 헬기에서는 구현조차 힘든 최첨단 교리다.

제3세계 헬기 시장, 수조 원 규모의 대체 수요
싱가포르 에어쇼 현장에서 전해진 외신들의 반응을 종합해보면, 방글라데시 공군 고위 관계자들은 수리온을 기동 헬기로, 마린온을 공격 무장 헬기로 운용하는 패키지 도입에 상당한 매력을 느낀 것으로 전해진다. 규모면에서는 각각 6대씩 총 12대밖에 되지 않는 물량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전략적 가치는 수조 원을 호가한다.
전 세계에 깔린 수천 대의 노후화된 러시아 헬기를 대체할 수 있는 표준 모델로서 한국산 헬기가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번 방글라데시의 관심 표명은 단순히 헬기 몇 대를 파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러시아가 독점하던 제3세계 회전익 시장의 거대한 벽에 한국이라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이며, 이는 곧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남미로 이어지는 수조 원 규모의 대체 시장이 우리 앞에 열리고 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