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온 神이 딸을 낳았다… 젖소 보낸 네팔 낙농 마을 답사기
韓 젖소가 이루는 기적
현지 표정이 달라졌다
사랑이 지극하면 신앙이 된다.
한낮 체감 기온 44도, 똥 냄새마저 순식간에 발효되는 눅진한 날씨. 작은 우사(牛舍)에 침상이 놓여 있었다. 농가 주민 니샤 카르키(36)씨는 여기에 모기장을 치고 보름 동안 밤을 새웠다. 젖소 ‘산이’의 출산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걱정돼 잠을 잘 수 없었다”며 “벌레도 많고 무더웠지만 이게 차라리 마음 편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산이가 딸을 낳았다. 젖이 차올랐다. 매일 30리터 넘는 우유가 나온다. 니샤는 틈만 나면 산이를 쓰다듬었다. 얼마나 쓸었는지 털에 윤기가 잘잘 흘렀다. “산이 덕에 아이들 급식비도 내고 조금씩 저축도 하게 됐어요. 제 친딸이나 매한가지예요.”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남동쪽으로 6시간을 가야 닿는 신둘리 지구 카말라마이시(市). 산이는 2022년 12월 한국에서 건너왔다. 건너왔다는 말은 너무 얌전한 표현일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었다. 이곳에 지난 2월 조성된 ‘한국·네팔 시범 낙농 마을’은 가가호호 한국 젖소로 북적인다. 마을 입구에 태극기와 무궁화가 놓여 있다. 젖소 101마리를 베풀어 준 한국에 대한 감사 표시다. 올해는 양국 수교 50주년. 주민 나라얀 더칼(24)씨는 “처음 한국 젖소를 봤을 때 신(神)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며 “집 안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나라얀은 젖소에게 ‘락슈미’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유의 바다에서 현신한 풍요의 여신.
◇받은 만큼 나눈다, 번영의 철학
헤퍼(Heifer International)의 역할이 컸다. 빈곤국 농가의 자립을 돕기 위해 가축을 보내주는 비영리 국제 개발 단체. 헤퍼는 암송아지라는 뜻이다. 6·25전쟁 직후 폐허가 된 우리나라에도 헤퍼 측은 미국에서 젖소 등 가축 3200여 마리를 무상 제공했다. 2020년 헤퍼코리아(Heifer Korea)가 설립됐다. 그해 네팔 측에서 젖소 원조를 요청했다. 다만 살아 있는 가축의 해외 반출은 검역과 비용상 이유로 이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됐다. 헤퍼코리아 이혜원(56) 대표가 농림축산식품부와 외교부를 설득했다. “낙농으로도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변신한 첫 나라가 돼보자”는 것이었다. 민관 합동 ‘네팔로 101마리 젖소 보내기’ 프로젝트가 가동됐다. 2년의 준비 작업 끝에 2022년 12월 25일, 성탄절 선물처럼 젖소가 마을에 도착했다. 네팔 공무원들조차 “기적”이라고 했다.
지난달 21일, 시범 낙농 마을 내 학교 운동장에서 헤퍼 창립 80주년 행사가 열렸다. 헤퍼 창립자 댄 웨스트(1893~1971)의 손녀 제니퍼 웨스트(55)는 감격에 젖었다. “오늘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전쟁으로 황폐해져 소와 닭을 지원받은 한국이 활력을 되찾아 이웃나라 네팔에 다시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이정표를 목격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운동장을 메운 주민 200여 명이 환호했다. 헤퍼 철학의 핵심은 ‘패싱 온 더 기프트’(Passing on the Gift). 기부받은 젖소가 첫 암컷을 낳으면 이를 꼭 이웃에게 선물한다는 서약이다. 이날 행사에서도 ‘산이’가 낳은 새끼가 이웃에게 전달됐다. 6·25전쟁 당시 한국행 비행기를 탔던 헤퍼 사무총장 설 메츠거(1916~2006)의 딸 바버라 메츠거(65)는 “아버지는 경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평화주의자”라며 “한국에서 네팔로 온 젖소들은 아버지가 꾼 꿈의 연장선에 있다”고 말했다.
◇임기응변의 연속… 24시간 출동 대기
이제 두 살을 넘긴 한국산 순종 홀스타인(얼룩소)은 한눈에 봐도 다부졌다. 현지 토종소나 버펄로보다 3분의1 이상 몸집이 컸다. 우유 생산량은 6배가 넘는다. 101마리, 대체 어떻게 옮긴 걸까? 대부분 항공사가 난색을 표한 건 당연지사. 비행기 손상이 그 이유였다. 마지막 화물 운송을 마치고 여객기로 개조할 예정이던 아시아나항공 전세기를 어렵사리 구했다. 문제는 젖소의 덩치였다. 너무 우량해 탑승이 불가했다. 결국 수령 6~7개월 된 젖소를 태웠다. 애면글면 네팔에 도착했더니 수송 차량이 없었다. 어찌저찌 용달차를 여러대 빌려 젖소를 나눠 실었다. 좁고 가파른 굽잇길로 악명 높은 ‘BP 하이웨이’를 시속 20㎞로 10시간에 걸쳐 몰았다. 이혜원 대표는 “임기응변의 연속이었다”며 “과거 우리나라에 가축을 실어 보냈던 ‘노아의 방주’ 작전도 이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열악한 환경, 찜통더위도 골치였다. 열사병이 유행했다. 주민 소바 반다리(25)씨는 “이렇게 긴 여름은 처음”이라며 “소가 얼마나 힘들까…”라고 말했다. 지난 6월 젖소 한 마리가 쓰러졌다. 이 대표를 포함 헤퍼코리아 소속 현지 수의 기술자 비벡 코이랄라(24) 등 24시간 대기조가 총출동했다. 피를 뽑고, 얼음찜질을 하고, 약을 놨다. 급한 마음에 입을 대고 인공호흡까지 했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투크 타파(52)씨는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느끼지 못한 슬픔이었다”며 눈물을 터뜨렸다. 지난달 19일에도 긴급 전화가 걸려왔다. 소 체온이 40.5도까지 올랐다. 헤퍼코리아 트럭이 한밤중 풀숲과 돌길을 질주했다. 한국 수의사들과 온라인으로 상황을 공유하며 밤새 물을 뿌리고 사료를 먹였다. 이틀 뒤 소는 다시 일어섰다.
◇北으로 간 젖소는 왜 실패했나
준다고 끝이 아니다. 소를 키우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지난 1998년 민간 단체 주도로 젖소 수백마리가 북한에 넘어갔다. 대부분 폐사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선대 회장이 북한에 보낸 1001마리 소도 같은 운명을 겪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기증한 젖소 진료를 위해 수차례 방북했던 김영찬(77·서울우유 파주유우진료소) 수의사는 “소가 전부 비쩍 말라 있었다”고 말했다. “집단농장에 소속된 젖소란 말이죠. ‘내 소’가 아닌 거예요. 관리가 전혀 안 되더군요. 거의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네팔 젖소 주치의로도 활동하는 그는 “기술과 책임감까지 전수해야 한다”며 “그래야 빨리 일어선다”고 말했다.
소를 치는 건 축산이 아니라 믿음에 가깝다. 가족의 길흉화복이 달려 있다. 힌두교에서 암소는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어머니. 한국 젖소를 키우며 이곳 주민들에게 “치토치토(빨리빨리)”는 일상어가 됐다. 더 부지런히 움직이게 됐다. 최근 럼피스킨병이 돌아 위기감이 팽배했지만, 지극정성으로 이겨냈다. 무더위에 장이 꼬이고 기력이 쇠해 주저앉은 소를 간병하다가 한 주민이 몸져누웠다. 그러자 카트만두에서 친부가 달려와 소를 돌봤다. 온가족이 매달려 결국 일으켜세웠다. 지난달 16일 추석 전날 송아지 ‘추석이’가 태어났다. 순산이었다. 신의 가호를 빌며 추석이 이마에 붉은 점(Tika)을 찍었다. 영혼의 눈을 의미한다.
◇여자들이 꿈꾸기 시작했다
젖소의 실질적 주인은 이곳 여자들이다. 가부장 사회, 움츠린 여성들의 자활 지원 성격을 지닌다. 가장 큰 변화는 이들의 목소리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주민 라밀라 데브코타(38)씨는 “예전에는 스스로를 소개할 때 ‘어디 사는 누구’ 정도였고 이마저 부끄러워 제대로 못 했지만 이제는 할 말이 많아졌다”며 “떳떳한 가장이 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집유소에 우유를 팔아 매달 20만~30만원을 손에 쥔다. 도시 직장인 월급 수준이다. 자체 여성 조직을 꾸려 2차 가공물(밀크바) 시판도 준비 중이다.
석사 학위까지 딴 고학력 여성이지만 잠시 외출할 때조차 시어머니 눈치를 봐야 했던 인디라 포크렐(39)씨는 “내가 남자였어도 이랬을까 억울하기도 했다”면서도 “우유로 수익이 나면서 외부 활동에 제약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예전에 한국은 그저 돈 벌기 위해 가는 나라 정도였지만 지금은 친정처럼 살갑게 느껴집니다. 변화를 시작할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전국의 낙농가와 시민들도 이들을 위해 십시일반 힘을 보탰다. 얼마 전 마을에 55번째 송아지가 태어났다. 대국민 댓글 공모 끝에 선정된 이름이 ‘나누리’다. ‘나누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 에라 어디카리(11)양은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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