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입니다.
저와 모 해설위원이 중계방송을 마치고 PD들과의 미팅을 위해서 중계차 쪽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걷고 있는데 한 커플 야구팬이 저와 그 해설위원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네 오지 마! 오지 말랬잖아! 왜 와 가지고 우리 팀 지게 만들어!"
저와 그 해설위원은 둘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머쓱해했습니다. 그 해설위원은 현장으로 돌아갔는데 최근에 만나서도 이 당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당황하고 놀랐죠. 솔직히 당시에는 기분이 안 좋기는 했는데 이게 팬의 마음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해설위원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말했습니다.
사실 저도 그때 많이 놀랐습니다. 서럽기까지 했고요.
사실 팬들이 중계진 승패표 만들고, 방송사 승패표도 만들어서 서로 공유를 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 저렇게 대놓고 중계진에게 표출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보니 많이 당황했어요.
이후 얼마 동안은 그 야구장에 갈 때, 팬들과 동선을 겹치지 않게 하려고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뭘 저걸로 서럽기까지 하느냐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텐데 그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원래 저는 그 몇 해 전까지 그 팀의 ‘승요(승리요정)’으로 불렸었거든요.
일부 팬들의 잘못된 열정의 표출이 아니겠느냐고요?
그렇죠. 그 행동만 놓고 보면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야구는 징크스 게임이라고 하죠. 또 '야구=미신'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많고요. 사실 그건 모두가 그래요. 팬들만 그렇게 중계진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게 아닙니다.
야구 현장에도 방송사, 해설위원, 캐스터 심지어 현장 리포팅을 맡는 여자 아나운서도 승요와 패요의 범주에 집어넣고 엄격하게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건 올해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 해설위원 한 분이 취재를 위해서 그라운드에 내려가다가 바로 다시 올라왔습니다.
“왜 안 내려갔어요?”
그 해설위원은 저를 보면서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독이 멀리서 절 보더니 쭈뼛쭈뼛하더라고요. 아. 어제 경기에 패해서 저를 피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멀리서 저를 보게 됐나 보다 생각하고 제가 먼저 피해드렸습니다.
저희 이러고 살고 있습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어요.
예전 모 감독은 저를 승리의 보증 수표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동료 아나운서가 민망했던 적도 있습니다.
당시 저는 중계가 없는 날이었고 그 동료 아나운서의 중계일이었습니다. 한창 취재 중일 시간에 그 아나운서의 휴대전화 번호로 전화가 오더라고요. 전화를 받았더니 그 아나운서는 저에게 제가 통화를 꼭 해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휴대전화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습니다. 모 감독이었습니다.
“왜 안 내려왔어요. 오늘 중요한 경기인데! 이런 날 와야지!”
징크스에 있어서는 사실 저도 똑같습니다.
특히 국가 대표 경기를 중계할 때는 승리의 루틴을 매우 철저하게 지키는 편입니다.
그 덕분에 WBSC 프리미어 12, 2회 대회 때 저는 운동을 한 기억밖에 없습니다.
2015년 1회 대회 우승할 때 숙소 헬스클럽에서 아침마다 열심히 운동을 하고 중계방송을 갔었거든요.
2회 대회에도 매일 운동을 하자고 생각하고 대회 중계에 임했는데, 첫 경기에서 4.5km를 뛰고 이겼습니다. 이후에 4.5km가 승리 기준 러닝거리가 됐고, 이기면 전날 뛰었던 거리와 같은 거리를 뛰고, 패하면 거리를 1km 씩 늘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회 끝날 때가 되니 거의 한 번에 10km 가까이 뛰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역시나 제 루틴은 경기 결과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 대회에서 우리는 일본을 꺾지 못하면서 준우승을 했고, 저는 매우 건강해졌습니다.
길게 이런 징크스와 승요, 패요관련 이야기를 드린 이유는 지난 시즌부터 이어지고 있는 몇몇 구단의 높은 승률과 또 특정 구단의 낮은 승률 때문입니다.
2024 시즌부터 저와 몇몇 해설위원의 조합이 특정팀에게는 지나치게 높고, 특정팀에게는 너무 낮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지난 시즌 중반부쯤 됐을 때 각 팀의 팬들이 제게 매우 다양한 경로로 알려주셨습니다.
승률이 높은 팀은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알려주셨고, 승률이 낮은 팀은 매우 침통하게 알려주셨죠.
그런 반응은 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장과 온라인이 비슷합니다.
승률 높은 팀에서는 저와 해설위원이 지나가는 길에도 많은 환호를 보내주십니다.
반면에 승률이 낮은 팀에서는 뭔가 따가운 시선을 여기저기서 느끼게 됩니다.
저희는 참 신기하게도 경기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그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승패의 한 요소처럼 불리고 또 취급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순철 해설위원은 그런 점에 있어서 답답함을 표시하면서 저희 채널 유튜브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그러니까 나 중계할 때 좀 이기라고! 누가 지라고 그랬어!”
20시즌째 프로야구 중계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기간 동안 저는 10개 구단 모든 팀들을 번갈아가면서 승요이기도 했고 또 패요이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도 저는 저런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지금 저를 '승요'라고 환영해 주시는 분들도 언젠가 저와 해설위원에게
“너네 오지 마!”
라고 돌변하는 시기가 올 수도 있다는 걸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금 저를 패요로 대하시는 분들도 언젠가 그 팀에 좋은 날이 오면 승요로 맞아줄 날도 올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제 마음만큼은 모든 팀의 승요이고 싶다는 것을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