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 문제 풀다 포기” 카이스트 총장도 두 손 든 수능

지난달 치러진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은 난이도 조절에 실패해, 지난 10일 수능 출제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원장이 사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학계에선 “전문가들도 이해하기 힘든 문제들을 출제했다”며 수능 폐지론까지 나오고 있다. 본지는 이번 논란을 계기로 사회 각계각층 인사에게 오답률이 높았던 수능 문제를 풀어보고 ‘수능의 미래’에 대해 고민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학 총장, 교수, 소설가, 입시 전문가 등 10여 명이 요청에 응했다.
이효석문학상·동인문학상 등을 받은 소설가 구효서씨는 국어 영역 문제 5개(6·7·12·15·17번)를 풀었다. 교수 사회에서 “너무 어렵고, 오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 철학자 칸트의 ‘인격 동일성에 관한 견해’ 문제도 포함됐다. 구씨는 “문제당 최소 3분은 투자했지만 2~3문제는 정답을 자신할 수 없더라”면서 “중등 국어 교원 자격이 있는 작가로 평생 글만 쓰고 읽었지만 몹시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수험생들은 국어 문제 하나당 평균 1분 47초 내에 풀어야 한다.

구씨는 이어 “국어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은 대학 수학 능력을 평가받은 게 아니라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라면서 “전문가도 해독 불가인 지문과 문제를 모두 이해할 능력이 있다면 왜 대학에 가서 공부하느냐”고 말했다. 그는 “수능은 변별력을 위해 응시자를 반드시 탈락시키겠다는 목적을 달성하려 교육적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덧붙였다.
국어 교사 출신으로 EBS 등을 거친 입시 전문가 이만기 유웨이교육평가연구소장 역시 5개 문제를 풀어보고 “다 맞히기는 했지만 솔직히 시간은 초과했다”고 말했다. 그는 “수능이 갈수록 난해해지더니 몇몇 문제는 법학적성시험(LEET) 수준까지 온 것 같다”며 “과도한 줄 세우기식 상대평가인 수능 때문에 사교육 의존이 더 심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 소장은 “수능은 기초 학습 소양을 평가하는 자격고사로 전환하고 대학의 선발 자율권을 강화하자”고 했다.
이은홍 국립순천대 국어교육과 교수도 시간 내에 다섯 문제를 풀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이 교수는 “현재 수능은 주어진 글을 단지 이해하는 데 집중하는 ‘인지적 능력’ 평가에만 치중돼 있다”며 “정작 대학에서 수학하는 데 필요한 비판적·창의적 사고 역량이나 의사소통 역량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영어 과목에선 오답률 높은 5개 문제(24·32·33·34·37)를 제시했다. 김정은 전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34번 문제는 푸는데 8분 넘게 걸렸다고 한다. 김 교수는 “해석을 넘어 복잡한 논리 구조와 추론 과정을 요구하고 문장이 구조적으로 매우 난해했다”며 “37번 문제에 나오는 ‘empirical findings(실증적 연구 결과)’ 같은 어휘는 대학 4학년생 이상이 이해할 수 있는 고난도 학문적 개념”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다른 문제도 독해 능력 측정을 벗어나 전문 배경 지식을 요구하거나 과도한 인지적 부담을 줘 고교생 평가로 적합하지 않다”며 “교과서 수준에 부합하는 어휘, 문장, 주제를 담은 문제로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가장 논란이 된 칸트의 ‘법치주의 관점’에 대한 문제(31~34번)를 풀어본 이용원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시간 내 답은 맞혔으나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문제를 풀다 지문으로 5번 돌아갔다”며 “영어 능력 평가를 넘어 철학적 사고력을 평가하는 식의 문제를 고교생이 풀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교육부(당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포항공대 총장을 역임한 김도연 태재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은 과학탐구 화학 II 문제 5개(14·15·17·19·20번)를 풀었다. 두 개를 맞혔다고 한다. 김 이사장은 “문제에 적용된 개념은 잘 알지만, 풀이 기술이 없다 보니 시간 내에 답을 찾기 어려웠다”며 “이런 평가 방식을 AI 시대가 온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이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챗GPT에 이 문제들을 입력하면 순식간에 정답을 찾아준다”며 “이런 문제를 1~2분 만에 맞춰내는 기술이 왜 아직 인재 선발의 척도가 되고 있느냐”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인재는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자신의 방법으로 답을 탐색하고 그 과정에서 성취를 느끼는 사람”이라고 했다.
김 이사장은 객관식인 수능 문제가 공정하다는 환상을 깨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대치동 학원에서 답을 빨리 찾는 기술을 익힌 학생이 원하는 대학·학과에 진학하는 문제가 고착화됐는데, 이것이 공정인가”라며 “수능 폐지가 어렵다면 사고력을 볼 수 있는 논·서술형 주관식이라도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카이스트에서 산업공학 학·석사를, 프랑스 응용과학원(INSA) 리옹에서 전산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광형 카이스트(KAIST) 총장은 본지 요청에 과학 탐구 물리 영역 문제를 풀다가 ‘포기’를 선언했다. 이 총장은 “도저히 풀지 못하겠더라”며 “풀이 기술이 없으면 손도 못 대는 난해한 문제들을 보며 이걸 푸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총장은 “AI 시대에 창의 인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모두 공감하면서 왜 수능은 갈수록 거꾸로 가고 있느냐”며 “만점자가 수백 명이 나와도 좋다. 수능도 미국의 SAT처럼 학교 교육에 충실했다면 만점을 받을 수 있는 기초 학력 테스트가 돼야 한다”고 했다. 이어 “시대에 맞는 교육 철학을 고민하고 학생을 선발할 수 있도록 이제 대학에 입시 자율권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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