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시즌 마지막 주간이다. 순위 싸움과 개인 기록 달성 여부로 많은 것이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끝이 다가올수록 시간은 더 쏜살같이 흘러간다.
지난주 이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Clayton Kershaw has announced he will retire at the end of the 2025 season.'

클레이튼 커쇼(37)가 이별을 고했다. 커쇼는 올 시즌이 끝나면 은퇴를 발표했다. 올해 규정이닝은 채우지 못했지만, 10승과 3점대 ERA를 기록하면서 충분히 현역 생활을 더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10승2패 3.55, 106.1이닝).
커쇼는 생각이 달랐다. 종착역에 도달했다고 판단했다. 18년 커리어의 마침표가 찍혔다.
위엄
커쇼는 2008년에 데뷔했다. 2008년 다저스엔 박찬호도 있었다. 커쇼는 개막 전 박찬호와 함께 5선발 후보 중 한 명이었다. 커쇼의 메이저리그 출발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엿볼 수 있다.
2011년 커쇼는 최정상에 우뚝 섰다. 21승 ERA 2.28, 248삼진으로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그리고 23세 나이로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다저스 역사상 두 번째 최연소 사이영상 투수였다(1981년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20세).
커쇼는 질주했다. 2011년부터 4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다. 2013-14년은 연속 사이영상 수상, 별다른 경쟁자가 없었던 2014년은 투수 MVP까지 석권했다. 내셔널리그 투수 MVP는 1968년 밥 깁슨 이후 46년 만이었다. 바야흐로 커쇼의 시대였다.
2010-19년 투수 승리기여도(bWAR) 순위
59.3 - 클레이튼 커쇼
56.9 - 저스틴 벌랜더
55.0 - 맥스 셔저
45.5 - 콜 해멀스
44.6 - 크리스 세일
*bWAR = <베이스볼 레퍼런스> 승리기여도
커쇼는 2010년대를 지배했다. 통산 294경기(293선발) 평균자책점 2.31이었다. 150경기 이상 선발로 나온 투수들 중 2점대 평균자책점은 커쇼와 제이콥 디그롬(2.62)뿐이었다. 이 가운데 커쇼는 완투 25회와 완봉 15회(노히터 1회)를 장식했다. 모두 최다 1위였다.

커쇼는 허리와 어깨 부상 때문에 균열이 생겼다. 고질적인 허리 부상이 30대 커쇼를 괴롭혔다. 2020년대도 여전히 수준급 투수였지만, 전성기에 비하면 위력이 약해졌다. 실제로 커쇼는 단축시즌이 치러진 2020년 이후 6년 연속 규정이닝을 넘기지 못했다.
커쇼의 이닝 변화
2020 - 58.1이닝
2021 - 121.2이닝
2022 - 126.1이닝
2023 - 131.2이닝
2024 - 30.0이닝
2025 - 106.1이닝
2020년대 메이저리그는 새로운 야구가 펼쳐졌다. 각종 분석을 바탕으로 한 최신식 이론이 야구에 접목됐다. 투수들의 구속은 점점 빨라졌고, 던지는 구종도 더 세분화됐다. 여기에 피치 클락과 주자 견제 제한 등 투구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규정들도 도입됐다. 급격하게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사라진 투수들이 부지기수였다.
커쇼도 선뜻 받아들이진 못했다.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내 달라진 상황을 인정했다. 기량이 떨어지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힘들었다.
커쇼에게 2020년대는 버티는 시간이었다. 2010년대 쌓아올린 위상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통산 200승과 3000탈삼진 등의 금자탑도 쌓을 수 있었다.
악전고투 끝에 얻은 훈장이었다.
다저스
다저스가 현 체제를 갖춘 건 2012년 5월이다. 심각한 자금난에 빠졌던 프랭크 매코트가 결국 구단을 내놓으면서, 구겐하임 파트너스 CEO 마크 월터를 중심으로 하는 새 구단주 그룹이 다저스를 인수했다. 매수 대금만 무려 21억 달러(약 2조9292억)가 들었다.
그 이전 다저스는 매년 성공가도를 달리진 않았다. 2010-12년에는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커쇼의 황금기 초반 시절이기도 했다.
다저스는 2013년부터 리그를 대표하는 명문 구단으로 거듭났다. 천문학적인 투자로 막강한 전력을 구축했다. 13년 동안 단 한 번도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 지난 12시즌 중 11시즌에서 지구 우승을 차지했고, 두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도 일궈냈다.
이 변천사를 지켜본 커쇼는 다저스를 향한 애정이 남달랐다. 다저스도 2014년 1월 커쇼를 역사상 첫 2억 달러 투수로 만들어줬다(7년 2억1500만 달러).
하지만 이후 협상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커쇼는 2018시즌이 끝난 뒤 옵트아웃 권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 해 공교롭게도 부상 및 구속 감소에서 하락세가 감지됐다. 다저스로선 이전 같은 대우를 해주는 게 쉽지 않았다. 그 사이 계약을 주도하는 총책임자도 네드 콜레티에서 앤드류 프리드먼으로 바뀌었다. 프리드먼은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당시 양측은 이례적으로 옵트아웃 결정 시한을 늦췄다. 그 정도로 접점을 찾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 다저스도 커쇼가 FA 시장에 나갈 경우 후폭풍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한 걸음 물러선 건 커쇼였다. 발표된 계약 규모는 3년 9300만 달러였다. 프리드먼은 끝내 1억 달러 계약을 주지 않았고, 수상 실적과 선발 등판 횟수에 따라 보너스를 책정했다. 계약 직후 커쇼가 "많은 사람들이 잘못됐다는 것을 증명하겠다(I'm looking forward to proving a lot of people wrong with that)"고 말한 부분에서 그 기분을 짐작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커쇼는 자신의 시간을 되돌리지 못했다. 다저스는 3년 계약이 끝나자 두 번의 단년 계약만 제안했다. 2024년 2월에 체결한 2년 계약은 보장액이 1000만 달러였다.
지난 겨울 커쇼는 선수 옵션(500만)을 거부하고 FA가 됐다. 그러나 다저스와 재결합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다저스는 기존 옵션보다 250만 달러 더 많은 750만 달러로 커쇼를 붙잡았다.
커쇼가 다저스에게 보여준 진심을, 다저스도 잘 알고 있었다.
커쇼는 다저스를 떠날 수도 있었다. 한때 고향팀 텍사스가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지금도 시장에 나오면 수요가 있을 것이다. 선수로서 상품성만 봐도 가치가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쇼에게 최우선 순위는 항상 다저스였다. 커리어에 다른 팀이 추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다저스는, 커쇼의 또 다른 자부심이었다.
가을
커쇼는 명실상부 최고의 투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특히 포스트시즌에서 고개를 숙이는 경우가 많았다. 오죽하면 '방심한 커쇼'라는 밈(meme)까지 생겼다.

시발점은 2013년 세인트루이스와의 챔피언십시리즈 6차전이었다. 선발로 나온 커쇼는 4이닝 10피안타 7실점으로 크게 부진했다. 다저스의 가을야구 탈락이 결정된 경기였다.
이듬해 커쇼는 세인트루이스와 디비전시리즈에서 재회했다. 그 해 MVP와 사이영상을 휩쓸었을 정도로 물이 오른 상태였고, 작년 수모를 복수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커쇼는 7회 대참사에 빠지면서 악몽을 벗어나지 못했다(6.2이닝 8피안타 8실점).
포스트시즌에서 커쇼를 괴롭힌 팀이 세인트루이스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2016년 디비전시리즈 4차전에선 워싱턴에게 6.2이닝 5실점,
같은 해 챔피언십시리즈 6차전에선 컵스에게 5이닝 5실점,
2018년 챔피언십시리즈 1차전은 밀워키에게 3이닝 5실점,
2023년 디비전시리즈 1차전에선 애리조나에게 0.1이닝 6실점을 헌납했다.
커쇼는 유독 포스트시즌만 되면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정규시즌용'이라는 오명도 썼다. 비슷한 시기 포스트시즌에서 압도적인 피칭을 한 매디슨 범가너와 대비되면서 커쇼의 가을 부진은 더 도드라졌다.
정규시즌 통산 ERA 2.54의 커쇼는, 포스트시즌 통산 39경기(32선발) ERA는 4.49에 그쳤다. 0.74개 수준의 정규시즌 통산 9이닝 당 피홈런 수가, 포스트시즌에선 1.39개로 증가했다. 결정적인 한 방을 허용하면서 야구의 냉혹함에 무릎을 꿇었다.
일각에서는 커쇼가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웠다고 옹호했다. 에이스라는 이유로, 또 다저스에 있다는 이유로, 포스트시즌에서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다저스 출신 알렉스 우드는 "포스트시즌에서 커쇼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 누구에게도 요구된 적이 없었다(In the postseason, former Dodger Alex Wood told me, Kershaw shouldered a workload “that no one else would even be asked to do)"고 말한 바 있다.
커쇼는 올해도 포스트시즌에 나선다. 로버츠 감독은 "그를 위한 역할과 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I still feel there is a role for him, a spot for him)"고 밝혔다.

커쇼의 최근 포스트시즌 등판은 2023년 디비전시리즈 1차전이다. 애리조나에게 0.1이닝 6실점으로 난타당했다. 커쇼가 은퇴를 고민하게 된 등판이었다.
마지막이 될 커쇼의 가을이 좋은 기억으로 마무리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굿바이
커쇼는 메이저리그에서 친근한 선수였다. 박찬호, 류현진과 한솥밥을 먹었고, 국내에서도 팬층이 두터운 다저스에 있었다. 이 때문에 커쇼의 은퇴는 다른 선수들보다 울림이 강했다.
커쇼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년 부상을 당하면서 심신이 지쳤다. 버티는 것이 더 힘들어지기 전에 퇴장을 결심한 것이다. 누적을 고려하면 계속 뛸 수 있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최고 투수로서의 자존심이었다.
커쇼는 무너지는 모습을 더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을에 늘 과제를 안고 있었던 선수가, 이번 가을은 우리에게 그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를 남겼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지만, 익숙함과의 헤어짐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마운드에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설렘을 줬던 투수가 마운드를 내려간다. 선발 투수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투수가 언제 또 등장할지는 의문이다.
커쇼가 떠난다. 한 시대가 완전히 저물었다.
이창섭
현 <SPOTV> MLB 해설위원
전 <네이버> MLB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