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컥 뛰어든 생애 첫 투르뒤몽블랑…‘어떻게든 되겠지!’
가다가 돌아올 생각으로 시작
선택의 기로에서 홀린 듯 직진
등산여행 알프스 몽블랑②
숙소 지하 창고에 한국에서 메고 온 60리터(ℓ)짜리 배낭을 맡기고 조촐한 등짐 하나를 꾸려 조용히 길을 나섰다. 밤사이 비는 그치고 새벽녘 투명한 안개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천천히 눈을 뜨고 있었다. 숙소 앞 사거리 버스정류장에서 레우슈로 향하는 첫차를 탔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버스 안 공기는 승객들로 부산했다. 나처럼 투르뒤몽블랑(TMB)을 떠나는 여행자들일 것이다. ‘맙소사, 정말 가는 건가? 이렇게 가도 되는 건가?’ 순간 마음은 불안과 걱정으로 일렁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나선 여정이었기에 산장을 한 군데도 예약하지 못했다. 시즌의 산장을 이용하려면 적어도 두세 달, 길게는 1년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해야 했다. 그렇다고 비박을 위한 캠핑 장비를 챙겨 간 것도 아니었다. 고작 20리터에 불과한 작은 배낭에 들어 있는 것은 방풍 재킷과 보온 재킷, 긴바지, 갈아입을 옷, 헤드랜턴과 휴대폰 충전기, 세면도구,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책 ‘월든’과 일기장이 전부였다. 이것만으로도 배낭은 묵직했다. 지퍼를 겨우 닫은 배낭을 어깨에 걸머메고 레우슈에서 하차했다. 우선은 가는 데까지 가다가 되돌아올 생각이었다.
길이 가파르고, 길었지만
레우슈는 샤모니에서 6㎞ 정도 떨어진 작은 산간 마을이다. 해발 고도는 샤모니와 마찬가지로 1000m에 이른다. 투르뒤몽블랑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이기에 시즌 아침이면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레우슈에 도착해 투르뒤몽블랑의 시작과 끝을 기념하는 작은 나무 아치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샤모니를 등지고 앞서 걷는 사람들의 뒤꽁무니를 따라갔다. 내가 선택한 코스는 투르뒤몽블랑 대회와 같은 방향인 반시계 방향 코스였다. 이대로 정처 없이 걸어가다 보면 프랑스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와 스위스에 이르게 된다.
레우슈에서 1800m 고지의 벨뷔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단숨에 올라가는 방법도 있었으나 자고로 뚜벅이 여행자라면 사서 고생하는 법.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기슭을 거슬러 보자 고개 에 다다른 시간은 오전 10시. 눈앞에는 푸른 초원이 펼쳐졌고 그 뒤로 동화책에 나올 법한 산악 열차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들어섰다. 이곳에서 산악 열차를 타면 몽블랑 정상 등정의 출발점인 니데글까지 이동할 수 있다. 추억의 니데글. 9년 전 몽블랑 정상에 도전하던 날이 또 한 번 떠올랐다.
‘언젠가 몽블랑 정상에 오르는 날이 찾아올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트리코 고개로 향했다. 서서히 그윽해지는 숲 사이로 계곡이 눈치 없이 소란스럽게 물거품을 일으키며 쏟아졌다. 몽블랑 빙하가 녹아 흐르는 물이었다. 설산의 하얀빛에 눈이 부셔 고개를 뒤로 젖히니 머리 위로 해발 4052m의 봉우리 ‘에귀유드비오나세’가 솟아 있었다. 몽블랑 일대의 산군 중에는 에귀유뒤미디 등 유독 ‘에귀유(Aiguille)’라는 이름이 붙은 산이 많은데, 에귀유란 바늘처럼 뾰족한 침봉을 가리킨다.
해발 2120m의 트리코 고개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흡사 바람이 다니는 길 같았다.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어 적막한 능선 위를 부지런히 걸어 트리코 고개에 도착했다. 트리코 고개는 어쩌면 오늘 내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산일지 모르겠다. 트리코 고개에 서서 저 아래 미아지 산장을 굽어보니 지금 이 길로 직행해 내려간다면 왔던 길을 되돌아 내가 출발한 레우슈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만큼 내려가는 길이 가팔랐고 또 무척 길었다. 이대로 계속 나아갈지, 여기서 멈추고 왔던 길로 되돌아갈지 선택해야 했다.
두 다리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 1시간 정도 걸려 하염없이 내려와 정오께 미아지 산장에 도착했다. 산을 넘은 것이다. 미아지 산장은 한낮의 파티라도 열리는 듯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고 휴식을 취하는 여행자들로 활기가 넘쳤다. 산장에 들어가 주인에게 콜라 한 캔을 주문하며 혹시 오늘 밤 이곳에서 묵을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난감해하며 돌아온 대답은 자리가 없다는 말이었다. 이를 어쩐다? 마음은 점점 다급해졌다. 다음 마을인 레콩타민은 제법 규모가 있으니 어쩌면 숙소가 있을지도 몰랐다.
정말이지 어떻게든 된다
레콩타민에 도착해 투르뒤몽블랑 여행자센터에 들러 현재 나의 대책 없는 상황을 설명했다. ‘식스틴’이라는 이름의 여행자센터 직원은 바로 몇몇 산장에 전화를 걸었다. 프랑스어로 통화를 하기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전화를 끊을 때마다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것으로 미뤄 대략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마도 다섯 번째 통화였을까? 식스틴은 화색을 띠며 산장을 찾았다고 전했다. 투르뒤몽블랑 코스에서 약 2.7㎞ 떨어진 데 프레 산장에 침대 하나가 비었다고 했다. 레콩타민에서는 약 8㎞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과연 해답은 현장에 있었다. 정처 없이 떠다니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산에서는 다른 문제였다. 산에서 잘 곳이 없다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죽으라는 법만은 없었다. 처음 떠나올 때 가졌던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믿음은 이렇게 더욱 확고해졌다. 정말이지 어떻게든 된다. 길에서 우왕좌왕 시간을 보낸 까닭에 시간은 오후 4시를 지나고 있었다. 노트르담 성당을 거쳐 데 프레 산장으로 향했다. 산장 식사 시간인 저녁 7시까지 들어가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하지만 데 프레 산장으로 향하는 마음은 번잡하기만 했다. 경치도 즐기지 못한 채 이렇게 위태로운 마음으로 잘 곳 구하는 데만 급급해 투르뒤몽블랑을 완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늘 밤은 운이 좋았다고 치자. 앞으로 남은 밤 산장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을까.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지도 모르는데. 고대하고 아껴뒀던 생애 첫 투르뒤몽블랑을 이렇게 정신없이 치르게 될 줄이야. 그러다가 얼떨결에 맞닥뜨린 데 프레 산장은 ‘이런 높은 곳에 산장이 있다니!’라는 감탄이 절로 들 만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글·사진 장보영 등산여행가
스물다섯 살에 우연히 오른 지리산에 매료된 이후 히말라야와 알프스, 아시아의 여러 산을 올랐다. 그러다 산을 달리기 시작했고 산악 잡지도 만들었다. 지은 책 ‘아무튼, 산’은 산과 함께한 청춘의 후일담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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