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40년, 별명 ‘또 해?’ 임지훈... “앨범 내고 공연 또 해요”

윤수정 기자 2024. 10. 18.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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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40주년 음반 내는 임지훈
소극장 공연만 2000회를 넘게 한 임지훈은 “가까운 거리에서 관객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는 작은 규모의 공연을 좋아한다”고 했다. /조인원 기자

“또 해?” 가수 임지훈이 1993년 2월 12일 서울 대학로 충돌2 라이브홀에서 ‘100일 콘서트’를 시작했을 때 주위에서 말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그가 펼친 소극장 공연 횟수가 2000회가 넘었기 때문. ‘또해’는 임지훈의 별명이 됐다. 그로부터 5개월 뒤 대학로 또 다른 소극장 학전에서 장기 공연을 연 김광석은 ‘또해2′로 불렸다.

1990년대 소극장 공연 문화를 주도한 임지훈이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임지훈(65)은 내달 22일 서울 연세대 대강당에서 4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연다. 이달 말엔 기념 앨범 ‘크레용’도 낸다. 최근 광화문에서 만난 그는 “40년간 내 이름 석 자가 박힌 노래를 꾸준히 부를 수 있던 감사함을 어릴 적 크레용을 선물 받고 느낀 환희처럼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전곡을 직접 썼지만, 노래는 색색의 크레용처럼 주현미, 민혜경, 박승화 등 다양한 목소리를 빌렸다. 그중 노래 ‘임스(IM’s)’는 더 특별하다. 만화작가로 활동하며 앨범 표지를 그린 큰아들 윤식, 13년 차 아이돌 그룹 비투비 멤버인 둘째 아들 현식이 목소리를 더했다. 임지훈은 “제목을 직역하면 ‘임씨 삼부자 노래’”라며 “현식이는 무대에도 같이 선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선물처럼 찾아온 가수 활동은 아니었다. 임지훈은 “내 음악 원천은 ‘외로움’이었다”고 했다. 중1 때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집안을 돌보던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여덟 살 위 누나는 파독 간호사의 길을 택했다. “누나는 양희은씨의 ‘세노야 세노야’를 참 잘 불렀어요. 가수를 하고 싶어 했던 누나가 남긴 통기타가 내 유일한 친구이자 음악 동아줄이었죠.”

스무 살 무렵부터 서울 종로 음악감상실 ‘무아’에서 “송창식의 ‘상아의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로 이름을 날리며 가수를 꿈꿨다. 1984년 산울림 맏형 김창완이 문예부장으로 있던 대성음반사를 통해 그룹 ‘김창완과 꾸러기들’로 데뷔했다. 임지훈은 “대성음반 사장님과 창완이 형이 내 가수 인생의 은인”이라고 했다.

임지훈을 비롯해 그룹에서 ‘꾸러기’를 맡은 6인은 당대 노래 좀 한다는 청년들 사이에서도 입소문 난 실력자들이었다. 대표곡 ‘회상’이 실린 1집부터 대박이 났고, 이대 정문 앞 소극장에서 첫 번째 100일 콘서트도 가졌다. 임지훈은 “이 공연 무대마다 동물원과 김광석이 팬으로 쫓아왔고, 어느 순간 술자리 같이하는 동생들로 변했다. 그 나비 효과로 이들의 데뷔도 이어졌다”고 했다. 동물원의 김창기가 1987년 임지훈의 솔로 데뷔곡 ‘사랑의 썰물’을 써줬고, 이를 들어본 김창완이 동물원 1집을 기획했다.

인터뷰 날 짙은 색안경을 쓰고 온 임지훈은 “내겐 올해 40주년이 제2의 음악 인생 기점과도 같다”고 했다. “지난해 망막박리로 눈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오는 12월 말 처음으로 일본어로만 10곡을 채운 앨범 ‘기억의 시간’을 일본 현지에서 발매한다. 신인으로 돌아가는 셈”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 다신 빛을 볼 수 없을까 봐 무서웠죠. 그런데 다시 볼 수 있게 됐으니, 도전 못 할게 뭐 있겠어요? 전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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