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구두 닦는 기부천사의 인생 철학

경남도청, 경남도의회, 경남경찰청에서 스스럼없이 사무실 문을 열고 구두 닦지 않겠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 정헌일(65) 씨다. 20년 정도 됐으니 "구두"라고 말하는 큰 목소리에 놀라는 이보다 익숙하게 신발을 건네는 단골이 많다. 정 씨는 매달 구두를 닦아 번 돈 일부를 기부한다. 2003년부터니 20년이 넘었다.

정 씨는 지난 14일 도의회 청사 한편에서 구두를 닦고 있었다. 본회의가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도의회를 찾는다. 그는 "구두를 맡겨주신 도민 덕분에 먹고산다. 또 그 덕에 저도 기부라는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연대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겼다"며 "기부 이후 모든 일이 잘됐다. 정말이다"고 말했다.

정헌일 씨가 14일 경남도의회 청사 한편에서 구두를 닦고 있다. 본회의가 열리는 날이면 도의회를 찾는다. /이미지

정 씨는 2003년 노인복지 시설 보현행원에 20만 원을 맡겼다. 첫 나눔이었다. 그렇게 이어온 기부는 4100만 원을 넘는다. 기부처는 유니세프,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지역 사회복지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매달 서너 곳에 30만~40만 원 꼭 기부한다.

그는 '이름 없는 천사'처럼 기부도 했다. 정 씨는 "어렸을 적에 옛 진해시 소사에 살았다. 몇 년 전 진해우체국 우체통에 100만 원이 든 봉투를 넣은 적이 있었다. 두 번 정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누구보다 가난을 잘 안다.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하는 아픔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울산에서 4남 1녀 중 쌍둥이 막내로 태어났는데 2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정형편은 기울었다. 8살 때 머슴살이를 시작했고 14살에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판금 일을 했다. 경력이 쌓이며 실력을 인정받아 반장직 제의를 받았지만 한글을 몰라 회사를 관뒀다. 20대 중반 충남 대천시(현 보령시)에서 탄광 노동자로 일했지만 탄광이 폐쇄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분식집, 만둣집을 했고 엿장수, 목수, 염전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다 구두를 닦고 있다. 한 켤레 4000원을 받는다. 하루에 7만~8만 원, 한 달에 160만 원 정도 번단다. 한 곳에만 있지 않는다. 진주 도청 서부청사, 창원중부경찰서와 마산동부경찰서, 김해서부경찰서 등을 정기적으로 돌며 구두에 광을 낸다. 시커먼 구두약을 맨손에 종일 묻히지만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정 씨는 "15일 김해서부경찰서에 가야 하는데 공휴일이라 쉰다"고 했다.

정헌일 씨가 14일 경남도의회 청사 한편에서 구두를 닦고 있다. 본회의가 열리는 날이면 도의회를 찾는다. /이미지

여름철에는 일거리가 많지 않다. 구두보다 슬리퍼를 신기 때문이다. 비수기엔 동서식품 공장에서 시간제로 일을 한다. 얼마 전 구두를 닦고 싶다며 도청에 있느냐고 묻는 전화가 왔지만, 공장에서 일하는 중이라 다음에 찾아가겠다고 했단다.

정 씨는 꾸준하게 일을 할 수 있고 밥벌이를 넘어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삶에 감사히 여긴다. "한글을 정확히 빠르게 읽지 못한다. 운전면허증 시험도 마흔 번 넘게 떨어졌다. 더듬더듬 읽으니 시험시간이 언제나 부족했다"며 "그러다 운전면허 시험관이 문제를 읽어주고 응시생이 답을 적는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한 번 만에 붙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직접 차를 몰고 창원과 김해, 진주를 찾아 구두를 닦는 일이 천직인 것 같다. 기부는 낙이다"고 했다.

20년 구두닦이 인생 강연자로도 활발히 활동하는 정 씨. 작은 기부가 모여 또 다른 나눔을 만드는 지역사회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연결돼 있다고 강조했다.

/이미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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