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이 생전에 손자에게 써준 글귀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세 가지는 운(運), 둔(鈍), 근(根)이다." 운둔근(運鈍根). 이 단어는 이 회장이 사업과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키워드입니다. 운이 따라야 하고, 운이 올 때까지는 둔한 듯 묵묵히 견디며, 그 모든 걸 관통하는 끈기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죠. 요즘처럼 ‘빠르게 성공하는 법’, ‘결과를 앞당기는 전략’이 넘쳐나는 시대에 이 단어는 오히려 시대착오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에 다시 꺼내 읽어야 할 단어이기도 합니다.
1. 운(運): 흐름을 읽고, 때를 기다리는 지혜
이병철 회장은 성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운(運)’을 꼽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운은 단순한 행운이나 우연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흐름을 읽는 감각, 그리고 흐름을 기다릴 줄 아는 인내에 가깝습니다. 변화의 징후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리고, 움직일 타이밍이 올 때까지 조용히 준비할 줄 아는 사람. 그가 바로 ‘운이 따르는 사람’입니다.
운은 스쳐 지나가는 기회처럼 보이지만, 실은 오랜 시간 준비한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감춰진 문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그 문을 열기 위해 ‘흐름을 관찰하고, 관계를 다지고, 자신을 다듬는 시간’을 가장 소중히 여겼습니다. 마치 농부가 봄을 기다리며 씨앗을 뿌리고 밭을 가꾸듯, 성공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 운은 오는 것이 아니라, 맞이할 줄 알아야 오는 것입니다.
2. 둔(鈍): 날카로움보다 오래 버티는 묵직함
두 번째는 ‘둔(鈍)’입니다. 흔히 ‘둔하다’는 말은 부정적으로 들립니다. 빠릿하지 못하다, 반응이 느리다, 눈치가 없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이 말한 둔은 그런 둔함이 아닙니다. 그가 말한 둔은, 조급하지 않은 사람의 자세입니다. 쉽게 흔들리지 않고, 변화에 휘둘리지 않으며, 한 길을 우직하게 걸어갈 수 있는 사람. 바로 그 사람에게 세상은 결국 길을 내어줍니다.

환경은 늘 바뀌고, 위기는 늘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이때 필요한 건 예민한 촉보다, 움직이지 않을 중심입니다. 둔한 사람은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조용히 자신을 믿고, 끝까지 버팁니다. 그리하여 결국, 빠른 사람은 멀리 가지 못하고, 둔한 사람이 살아남는 시대가 오는 겁니다. 속도의 게임이 끝난 후, 남는 것은 깊이의 싸움입니다.
3. 근(根): 뿌리처럼 굳건한 끈기의 힘
세 번째는 ‘근(根)’, 즉 뿌리입니다.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가장 깊은 곳에서 전체를 떠받치는 힘입니다. 성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 중요한 건, 그 성과를 지탱할 수 있는 내면의 뿌리, 즉 끈기와 근성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업이란 우연히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의욕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수많은 실패 사례를 철저히 분석하고, 각 산업의 조건과 구조를 면밀히 살핀 뒤에야 움직였습니다. 감정이나 열정만으로는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끈기는 단지 ‘참는 힘’이 아닙니다. 판단을 늦추는 지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중력, 그리고 지속가능한 리듬과 구조를 만들어내는 실행력입니다. 이병철 회장이 말한 ‘근’은 그런 뜻이었을 겁니다. 단단한 뿌리를 가진 사람만이,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래갑니다.
결론: 오래가는 지혜, '운둔근'
‘운둔근(運鈍根)’. 세 글자에 담긴 이병철 회장의 인생 철학은, 결국 ‘빨리 가는 법’이 아닌, ‘오래 가는 법’을 말해줍니다. 운을 읽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 조급하지 않고, 묵묵히 버틸 줄 아는 사람. 눈에 띄지 않더라도, 깊이 뿌리내리는 끈기를 가진 사람. 이 세 가지가 한 사람 안에 모일 때, 비로소 변화에 휘둘리지 않는 성장이 시작됩니다.
요즘 우리는 너무 빠르게 결과를 원합니다. 즉각적인 피드백, 빠른 성과, 눈에 보이는 성공. 하지만 진짜 단단한 사람은 속도보다 방향, 속임수보다 원칙을 따릅니다.그렇기에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 붙잡아야 할 단어는 바로 이 오래된 세 글자입니다. 운둔근. 세상은 바뀌어도,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오래가고 싶다면, 깊게 뿌리내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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