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시론] 한미 3500억弗 투자 해법, 국익부터 고려해야

최근 미국 내 구금 사태를 계기로 한미 간 투자 관계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다. 미국은 한국에 약 3500억 달러 규모의 선불 투자를 요구하며, 사실상 ‘조건부 협력’을 강요하고 있다. 이는 동맹 간 상호호혜적 협력이라기보다,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요구에 가깝다.
문제는 이 요구가 한국 경제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의 외화보유액은 약 4163억 달러로, 이는 환율 방어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안전판이다. 미국이 요구하는 3500억 달러는 외화보유액 대부분을 소진해야 가능한 규모다. 국가 신용도와 금융 안정성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수 있다. 3500억 달러는 한화 약 486조원으로 2025년 국가 예산의 약 4분의 3에 해당하며, 중소기업 투자 예산의 100배에 달한다.
미국 내 일부 경제전문가들조차 “무리한 대미 투자를 감수하기보다 관세 인상이라는 단기적 비용을 감내하더라도 국내 투자를 강화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고 조언했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중소기업 R&D에 1조원을 투자하면 약 3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한다. 따라서 대미 투자 규모를 국내 산업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조정하고, 그만큼을 중소기업 연구개발·첨단 제조시설 확충·지역 인프라 강화에 투입한다면 산업공동화 방지와 수십만개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 이는 수출 확대를 넘어, 내수 자립과 수출 경쟁력 강화를 동시에 이루는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는 길이기도 하다.
더욱이 트럼프 행정부는 정치적 판단에 따라 관세율이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등을 임의로 변경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대미 투자는 단기적 수치가 아닌 장기적 국가 전략 아래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정부는 협상을 주도하되, 민간의 투자 조건과 현실적 이익을 충분히 반영한 ‘투트랙 협상전략’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외교 테이블에서는 투자액과 관세율을 협상 조건으로 연계하되, 동시에 자립적 수출 역량을 강화하는 다층적 접근이 요구된다. 대기업 또한 수익성과 투자 조건을 명확히 따져 미국 측에 자율적으로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미국 시장의존도를 줄이고, 대미 우회수출 전략을 통해 관세리스크를 분산하는 노력과 함께, EU·동남아·중동·중남미 등으로 수출시장을 다변화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상호호혜의 원칙에 기반한 다자무역 체제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고, 균형잡힌 수출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 IMF 외환위기를 국민의 금 모으기 운동, 기업의 구조조정, 정부의 혁신 정책으로 극복한 경험이 있다. ‘한강의 기적’ 또한 절대 빈곤을 스스로 이겨낸 자립의 역사였다. 1950년대 한국 사회에는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고, 일본을 잊지 말고, 조선은 조심하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물론 오늘날 국제질서와는 다르지만, 그 안에 담긴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국제 관계는 언제든 이해관계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결국 믿을 것은 자립 경제이며, 이는 곧 자주 외교와 안보 자립의 길로 이어진다. 외교 협상은 이벤트가 아니다. 국민적 합의와 전문가 집단의 분석, 투자 기업과 국가의 실익을 바탕으로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김익성 동덕여대 교수 (전 유통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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