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이 꿈꾸는 핵추진 잠수함. 그 심장부에 들어갈 연료를 미국이 막고 있어 아직 사업에 진척이 없는 상황입니다.
동맹국에게 핵연료를 금지시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지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상치 못한 곳에서 구원의 손길이 뻗어왔습니다. 에펠탑의 나라, 프랑스입니다.
마크롱 대통령이 청와대 상춘재에서 이재명 대통령에게 건넨 제안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의 제안은 한국 핵잠수함 사업의 판도를 바꾸고 대안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처음부터 차근차근 짚어보겠습니다.
트럼프가 꺼낸 카드, '핵연료 공급 차단'
사태의 발단은 한국의 중동 정책에 있습니다. 미국이 이란 전쟁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동맹국들을 압박하는 가운데, 한국은 이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한미 원자력 협정을 근거로 핵잠수함용 핵연료 공급에 제동을 걸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위협인지 이해하려면 한국의 핵잠수함 계획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해군이 추진 중인 KSSN, 즉 5,000톤급 핵추진 잠수함 사업은 한국의 전략적 억제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핵심 프로젝트입니다.
그런데 핵추진 잠수함의 심장은 바로 원자로이고, 그 원자로를 돌리려면 고농축 혹은 전농축 우라늄이 필요합니다.
미국이 이 연료 공급을 막겠다고 한다면, KSSN 사업은 엔진 없는 자동차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는 것이죠.
한미 원자력 협정은 한국이 핵 관련 기술과 물질을 사용할 때 미국의 사전 동의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 조항을 무기화한다면 한국은 미국의 허락 없이 핵잠수함용 연료를 독자적으로 확보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동맹의 이름 아래 묶인 이 구조적 종속성이, 지금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KSSN, 추진력을 잃을 위기에 처하다
미국으로부터의 전농축 우라늄 수급이 불확실해진 상황은 KSSN 사업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잠수함 원자로에 들어가는 핵연료는 민간 원전에 쓰이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농축도와 안정성, 공급 지속성 모두 군사적 기준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에 공급처를 하루아침에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재 핵추진 잠수함을 보유하거나 개발 중인 나라는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정도입니다.
이 중 한국이 협력할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손에 꼽힙니다. 러시아와 중국은 지정학적으로 불가능하고, 영국은 미국과 같은 고농축 우라늄 체계를 쓰는 데다 AUKUS 프레임 안에 묶여 있습니다.
인도는 자국 기술도 아직 완성 단계가 아니죠.
그런데 바로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프랑스가 등장합니다. 타이밍이 절묘하다 못해 드라마틱하기까지 합니다.
마크롱의 제안, 왜 파격인가
프랑스 쉬프랑급 핵잠수함은 미국과 영국의 핵잠수함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20% 미만의 저농축 우라늄, 즉 전농축 우라늄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미국의 핵잠수함은 90% 이상의 고농축 우라늄을 씁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기술적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국제 핵비확산 체제(NPT)와 IAEA 사찰 기준에서 저농축 우라늄은 훨씬 관리가 용이하고, 제3국에 기술을 이전할 때도 외교적 장벽이 낮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제안한 내용은 구체적이었습니다.
핵연료의 생산부터 재처리까지 전주기에 걸쳐 투명하고 안정적인 협력을 제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에너지와 안보 분야에서 한국의 독자적인 길을 지지한다며, 특정 국가의 독점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안보 파트너십을 제안했습니다.
이 말에서 '특정 국가'가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죠.
외교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것은 프랑스의 전략적 동기입니다.
1970년대 프랑스는 한국의 핵개발을 지원하려 했던 전례가 있습니다.
당시 미국의 압력으로 무산되었지만, 프랑스의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 추구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정교해졌습니다. 국제 핵비확산 체제를 준수하면서도 미국의 간섭을 우회할 수 있는 기술적·외교적 경로를 프랑스는 이미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AUKUS는 되고, 한국은 안 되는 이유
이 대목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분노와 당혹감이 뒤섞인 것입니다.
미국은 AUKUS를 통해 호주에는 핵추진 잠수함 기술을 통째로 이전해 주면서, 70년 동맹국인 한국에는 핵연료조차 공급하지 않겠다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호주에는 되고 한국에는 안 된다는 이 이중 잣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표면적인 이유는 한국의 핵비확산 의무와 한반도 비핵화 원칙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미국의 동북아 전략 계산입니다. 한국이 독자적인 핵추진 능력을 갖추게 되면, 미국의 확장억제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집니다.
동맹은 유지되지만 미국의 레버리지는 줄어드는 것이죠. 게다가 한국의 핵잠수함은 일본과 중국에도 전략적 메시지를 던지는데, 이것이 미국이 설계한 동북아 세력균형 구도를 흔들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접근은 이 지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프랑스는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 강화를 위협이 아닌 기회로 봅니다.
한국이 강해질수록 유럽, 특히 프랑스와의 전략적 연대가 강화되고, 이는 미국 일극 체제에 대한 대안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프랑스의 오랜 꿈과도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한국이 챙긴 것, 프랑스가 얻은 것
이번 한불 정상회담의 성과를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재명 대통령은 영리한 거래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은 호르무즈 해협 내 프랑스 선박과의 공동 대응을 약속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가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중동에서의 해양 안보 협력에서 한국의 존재감 있는 참여를 얻어낸 것이죠. 그 대가로 한국은 핵잠수함 건조의 핵심인 핵연료 자립의 실마리를 잡았습니다.

정부는 이달 중으로 프랑스 국영 원자력 기업 오라노(Orano)와의 실무 협의에 착수할 예정입니다.
오라노는 우라늄 채굴부터 농축, 재처리에 이르기까지 핵연료 전주기를 다루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입니다.
이 협의가 실질적인 계약으로 이어진다면, KSSN의 심장은 프랑스 기술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은 많습니다. 미국이 한미 원자력 협정을 근거로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국내 정치적 논란도 예상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이 이제 미국이라는 단 하나의 선택지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트럼프가 핵연료를 끊겠다고 위협하던 바로 그 순간, 마크롱이 새로운 문을 열어준 것입니다. 한국 외교가 얼마나 이 문을 넓게 열 수 있을지,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