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이 없다”는 말은 보통 국제대회에서 가장 먼저 지워지는 꼬리표다. 대진표에 이름이 올라가도, 중계 자막에 ‘WR—’처럼 공란이 찍히면 상대는 마음이 한결 편해지고 관중은 기대치를 낮춘다. 그런데 2026 인도네시아 마스터스(슈퍼 500)에서 삼성생명 김유정–이유림 조가 보여준 장면들은 그 고정관념을 꽤 세게 흔들었다. 결과만 떼어놓으면 8강에서 세계 2위 펄리 탄–티나 무랄리타란(말레이시아)에게 0-2로 졌다. 점수는 15-21, 9-21. 여기까지만 읽으면 “역시 랭킹의 벽”이라고 결론 내리기 쉽다. 하지만 이 대회의 맥락을 조금만 더 따라가면, 이 0-2는 패배라기보다 ‘시작점’에 더 가까워 보인다.

무엇보다 이 조합은 이번 대회가 사실상 “첫 공식 시험지”였다. 두 선수가 국제대회에서 정식으로 호흡을 맞춘 게 이번이 처음이라 BWF 랭킹 자체가 없었다. 랭킹이 없다는 건 실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포인트를 쌓을 시간이 없었다는 뜻에 가깝다. 다만 투어 세계는 냉정해서, 그 ‘시간이 없었다’는 사정까지 봐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 놀라운 건, 이 조가 32강과 16강에서 보여준 경기력이었다.
32강에서 대만 조(세계 67위)를 2-0(21-15, 21-13)으로 잡아냈고, 16강에서는 일본 조(세계 23위)도 2-0(21-13, 21-8)으로 꺾었다. “한 번 이기면 운, 두 번 이기면 흐름”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번 대회에서 김유정–이유림은 딱 그 흐름을 탔다. 특히 16강 스코어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완승’에 가깝다. 첫 조합인데도 게임 운영이 정리돼 있었고, 상대의 장점을 오래 끌고 가지 않게 만들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8강에서 무엇이 달랐나. 상대가 달랐다. 펄리 탄–티나 무랄리타란은 세계 2위라는 숫자만으로 설명이 끝나지 않는, ‘복식의 문법을 몸에 새긴’ 조다. 이런 정상급 페어는 실수로 무너지는 팀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가 흔들릴 때 더 정확하게, 더 빨리 그 틈을 찌른다. 그래서 1게임 12-12까지 따라붙은 장면이 의미가 크다. 스코어가 팽팽했다는 사실보다도, 처음 맞붙는 강팀을 상대로도 초반 설계를 버티며 끌고 갔다는 게 더 중요하다. 이때는 충분히 “이변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공기가 있었다.

하지만 복식은 대개 ‘후반’이 진짜다. 첫 게임 중반 이후부터 드러난 건 팀워크의 미세한 차이였다. 오래 맞춘 조합은 스텝과 시선만으로도 다음 샷을 예측한다. 반대로 막 조합한 페어는 “지금 누가 앞을 잡고, 누가 뒤를 커버할지”가 한 박자씩 늦는다. 그 한 박자가 세계 2위 앞에서는 실점으로 바뀐다. 기사에서도 “시간이 갈수록 팀워크 미흡이 드러났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건 비난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진단이다. 오히려 이 대목이 희망적이다. 왜냐하면 약점이 ‘기술’이 아니라 ‘호흡’이라면, 훈련과 출전량으로 개선할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둘은 같은 팀, 삼성생명 소속이다. 대표팀에서 파트너가 자주 바뀌는 한국 배드민턴 구조를 고려하면, “같은 소속에서 꾸준히 맞출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이점이다. 복식은 결국 반복 훈련이 쌓아 올리는 종목이다. 수비 위치, 로테이션, 리턴의 방향, 상대 서브 패턴에 대한 약속. 이런 것들이 쌓이면 ‘랭킹 없는 조’는 금방 ‘까다로운 조’가 된다. 이번 대회 8강 진출은 그 가능성을 현실로 보여준 첫 장면이었다.
선수 개인의 서사도 꽤 탄탄하다. 이유림은 주니어 시절부터 국제무대에서 성과가 있는 선수로 알려져 있고, 대표팀 경험도 있는 편이다. 김유정 역시 최근 들어 성장 흐름이 눈에 띈다는 평가가 많다. 쉽게 말해, 한쪽은 국제 경험치가 있고, 한쪽은 상승세가 있다. 이런 조합은 초반에는 삐걱거려도, 한 번 톱시드를 상대로 ‘12-12 접전’ 같은 장면을 찍고 나면 자신감이 확 달라진다. 그리고 자신감은 복식에서 의외로 큰 자산이다. 상대가 강할수록 몸이 굳는 선수도 있지만, “해볼 만하다”는 감각이 생기면 라켓이 먼저 나간다.

물론 냉정하게 말하면, 세계 2위와의 격차는 분명했다. 2게임 9-21은 그 현실을 정확히 보여준다. 하지만 이 점수의 의미를 “한계”로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지금 단계에서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알려주는 데이터다. 첫 조합이 톱시드를 만나면 대개 초반에 무너져 경기 자체가 일방적으로 끝난다. 그런데 김유정–이유림은 첫 게임 중반까지 팽팽하게 버텼고, 대회 전체로는 8강까지 올라왔다. 이건 ‘성과’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다.
다음 단계는 단순하다. 조합을 고정하고, 출전량을 늘려 랭킹을 만들 것. 랭킹은 실력을 증명하는 도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진 운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바꾸는 방패다. 이번처럼 톱시드와 너무 빨리 만나는 일을 줄이려면 포인트가 필요하다. 그리고 포인트는 멋진 한 방이 아니라, 꾸준한 16강·8강 진출이 쌓여야 생긴다. 이번 인도네시아 마스터스는 그 “꾸준함의 출발”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결론적으로, 김유정–이유림 조의 이번 대회는 ‘졌지만 남긴 게 더 많은’ 경기였다. 랭킹 공란에서 출발해 8강까지 올라가고, 세계 2위 앞에서 한동안이나마 팽팽하게 싸웠다. 팬 입장에서는 단순히 “잘했다”로 끝낼 일이 아니다. 이 조합이 계속 굴러가기만 하면, 한국 여자복식 판도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이름이 굵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조합은 늘, 이렇게 조용한 8강에서 시작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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