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했다고 죄가 덜어지나 [똑똑! 한국사회]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출판인
술을 즐긴다. 한때 꽤 잘 마시기도 했다.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당시에는 술 마시는 것도 능력이었다. 어떤 만남에도 술이 빠지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되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리 취해도 다음날 업무에 차질을 빚어서는 안 되었다. 무척 힘든 일이다. 그래서 술은 어른 앞에서 배우라고도 했다. 즐기는 동시에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음주가 종종 업무의 연장인데다, 워낙 못살고 단조로운 사회라 전반적으로 술에 관대했다. 작은 실수는 낭만으로 생각해 눈감아주었고,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거론하지 않는 것이 에티켓이었다. 서양에 살면서 술에 대한 태도가 사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캐나다의 경우 일반 소매점에서 술을 살 수 없다. 술집은 동네에 하나 정도 있고, 거리나 공원 등 개방된 장소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불법이다. 쳇, 뭐 이리 삭막해? 술을 음식으로 보고, 마실 때는 절제하며, 설령 취해도 몸가짐을 바로 하는 것을 성숙의 척도로 생각하는 우리가 술이라는 축복을 더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 아닌가, 입을 삐죽이곤 했다.
세상은 변했다. 술 권하는 문화가 없어졌다. 개인의 취향과 시간이 집단보다 중요해지면서 즐기는 방식도 바뀌었다. 술을 마셨다고 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삶의 영역을 침범한다면 용서받기 어렵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폭음하는 것이 우월성을 드러내는 징표라고 생각하는 유치한 인식과 관대하기 이를 데 없는 법의 잣대가 그것이다.
30대 남성이 길거리에서 일면식도 없는 10대 여성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범행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소주 4병 정도 마셨는데 당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숨이 턱 막힌다. 술을 마시고 남을 죽인 것이 저리 당당한 일인가? 혹시 주취 감형을 노리고 미리 포석을 까는 것일까? 형법에는 ‘심신장애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나마 (반드시) ‘감경한다’에서 개정한 것이라 한다.
술은 기호품일 수 있지만, 주성분인 알코올은 엄연히 뇌에 영향을 미치는 ‘향정신성’ 물질이다. 알코올을 섭취하면 판단력과 사회적 억제력이 저하되어 실수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런 줄 모르고 술을 마시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주취자의 처벌을 덜어주는 제도가 법으로까지 정해져 있는가? 우리 말고 주취 감형을 적용하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고 한다. 결국 이것도 일제의 잔재인가 생각하면 마음이 더 어두워진다.
비합리적으로 술에 관대한 태도는 필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부담을 준다. 술을 마시고 부적절한 행위를 하다가 저지하는 경찰에게 도리어 행패를 부렸다는 뉴스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응급실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교통수단의 운전자를 방해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기로는 음주운전을 빼놓을 수 없다. 음주운전에는 단호하면서 음주범죄에 관대한 이유를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처벌을 강화한다고 반드시 범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또한 취한 상태에서는 충동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데, 그 순간 나중에 중한 벌을 받을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칠 리 없다. 하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는 인식이 생길 정도로 느슨하게 법을 적용하는 것은 더 문제다. 무엇보다 피해자를 생각해야 한다. 술에 취해 실수로, 우발적으로 저지른 행동에 큰 피해를 보았는데, 심지어 목숨을 잃었는데,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죄가 가벼워진다면 누가 더 억울한가? 오히려 더 큰 벌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닐까? 주취 범죄는 감형 조항을 없애 일관성 있고 엄정하게 처벌해야 한다. 취한 상태를 따질 것이 아니라 취하기 전에 ‘이제부터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야 한다. 술이란 유일하게 합법화된 마약이다. 그러니 그 정도 책임감은 있어야 한다. 그게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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