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5일, 트럼프 행정부가 자동차 메이커를 비롯한 미국 일반 제조업체들에게 "무기 생산에서 더 큰 역할을 맡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민간 제조업의 생산 라인을 무기 생산으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인 것이죠.
80여 년 전, 미국 자동차 공장들이 탱크와 전투기를 쏟아냈던 그 장면이 다시 재현될 조짐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탄약 몇 발을 더 만드는 수준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산업 기반을 군수 생산 체제로 돌려놓겠다는 뜻인데요.
도대체 왜 미국은 이런 극단적인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것일까요?
지금부터 그 배경을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1.5조 달러 국방예산이 쏘아올린 신호탄
이야기의 출발점은 트럼프 행정부가 제출한 2027 회계연도 국방예산입니다.
총액 1조 5천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재량예산 1조 1,500억 달러와 의무적 지출 3,500억 달러가 합쳐진 숫자이죠.
이 예산안이 의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 여부에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예산서를 들여다보면 놀라운 숫자들이 줄줄이 등장합니다.
SM-6 Block IIA 136발, PAC-3 MSE 3,203발, THAAD 미사일 857발, 토마호크 785발, PrSM 1,134발, JASSM-ER 821발. 문제는 이 발주량이 산업계가 1년간 공급할 수 있는 생산능력을 크게 웃돌고 있다는 점입니다.
쉽게 말해, 돈은 있는데 만들 공장이 부족한 상황인 것이죠.
아무리 달러를 쏟아부어도 물리적 생산 라인이 받쳐주지 않으면 무기는 나오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7년은 기다려야 한다" 생산능력의 벽
국방부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Lockheed Martin, RTX, BAE Systems, Honeywell Aerospace 같은 전통적인 방산 대기업들과 생산능력 강화 협약을 맺고 각종 탄약 생산량을 2배에서 4배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워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치명적인 함정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강화된 생산능력 목표를 달성하는 시점이 무려 7년 후라는 것이죠.
다시 말해 2027년에 거액의 자금을 쏟아부어 탄약을 발주하더라도, 첫 납품이 이뤄지는 것은 최소 2~3년 뒤의 일이고, 발주분 전량이 인도되기까지는 또 수년이 더 걸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탄약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거의 모든 장비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인데요. 현대전의 템포를 생각하면 이 속도는 너무나도 느린 것이 분명합니다.
중국이 급속도로 무기를 쏟아내는 상황에서, 미국이 이 속도로 따라갈 수 있겠느냐는 위기감이 워싱턴 내부에 퍼지고 있는 것이죠.
자동차 공장이 무기 공장으로, 2차대전의 재림
바로 이 지점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꺼낸 카드가 민간 제조업의 동원입니다.
WSJ 보도에 따르면 국방부는 자동차 메이커를 포함한 Aerospace, Oshkosh 등 민간기업의 최고경영자들과 무기 및 군사물자 생산에 관한 협의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민간기업의 직원과 공장설비를 동원해 탄약 등 장비품 생산을 확대하겠다는 것이 핵심인 것이죠.

이 모습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취했던 방식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당시 포드, GM, 크라이슬러 같은 자동차 회사들은 자동차 대신 전차와 항공기 엔진, 군용 차량을 대량으로 찍어냈고, 이것이 연합군 승리의 결정적인 기반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국방부 관계자는 "우리 병사들이 결정적인 우위를 확실히 유지할 수 있도록, 이용 가능한 모든 민간 부문의 솔루션과 기술을 활용해 방위산업 기반을 급속히 확대하는 데 힘쓰고 있다"며 "무기 생산 강화는 국가안보상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습니다.
각 기업에 방위사업으로의 신속한 전환을 타진했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는데요. 사실상 군수 생산이 전시 체제로 이행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상황인 것입니다.
"배당 받고 싶으면 공장부터 지어라" 트럼프의 초강수
흥미로운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사실 군수 생산의 전시 체제 전환 필요성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부터 제기돼 왔던 이야기이죠.
하지만 당시 방산 기업들은 "우크라이나 특수를 노린 과잉 설비투자는 경영상 리스크일 뿐"이라는 논리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주주들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방산 대기업들은 수주잔액만 쌓아놓고, 실제로 받은 돈은 자사주 매입과 주주 배당에 쏟아부은 것이죠.

이 고질적인 관행에 트럼프 대통령이 철퇴를 내렸습니다.
2026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은 "방위기업이 무기생산시설 근대화에 투자하지 않는 한, 자사주 매입이나 주주 배당 지급을 금지한다"는 초강수 카드를 꺼낸 것입니다. 쉽게 말해 "공장부터 짓고 난 다음에 주주들 주머니를 챙겨라"라는 명령인 셈이죠.
이 조치의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전통적인 방산 기업들이 자사 자금으로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에 돈을 풀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주들 눈치를 보느라 미뤄온 투자를 대통령의 한마디에 움직이게 만든 것이니, 그 파급력이 상당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9억 달러짜리 무기 공장, Anduril의 '아스날 1'
새로운 방산 강자로 떠오른 Anduril의 행보는 더욱 극적입니다.
Anduril은 하이퍼스케일 생산을 전제로 설계한 무기와 장비를 실제로 찍어내기 위해 오하이오주 리켄배커 국제공항 활주로에 인접한 2.02㎢ 규모의 광대한 부지에 자사 자금 9억 달러 이상, 한화 약 1,430억 엔을 투자해 거대한 무기 제조 시설을 건설 중입니다.
이름하여 '아스날 1(Arsenal-1)', 총 바닥 면적만 46만 5천㎡에 달하는 규모인 것이죠.
이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텍사스주 포트워스에 있는 F-35 최종 조립 라인(14만 8천㎡)의 3배가 넘는 넓이입니다.
게다가 Anduril은 소프트웨어 정의형 제조 플랫폼인 'Arsenal OS'를 개발해, 설계부터 개발, 생산에 이르는 전 과정을 디지털로 일관 제어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파머 럭키(Palmer Luckey) 최고경영자는 "1년에 수만 기의 자율형 무기를 양산할 수 있다"며 "무기 생산은 전통적인 대규모 생산에서 하이퍼스케일 생산으로 이행한다"고 선언했는데요.
실리콘밸리식 양산 철학이 방산 분야에 본격 상륙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를 일부 포기할 각오를 하라" 총력전 시대의 그림자
하지만 이 거대한 흐름은 단순히 방산업계의 호재로만 해석하기엔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군수 생산에 대한 투자는 곧 군사력 강화로 이어지고, 강화된 군사력은 공급보다 수요가 많은 자원을 놓고 벌어지는 국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 경쟁에서 이긴 나라가 더 번영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군수 생산의 전시 체제 이행은 "자국 안보를 위해 필수 불가결한 선택"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이 부담이 산업계나 정부 예산 선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잘지니(Sir Patrick Sanders) 전 영국 육군참모총장은 영국 왕립방위안보연구소(RUSI) 강연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겼습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오랜 격언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현대전은 총력전이기 때문에 "전쟁에 대비하라"는 말의 의미가 달라졌다는 것이죠.
그것은 사회 전체의 준비를 뜻하며, 사회가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많은 자유"를 일시적으로 포기하는 데 동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이번 움직임이 단순한 방산 투자를 넘어 사회 전체의 체질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 될지, 세계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