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과 마일드 비츠가 만든 신선한 음악의 순간 [콘텐츠의 순간들]
그동안 싱어송라이터 정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둘로 갈렸다. ‘미워요’를 비롯한 몇몇 발라드 곡과 〈무한도전〉 〈나는 가수다 2〉 등 TV 예능으로 그녀를 접해온 대중에게는 독특한 음색을 지닌 실력파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한편 블랙 뮤직 동호회 SNP(PC 통신 나우누리) 출신으로 크루시픽스 크릭, 리쌍 등 힙합 아티스트와 작업할 때부터 그녀를 봐온 마니아에게, 정인은 기대와 아쉬움을 동시에 안기는 가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인의 알앤비·솔(soul)에 대한 내공과 보컬적 재능이 아쉬움을 불러일으켰다. 평범한 발라드나 팝 성향 곡이 아닌 장르색이 강한 알앤비·솔 앨범에서의 그녀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마 정인 본인도 그러한 음악적 욕구가 있었나 보다. 그렇기에 늦게나마 〈정인 & 마일드 비츠〉 같은 앨범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EP는 대중과 마니아, 발라드와 알앤비의 경계에 서 있던 정인이 마침내 장르 아티스트로 완전히 치우쳐서 만든 작품이다. 한국 힙합 신에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겨온 베테랑 프로듀서 마일드 비츠와 힘을 모았다. 산뜻한 청춘물 같은 커버에 방심하면 곤란하다. 실제 내용은 작가주의 영화 같은 앨범이니까.
두 아티스트는 활동 영역이 달랐다. 대중음악 전체로 넓혀도 좁은 신에서 누구든지 마음먹으면 소통이야 할 수 있었겠지만, 음악적 접점을 찾기 어려웠다. 정인은 범대중적인 알앤비와 발라드가 어우러진 커리어를 영위했다. 마일드 비츠는 데뷔 이래 지금까지 1990년대 힙합에 기초한 음악을 추구해왔다. 정인이 리쌍의 곡에 노래를 얹던 2000년대 초반이었다면 모를까, 두 아티스트는 같은 블랙 뮤직 안에서도 양극단에 있는 셈이었다. 더구나 정인이 메이저로 진출하고 마일드 비츠는 언더그라운드에 투신하면서 둘 사이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그래서 이번 만남이 특별하다.
작업을 먼저 제안한 쪽은 정인이다. 마일드 비츠가 2021년에 발표한 앨범 〈프래그먼트(Fragment)〉를 듣고 나서라고 한다. 〈프래그먼트〉는 당황스럽고도 놀라운 작품이었다. 지금껏 들려준 전통적 힙합이 아닌 실험적인 재즈와 전위적 인스트루멘탈 힙합의 융합체였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그의 음악을 즐겨온 열혈 힙합 팬들은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으나 일부는 탁월한 완성도에 찬사를 보냈다. 평단도 마찬가지였다. 〈프래그먼트〉는 이듬해 열린 제19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랩&힙합 음반’ 부문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정인 역시 이 앨범의 색다른 감흥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프래그먼트〉 스타일의 프로덕션에 노래를 하고 싶어 했다.
공교롭게도 마일드 비츠는 정인의 열성 팬이다. 평소 보컬리스트와의 작업에 목말라 했던 그가 가장 함께해보고 싶던 정인의 제안을 마다할 리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2022년을 기점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서로 바란 건 하나였다. “재미있게 해보자.” 마일드 비츠가 비트를 보내면 정인이 가사를 쓰고 노래를 얹어 회신했다. 언제 완료하겠다는 기약은 없었다. 싱글인지 앨범인지 정한 바도 없었다. 각자 생활과 커리어에 충실하면서 영감이 올 때마다 프로젝트에 집중했다. 그래서 진행은 더뎠지만, 원하던 음악을 자유분방하게 담아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첫 곡 ‘뭐?’가 이를 방증한다. 정인이 제일 처음 받은 비트를 듣자마자 느낌 가는 대로 얹은 스캣을 그대로 살려서 완성했다.
〈정인 & 마일드 비츠〉에선 전반적으로 〈프래그먼트〉의 영향이 느껴진다.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이 성사되는 데에 결정적 작용을 했으며, 지향점이 된 작품이니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렇다고 해서 ‘속편’이나 ‘답습’ 같은 단어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마일드 비츠는 약속한 대로 〈프래그먼트〉의 분위기와 구성에 기반을 두되 너무 실험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보컬과의 조합 또한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곡마다 정인의 노래가 스며들 여지를 충분히 만들어놓았다. 타이틀곡 ‘탓’은 그러한 고심 속에 나온 최적의 결과물이다. 붐뱁 힙합 특유의 둔탁한 드럼을 따뜻한 질감으로 감싼 다음 서정적인 분위기의 네 마디를 차분하게 전개한 프로덕션, 그 위로 늦가을의 갈대들이 사각거리듯 나아가다가 마침내 약간의 감정을 토해내는 보컬, ‘탓’은 앨범에서 가장 보편적인 힙합 솔의 정서를 지닌 곡이기도 하다.
늦가을 갈대들이 사각거리듯
가사가 선사하는 감흥도 남다르다. 어떠한 현실적 문제에 직면했을 때 다른 누군가를 탓하면 삶이 한결 쉬워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제일 관대하며, 살기 위해 탓할 대상을 물색하는 이유일 것이다. 정인은 ‘탓’에서 바로 이 지점을 짚는다. 자기반성을 기저에 깔아놓은 채 비판과 공감의 경계를 허물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특히 “내가 뭘 또 그렇게 어쨌다고, 따지고 보면 다 그래, 나도 인간이잖아, 오늘도 난 내게 제일 관대해” “모든 키를 그것에게 다 넘겼지, 때론 탓할 대상이 있어 좋았지, 도망갈 구멍 나름 방어” 등의 구절에서 정인의 예리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탓’뿐만 아니라 모든 곡에서 정인의 작사 능력이 돋보인다. 클리셰에 갇혀 지루한 사랑, 이별 이야기라든가 뭔가 있어 보이려 했지만 수박 겉핥기에 그친 가사는 찾아볼 수 없다. 래퍼처럼 라임을 설계하고, 어설픈 한영 혼용 따위 없이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녹였다. 얼터너티브 힙합과 실험적인 재즈 프로덕션이 사이좋게 주도권을 나눠 가지며 전개되는 ‘적’, 미국에서 1990년대 중반과 200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네오 솔 부흥기 때의 감동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러브 워리어(Love warrior)’, 하드코어한 랩이 얹혔어도 어색하지 않았을 라이브 힙합 사운드의 ‘페이트 파이터(Fate fighter)’ 등의 곡도 대표적이다. 정인이 평소 견지해온 삶의 철학과 스탠스가 반짝이는 위트를 타고 펼쳐진다.
그래서일까? ‘탓’에서 정인은 마치 에리카 바두 같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다. 에리카 바두는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알앤비·솔 아티스트다. 마력 있는 음색의 보컬을 구사하고, 힙합·솔·재즈·펑크 등의 장르를 넘나들며 삶과 사회 전반을 관통하는 여러 주제를 노래했다. 정인은 데뷔 때부터 음색을 비롯해 보컬 면에서 에리카 바두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대중적인 발라드 프로덕션이 그 향을 다소 억제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 EP에서는 마일드 비츠의 음악을 빌려 완전히 봉인을 해제했다. 이처럼 비선형적으로 전개되는 블랙 뮤직 프로덕션을 체화해 설득력 있게 자신의 음악 세계로 펼쳐낼 수 있는 싱어송라이터는 흔치 않다.
그동안 한국에서도 힙합 프로듀서와 보컬리스트의 공동 작업은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EP 이상의 작업물까지 귀결된 사례는 거의 없다.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게다가 전혀 다른 필드에서 20년 가까이 각자의 커리어를 쌓아오던 이들의 합작으로 범위를 좁히면, 더더욱 찾기 어려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정인 & 마일드 비츠〉는 너무나도 반갑고 의미 깊은 작품이다. 장르 마니아가 아니라면 단번에 와닿는 음악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을 내어 조금만 더 귀를 열어본다면, 장담하건대 정말 솔풀(soulful)하고 신선한 음악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일권 (음악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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