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야기] 물은 100도에서 끓는가- 명세현(영산대학교 수소시스템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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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물은 100도에서 끓지 않아." 별 생각 없이 흘려들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말은 이상하게 내 신경을 긁었다.
우리는 "섭씨, 1기압, 순수한 물에서"라는 전제를 생략한 채 그 문장을 외워 왔다.
물은 100도에서 끓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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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물은 100도에서 끓지 않아.” 별 생각 없이 흘려들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말은 이상하게 내 신경을 긁었다. 초등학교 과학 시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사실을 굳이 부정하는 태도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얘기는 궤변도 허세도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 쉽게 외워버린 과학 상식의 허점을 지적해준 고마운 말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100도’는 섭씨온도다. 섭씨(℃)는 스웨덴의 셀시우스가 물의 성질을 기준으로 만든 온도 체계다. 1기압에서 순수한 물이 얼 때를 0도, 끓을 때를 100도로 정했다. 다시 말해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는 문장은 처음부터 조건문이다. 그 조건을 생략한 채 숫자만 외워왔을 뿐이다. 다른 온도 단위를 떠올리면 이 사실은 더 분명해진다. 화씨온도에서 물의 끓는점은 212도다. 화씨를 쓰는 미국인에게 “물은 212도에서 끓는다”고 말해도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다. 단위가 다르면 숫자도 달라진다는 것은 상식이다.
진짜 핵심은 온도 단위가 아니라 기압이다. 물이 끓는다는 것은 액체 내부에서 만들어진 수증기 기포가 외부 압력을 이기고 빠져나오는 현상이다. 외부 압력, 즉 기압이 낮아지면 이 과정은 훨씬 쉬워진다. 그래서 산에 오를수록 물은 더 낮은 온도에서 끓는다. 해발 3000m 부근에서는 90도 남짓, 8000m가 넘는 히말라야 고산지대에서는 70도 전후 수준에서 끓는다. 고산지대에서 밥이 설익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논리를 뒤집으면 압력을 높일수록 끓는점은 올라간다. 압력솥이 대표적이다. 밀폐된 솥 안에서 압력이 높아지면 물은 100도를 넘어선 온도에서도 액체로 남아 있고, 그 덕분에 음식은 더 잘 익는다.
이쯤에서 비행기에서 경험하는 맛없는 라면 이야기를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기내식의 부실함을 탓하지만, 과학적으로 보자면 사정은 좀 다르다. 여객기 기내 압력은 대략 해발 2000m 수준인 0.8기압 내외로 유지되며, 이 환경에서는 물의 끓는점이 낮아지고, 라면 국물의 온도는 90도 초중반 수준에서 한계에 이른다. 여기에 건조한 공기 탓에 후각과 미각이 둔해지는 효과까지 겹치기 때문에, 같은 라면이라도 지상에서 먹을 때보다 맛이 없다고 느끼기 쉽다.
결국 친구의 말은 틀렸다고 할 수 없다. 물은 ‘항상’ 100도에서 끓지 않는다. 우리는 “섭씨, 1기압, 순수한 물에서”라는 전제를 생략한 채 그 문장을 외워 왔다. 과학은 숫자를 암기하는 학문이 아니라 숫자가 성립하는 조건을 묻는 태도다. 다음에 누군가 다시 묻거든 이렇게 답하면 된다. 물은 100도에서 끓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를 둘러싼 세계다.
명세현(영산대학교 수소시스템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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