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心 업어 당권 쥔 김기현의 고약한 딜레마

고재석 기자 2023. 3. 17.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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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머니볼⑧] ‘합리적 중도’→‘보수 적통’으로 얻고 잃은 것

3월 9일 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가 취임했습니다. 김 대표가 취임한 이튿날, 한국갤럽 데일리 오피니언 조사가 공개됐습니다. 3월 8일과 9일 사이에 실시된 조사인데요. 조사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이 직무 수행을 잘하고 있다고 답한 비율은 34%였습니다. 그런데 서울은 전체 평균보다 낮은 29%에 그쳤습니다. 전국에서 광주‧전라(11%)를 빼면 가장 낮은 수치였죠.

당 지지율을 볼까요. 국민의힘은 전국에서 38%의 지지를 얻어 32%에 그친 더불어민주당을 6%포인트 차로 앞섰습니다. 정작 서울에서 국민의힘의 지지율은 32%에 그쳐 40%를 기록한 민주당에 뒤졌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내놓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제3자 변제 방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는 '국익 위해 찬성'한다는 응답이 서울에서는 29%에 불과해 역시 광주‧전라를 제외하고는 가장 낮았습니다. '제3자 변제 방안'에 대한 반감이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과 정당 지지율에 영향을 미친 셈이죠.

(*이 조사의 응답률은 9.5%입니다. 응답률이 낮은 다른 기관의 여론조사에서는 국민의힘의 서울 지지율이 40%를 넘는다는 결과가 나올 때도 있긴 하지만, 신뢰성을 담보할 수 없어 여기서는 제외하겠습니다.)

어떤 중재자에 대한 호감도

판사 출신인 김기현 대표는 한때 보수정당 내에서 '온건하고 합리적인 중도인사'로 분류됐습니다. 성격과 인품도 높은 평가를 받아왔는데요. 이것이 2021년 원내대표 선거에서 큰 격차로 이기는 원동력이 됐죠. 이해당사자 간 중재에도 능합니다. 대선 과정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이준석 대표 사이의 갈등을 수차례 봉합한 전례도 있고요.

그런 김 대표는 이번 전당대회에서 주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보수 색채가 강해졌습니다. 당초에는 황교안 전 대표가 본선에 오르면서 '강성 보수' 색채를 황 전 대표가 다 가져가리라 예상됐습니다. 한데 황 전 대표가 선거 과정에서 나름대로 균형 잡힌 포지션을 취했죠. 그렇다보니 김 대표가 '강성 보수'처럼 보이는 모양새가 연출됐습니다. 김 대표 스스로는 '보수 적통'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썼고요.

국민의힘 전당대회 열기가 절정에 달하던 2월 28일과 3월 2일에 실시된 한국갤럽 데일리 오피니언 조사를 보죠. 마침 2월 28일에는 보수의 핵심 지역기반이라 할 대구‧경북에서 국민의힘 전당대회 합동연설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한국갤럽은 국민의힘 대표 후보 4명(김기현‧안철수‧천하람‧황교안)에 대한 호감도를 조사했습니다. 다른 조사기관에서는 주로 국민의힘 지지층을 대상으로 한 당대표 지지율 조사를 실시하던 때인데요. 이에 대해 한국갤럽 측이 밝힌 이유는 이렇습니다.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과거와 달리 여론조사 반영 없이 100% 당원 투표로만 지도부를 선출한다. 다만 이번에 선출되는 당대표는 내년 국회의원선거를 이끌어야 하므로, 국민의힘 강성 지지자뿐 아니라 연성 지지자와 중도적 성향 유권자의 마음도 얻을 필요가 있다. 그러한 확장 가능성을 유추하고자, 대표 경선 후보 4인 개별 호감 여부를 물었다."

이 조사의 대상은 전체 유권자입니다. 국민의힘 전당대회 룰(rule)이 당심 100%로 바뀐 이후 여론조사 업체들은 주로 지지층 대상 조사를 쏟아냈는데요. 총선은 지지층만 대상으로 치르는 선거가 아닙니다. 중간지대에 있는 사람들의 인식이 중요한데, 대표에 대한 호감도 여부는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겁니다.

조사에 따르면 김기현 대표의 호감도는 18%였고 비호감도는 62%였습니다. 2위로 낙마한 안철수 의원의 경우 호감도 26%, 비호감도 66%로 나왔고요. 호감도는 인지도를 따라가는 경향이 있으니 김 대표가 안 의원에 비해 불리할 수는 있겠죠. 그런 점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특징적인 숫자가 여럿 엿보입니다.

세대별로 보면, 18~29세와 30대에서 김 대표의 호감도는 공히 8%에 그쳤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강력 지지층이라 꼽히는 40대에서 얻은 호감도(10%)보다 낮았습니다. 60대(31%)와 70대 이상(32%)에서 얻은 높은 호감도 덕분에 전체 평균을 끌어올렸죠.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호감도가 증가하는, 전통적인 보수 정치인의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에서의 호감도가 15%에 그쳐 전체 평균을 밑돌았습니다.

보수와 진보가 아닌 중도층에서는 호감도가 12%로 나왔는데요. 이는 천하람 전남 순천갑 당협위원장(36%)과 안 의원(26%)은 물론 황교안 전 대표(14%)보다도 낮은 수치였습니다. 무당파는 중도와는 또 다른 개념인데요. 무당파에서는 호감도가 4%에 불과했습니다. 무당파에서는 모름‧응답거절 비율이 높아 비호감도는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어찌됐건 민망한 지표죠. 안철수 의원이 무당파에서 26%의 호감도를 기록해 국민의힘(33%) 지지층에서 얻은 호감도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던 점과는 대비됩니다.

‘인지적 동원'이란 무엇인가

당대표로 일하면서 인지도가 더 올라가면 호감도 역시 오르리라는 낙관론도 있습니다만, 그러기에는 총선이 1년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김 대표가 '김기현다움'을 보여줄지 여부부터 미지수입니다. 김 대표의 당선이 김기현에 대한 기대보다는 윤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의 성격이 짙었다는 점을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김 대표가 윤 대통령의 그늘에서 일정부분 벗어나지 않는다면 외연확장은 어려울 것이라는 뜻도 됩니다.

선거는 상대의 영토를 가져오는 게임이 아닙니다. 나의 영토와 상대의 영토 사이 어딘가에 살고 있는 층을 유혹하는 게임이죠. 그간 학계에서 나온 연구를 종합하면, 무당파는 정치무관심층이 아닙니다. 다만 특정 정당에 일체감을 갖고 있지는 않죠. 선거마다 이슈에 따라 자기 이익에 맞게 유연하게 투표합니다. 즉 무당파는 기계적 중도를 취하는 '탈정치층'이 아니라 또렷한 지향을 갖춘 집단인 겁니다.

미국 정치학계에서는 무당파를 설명하는 연구가 활발히 이뤄진 편입니다. 러셀 달톤(Russell J. Dalton)은 '인지적 동원'(cognitive mobilization)이라는 개념을 활용하는데요. 달톤이 보기에 인지적 동원은 교육 수준이 향상되면서 외부의 도움 없이 유권자 스스로 정치적 결정이 가능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는 무당파를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비정치층(apolitical)과 인지적 동원이 이루어진 비당파층(apartisan)으로 나눴는데요. 비당파층은 무조건적으로 정당을 추종하는 유권자가 아닙니다. 정치적 지식이 높고 의제와 이슈에 따라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능력을 갖춘 그룹이죠. 한쪽 깃발을 따라가기보다는 끊임없이 숙고하면서 움직이는 이들입니다. 제 방식대로 표현하면 '똑똑한 무당파'입니다.

달톤의 개념을 2012년 대선에 적용한 정진민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길정아 고려대 정부학연구소 교수의 2014년 논문(‘18대 대선에서 나타난 한국 무당파 유권자의 특성과 행태: 인지적 동원을 중심으로', '국가전략' 제20권 3호)은 흥미롭습니다. 이에 따르면 비당파층 유권자, 그러니까 제가 똑똑한 무당파라 칭한 집단의 비중은 1980년대 이후 출생 세대에서 32.59%로 가장 높았습니다. 2012년 당시 1980년대 이후 출생 세대 중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는 1980년생~1992년생이었죠. 현재 김 대표에 호감도가 낮은 세대의 상당수를 차지합니다. 이들은 교육 수준이 높고 진보성향이 강했으며 환경‧인권‧문화 이슈를 다른 세대보다 중시했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도 활발히 사용했습니다. 이를 비롯해 무당파를 실증적으로 다룬 다수의 연구는 무당파의 특징으로 젊고 분배나 복지정책에 전향적이라는 공통점을 추출합니다.

전략의 재설정

어떻습니까. '합리적인 중도'에서 '보수 전사'로 포지션이 바뀐 김기현 대표가 끌어올 수 있는 유권자일까요.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정치 양극화가 심화한 상황에서, 내년 총선의 성패 역시 무당파에 의해 결정될 겁니다. 김기현 체제가 울타리 바깥으로 향하는 전략을 설정해야 할 이유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상에서 확인해 주십시오. '구독'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여론조사 관련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됩니다.)

신동아 4월호 표지.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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