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대신 철학자 문성훈을 권한다

김창훈 칼럼니스트 2024. 10. 5.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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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견문록] <니힐리스트로 사는 법>

평생 우울증으로 시달렸다. 지독한 염세주의자였다. 의미도 전망도 없이 인생을 살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회주의에서 의미를 찾아보려고도 했다. 현실 사회주의가 홀딱 망해버렸다. 기독교에도 슬쩍 발을 내밀었다. 신학자 도미닉 크로산이 주도하는 '예수세미나'그룹을 통해 역사적 예수를 접하고 나서 예수란 오강남의 말대로 '보살 예수'임을 알았다. 보살 예수는 필자에게 의미의 최종근거가 되기 어려웠다. 보살 역시 분투하지만 부유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필자가 마지막까지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은 불교였다. 중학생 시절 스스로 만든 수행법을 통해 프로이트가 말하는 자아 초월의 감각인 '대양의 느낌' (프로이트 <문명속 불안>에서 말하는 '망망대해같은 느낌')을 경험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붓다의 수식관을 혼자 수행해 성성적적 (惺惺寂寂)을 체험했다. 필자에게 일말의 위악성이 있었다면 도사 행세를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체험은 결국 체험으로 끝난다. 게다가 영적 체험은 필자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영적 경험이 없었을 때 사람은 편견 속에서, 응결된 사고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세상은 개념을 통해 단순화된다. 인간은 개념을 경유해 세계를 해석한다. 그리고 불안한 세상에서 해석이 주는 편안함에 도취된다. 필자의 체험이 말해주는 진실은 어떤 대상도 개념화되어 서술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중에야 이것이 이분법적 분류 속에서 안온함을 느끼는 인간의 오랜 속성을 돌파하는 체험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로서는 이 체험 자체를 객관화할 수가 없었다.

타자의 모든 행위에 민감하면서도 그 사람과 그 사람의 행위에 대해 판단하지 않을 것을 매순간 의식적으로 지속시켜 나가는 것. 세상에 대해 전면적 판단중지로 맞선다는 것. 이것은 지독하리만큼 필자의 정신을 고갈시켰다. 윤리적 기준이 소거된 채 세상을 대한다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는 불교적 가르침을 체험을 통해 뼛속까지 느끼며 세상을 살아가기란 힘든 일이다. 구도의 길에서 일단의 경지를 맛본 스님들이 의외로 막행막식(幕行幕食)에 빠져드는 이유는 이런데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기존의 지식과 경험에 기초해 판단하는 습관인 '휴리스틱(Heuristics)'에 익숙하다. 그렇지 않고는 뇌가 과부하에 걸려 쇠잔해지기 마련이다. 필자가 그랬다. 영적 체험을 통해 오히려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고립감과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필자에게는 의지처가 필요했고 필자는 불교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불교철학자 박성배의 <깨침과 깨달음>(예문서원 펴냄)을 읽으며 불교도 이원적론적 세계해석을 거부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체계였음을 깨쳤다. 마지막 희망도 사라졌고 필자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최종근거를 찾지 못한 채 부유하며 살아왔다. 필자의 이런 삶도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책을 만났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자유주의를 설파하는 대표적 철학자인 서울여대 문성훈교수의 책 <니힐리스트로 사는 법>(문성훈 지음, 이소노미아 펴냄)이다. 사회정치철학자의 구도의 여정에 관한 글이다.

사춘기 시절부터 불안과 지독한 허무주의에 빠졌던 저자 문성훈은 니체에게서 구원의 빛을 발견한다. 인간은 의미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의미감은 단일한 실체로부터 연원하지 않는다. 의미는 작은 의미들을 따라 직조된 씨줄과 날줄의 거대한 망이다. 가족이 주는 찐한 의미, 조국이 내게 주는 의미, 지인의 행동 하나가 주는 의미 이런 것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을 듯해도 결국 의미의 사슬을 통해 이어진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이 의미의 씨줄날줄에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했다. 산업화가 본격화된 19세기 중반 이후 구멍만이 아니라 의미의 최종근거였던 신도 사망선고를 받는다. 삶을 뒷받침해주던 최종근거로서의 신의 사망은 비상상황이었다. 니체가 신의 사망을 선포한 배경에는 의미사슬의 붕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니체는 신의 죽음이 초래한 니힐리즘 상황을 지구가 태양 중심의 궤도를 일탈한 것에 비유했다.

미증유의 사태를 맞아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에게 니체는 '니힐리스트의 삶'을 제안한다. 니힐리즘(Nihilism)은 흔히 '허무주의'로 번역되지만 많이 다르다. 니힐리스트는 허무한 세상을 긍정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삶을 향유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저자는 니힐리스트를 이렇게 설명한다. "니힐리스트는 세상만사의 가치를 스스로 정하고,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니힐리스트는 자신이 부여한 가치가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상기책 인용 인용미기재시 동일) 우리가 알던 허무주의자로서의 니힐리스트가 아니다. 니체가 생각하는 니힐리스트는 '자유정신'에 충만한 영혼이다. 그냥 자유정신이 아니다. 지극히 충만한 자유정신이다.

니체는 가치가 사라진 세상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운명에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긍정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삶의 이유와 목적을 스스로 창조하는 자기 창조적 삶을 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은, 이 세계와 삶의 무의미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니힐리스트의 삶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기존의 가치가 붕괴되었기에 니힐리스트는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가치를 창조하는 주체적 삶의 실현에는 힘이 필요하다. 통상 알고 있던 권력에의 의지가 아니라 '힘'이다. '힘'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그 '힘'이 아니다. "니체가 말하는 '힘'은 단순히 신체적 힘이나, 정치적 권력, 혹은 경제력이 아니다. 그에게 힘이란 일종의 '자기지배'의 능력이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힘'인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면 나는 누군가의 노예가 된다. 현대인 대부분의 진짜 주인은 월가의 유대금융가일지도 모른다. 학벌에 연연하는 자는 학벌을 통해 사회를 분할지배하는 기득권의 지배전략에 놀아나는 노예에 불과하다. 자유민주주의가 진보의 종착지라 생각하는 지식인은 서구중심주의적 지식권력의 정신적 노예에 다름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걸림돌이 하나 있다. 세상에 대해 의미감을 가질 수 없는데 어떻게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저자는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를 소개한다. 어려서부터 가난했고 폐렴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카뮈는 늘 자살을 생각했다. 카뮈는 자살을 선택하는 대신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를 불러낸다. 잘 살기 위해서는 삶에서 가치, 즉 의미감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가치를 찾고자 노력할수록 더욱 허무해진다. 생각없이 살면 허무감의 무게도 덜어진다. 선사들이 소박한 삶을 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잘 살고, 치열하게 살아보려고 하면 오히려 허무감의 덫에 빠지고만다. 잘 살기 위해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려다 정작 삶 자체를 놓치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이런 역설을 카뮈는 '인생의 부조리함'이라 부른다. 카뮈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 시지프에 주목한다. 카뮈는 무의미한 삶을 대하는 시지프의 태도로부터 배울 것을 우리에게 권한다.

시지프는 신들의 저주를 받아 바위를 산 정상으로 영원히 반복해서 옮겨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영원한 한계상황에 처한 시지프의 반응은 의연하게 상황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무의미함을 견뎌내고 무의미함 속에서도 기쁨을 느끼는 것이 자신에게 형벌을 내린 신들에게 맞서서 자신의 삶을 구해내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시지프가 무의미함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면 이는 신들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지프가 무의미함에서 벗어나려고 신들에게 호소한다면, 그것은 신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되면 시지프에게 자신의 삶이란 없다. (중략) 시지프가 무의미함에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더구나 기쁨마저 느낀다면, 시지프는 신들을 당혹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형벌을 내린 신들의 힘을 무력화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제 시지프의 인생은 그의 것이고, 형벌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 역시 그의 것이 된다. 시지프는 자신이 살아가는 날들의 주인이 된 것이다."

신화는 구름 속 이야기같아서 필자의 개인적 이야기를 통해 설명해보겠다. 필자에게 아버지는 힘든 존재였다. 아버지는 정신적으로 나약했고 나약함은 흔히 불안과 폭력성으로 연결되었다. 사춘기 시절 필자의 방황의 팔할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필자는 아버지가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가해자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인간과 역사와 시대를 바라보는 지식을 얼추 갖추게 되면서 필자에게 아버지는 더이상 가해자가 아닌 내가 보듬어야 할 피해자로 비추어졌다. 아버지는 제국주의와 이에 파생된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체제의 구조적 폭력에 대해서는 지젝에 대한 이전 칼럼에서 다루었다.) 아버지를 받아들이면서 나쁜 자들이 만든 가해와 피해의 사슬고리를 필자는 주체적으로 끊어내었다. 피해자가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포기하면 악순환의 쳇바퀴는 중단되지 않는다. 카뮈가 말하는 시지프 신화의 원래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 해서 개인적 이야기를 곁들여본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니힐리스트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여기서 철학자 푸코가 등장한다. 철학자 푸코는 '존재의 미학'을 주장한다. 존재의 미학은 무엇일까? 푸코의 말을 들어보자. "오늘날 특이한 것은 개인이나, 삶이 아니라 예술가가 만들어 낸 무언가 특수한 것만이 예술작품으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 자체가 예술작품이 될 수는 없을까? 램프나 집은 예술적 창작의 대상이 된다고 하면서, 왜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까?"(<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 허버트 드레이퍼스·폴 라비노우 지음, 나남출판 펴냄)

푸코는 인간의 삶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왜 그럴까?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푸코의-필자주)존재의 미학은 우리 자신을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이른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틀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 자신을 예술작품처럼 만들려는 자기 창조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존재의 미학은 인간이 따라야 할 그 어떤 삶의 목적과 이유도 없다는 니힐리즘과 맞닿아있다." 니체도 같은 입장이다. "니체는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것보다 더 고도의 예술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자기자신을 창조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 고도의 예술이다." 무가치함이 횡행하는 절망의 시대는 어느새 모든 가치가 구현될 수 있는 창조의 장이 된다.

니체는 인생의 예술로의 승화라는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니체를 나치즘의 아버지로 알고 있는 분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는 이야기다. "니체는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인간이 자기 지배와 자유 정신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행동 하나하나를 예술가가 예술작품을 만드는 마음으로 수행하라고 말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기 삶의 창조자로서 우뚝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길잡이가 없는 니힐리스트의 삶 속에 '길없는 길', 즉 니힐리스트의 길을 제시한다. 책을 덮으면서 더 읽을 페이지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독서가 이렇게 즐거울 수 있음을 새삼 느꼈다. 개인적 고뇌와 세계적 사유가 적절히 만나면서 풀어내는 글의 맛. 이것을 느껴보기란 정말 오랜만이다. 철학애호가에게는 사유의 장대함을 구도자에게는 철학의 치밀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줄 책이다. 덤으로 매우 재미있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의 독서대중에게 쇼펜하우어 대신 철학자 문성훈을 감히 권한다.

▲ <니힐리스트로 사는 법>(문성훈 지음, 이소노미아 펴냄) ⓒ이소노미아

[김창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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