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신정선 기자의 눈빛] "내 연기 원천은 굶주림.. 뭐든 저질러야 살 것 같다"

신정선 기자 2015. 4. 2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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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펀치' 好演으로 제2 연기 절정 맞은 조재현 "제2 유인촌 행보?.. 정치하면 욕이나 먹을 것, 멋 없어서 안한다" 난 콤플렉스 덩어리 어릴적 가난·지방大 출신, 9수 만에 들어간 방송국.. 안짱걸음도 보기 싫지만 그것들이 날 더 낫게 만들어내 성격은 '트리플 A형' 안에 쌓여 있는 것을 강하게 폭발할 줄 아는 내성적 사람이 연기 잘해.. 나는 A형 중의 A형이다 그림서 연극으로 바꾸다 고등학교 진학하던 해 누나가 보여준 연극 보고 화가 되려던 목표 잠시 접고 '꼭 배우가 되겠다' 결심 행정에 뛰어들다 경기 문화의전당 이사장 연임해 4년 동안 맡아 '추경'이란 용어도 몰라, 초기엔 힘들어 정신과 치료 수백억짜리 극장 소유 연극으로 돈 벌 수 있고 잘될 수 있다는 걸 '수현재씨어터' 통해 반드시 보여주겠다

드라마 '정도전'의 고독한 선구자, '펀치'의 타락한 검찰총장으로 연기력을 과시한 배우 조재현(50)이 요즘 '예능'으로 뜨고 있다. 외모와 연기력에서 '한국의 알 파치노'라는 그가 '아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에선 구겨진 잠옷 바지에 목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애정 표현에 서툰 아빠의 모습을 보여준다. 연기 인생 26년 차, '정도전'과 '펀치'의 호연으로 '제2의 절정'을 맞은 그를 지난 19일 서울 동숭동 수현재씨어터에서 만났다.

'굶주림'이 나를 만들었다

―조재현 연기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굶주림이다. 나 편하게 살아도 된다. 하지만 나는 뭔가를 계속 해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늘 굶주려 있다. 배우로서, 한 인간으로서 나의 가장 좋은 점이 그 점이다. '굶주린 조재현'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조재현이다."

―이젠 돈도 인기도 다 갖지 않았나. 무엇이 '굶주린 조재현'을 만드나.

"어릴 때 가난했던 기억이 그중 하나다. 그 시절 서울에서 가장 집값이 쌌던 동숭동에서도 집을 못 구해 산동네 판잣집에서 살았다. 집까지 가려면 주린 배를 움켜쥐고 김치찌개 냄새가 진동하는 집들을 지나야 했다. 그때 배고팠던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어린 조재현에게 산동네 판잣집 시절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경남 하동 출신인 아버지 조기조(80)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아이스케키 장사부터 시작한 사람이다. 돈벌이를 찾아 밀항선을 타고 부산으로 갔다가 서울로 올라온 후 거짓말처럼 운이 트였다. 지인의 도움으로 연탄 대리점을 연 지 열흘 남짓 됐을 때 '연탄 파동'이 터졌다. 공급 부족으로 연탄값이 폭등해 돈이 굴러들어왔다. 이어 석유 장사를 시작했더니 얼마 안 가 '기름 파동'으로 또 돈이 쌓였다. 여름에는 시멘트를 팔아보자 하여 시작한 시멘트 대리점은 '시멘트 파동'을 만나 또 대박이 났다. 종로 일대에서 요식업으로도 성공했다. 동숭동 판잣집에 살던 조재현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등교했다.

눈 크고 코가 오똑하다고 동네 사람들한테 귀여움을 받던 조재현은 못 말리는 악동이었다. 불내놓고 불구경, 구멍가게 잠입 절도, 문방구 대낮 탈취 전문이었다.

―연기를 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쌓여 있던 것을 강하게 폭발할 줄 아는 것이다. 연기는 내성적인 사람이 잘한다. 평소에 분출하는 아이는 응집된 것이 없다. 매사에 표현을 잘하는 애보다 쌓아둔 애가 좋은 배우가 될 감수성이 있다."

―배우 조재현 안에는 무엇이 쌓여 있나.

"콤플렉스다. 어릴 때 가난했던 것이 첫째고, 지방대 간 것이 둘째다. 중앙대, 한양대, 동국대 친구들은 걸출한 선배가 만들어놓은 연극에 쉽게 출연했다. 방송국에 선배 PD가 많아서 탤런트 되는 것도 쉬워 보였다. 나는 9수 만에 들어갔는데…. 배우로서 모자란 부분도 많다. 얼굴은 잘생겼지만 키가 작다.('얼굴은 잘생겼지만'이 유달리 또박또박 들렸다.) 안짱걸음도 보기 싫다. 할머니가 하도 업어주셔서 다리가 안으로 휘었다. 많이 고쳐졌지만 '펀치'에서도 조금은 보이더라. 눈도 짝짝이였다."

―열등감은 성장에 방해가 되기가 더 쉬운 법인데.

"돌이켜보면 여러 콤플렉스가 나를 더 낫게 만드는 에너지가 됐다. '정도전' 할 때도 비슷한 에너지의 도움을 받았다. 정도전도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 아닌가. 요즘으로 치면 8학군 우두머리로 좋은 집안, 좋은 학교 나온 정몽주와 친구였으나 노비라는 설도 있다. 그래서 더 차가울 수 있었고 더 정확할 수 있었고 남들보다 앞서갈 수 있었고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고 본다."

―연기가 내적 에너지의 표출이라면, 악역에 능한 당신 안에는 악한 것이 많이 쌓여 있는 것인가.

"아마 내 마음속에 있는 게 나온 걸 거다. 다들 나쁜 면도 조금씩은 갖고 있지 않나. 나쁜 면이 조금일지라도 크게 모아 부각해서 표현했을 때 엄청난 쾌감이 있다."

―연기가 잘 안될 때는 어떻게 돌파하나.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린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머릿속으로 최대한 구체적인 풍경화를 그려서 그 그림을 내 몸으로, 책상 위 종이로 옮기면 풀린다."

조재현은 어릴 때 화가가 되고 싶어 서울예고에 응시했다. 입학시험에서 면접관은 "아버지가 뭐 하시냐"고 물었다. 바로 앞 응시생이 "화가 ○○○이십니다"고 답하자 면접관들이 "아, 그분"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기죽지 않으려고 조재현도 씩씩하게 답했다. "술집 하십니다." 면접관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붙었나 보다 했는데 낙방이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비행(非行) 청소년으로 반경을 넓혔다. 무단결석, 폭행, 음주, 흡연 등 비행의 백과사전이었다. 학교 세 군데를 옮겨 다닌 끝에 가까스로 졸업했다. 어떤 질문에도 길고 자세히 답하는 조재현은 요즘 유행어로 '흑역사(黑歷史)'를 설명하면서도 술술 '죄목'을 나열했다. "무슨 불만이 그리 많았냐"고 묻자 "같이 놀던 친구들이 다 그래서 나도 그랬다"며 웃었다.

―그림에서 연극으로 관심을 옮겼는데, 연극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던 해 겨울 누나가 연극 한 편을 보여줬다. 극작가 이강백의 '결혼'이었다. 처음 본 연극에 반해 '꼭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무대에서 말하는 사람이 멋있게 보였다.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멋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남들이 인정해주고, 인정받는 것."

꿈대로 '멋있어 보이려고' 부산 경성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그는 9수 만에 KBS에 합격했다. 1989년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서 유인촌의 동생으로 얼굴을 비쳤다. 이후 몇 작품에 조연을 맡았으나 스타의 길은 멀어 보였다. 연극판에서 그를 먼저 알아줬다. 1991년 연극 '에쿠우스'에서 말의 눈을 찌른 주인공 앨런을 열연해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신인상을 받았다.

―연기 초년생이 단번에 연기력을 인정받았으니 운이 따랐다.

"상만 받았지 인기와 출연료는 전혀 늘지 않았다. '에쿠우스' 공연 다음 해 KBS 연봉이 45만원이었다. 왜 다니나 싶어서 창피했다. 그 무렵에는 많이 힘들었다."

―어떻게 그 시절을 버텼나.

"미련해서 가능했던 것 아닐까. 너무 영리하면 빨리 포기하지 않나. 따로 가르쳐주는 선생도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장에서 보고 느끼는 것뿐이었다. 혼자서 하루에 2편씩 연극을 봤다. 단편 영화도 찾아 봤고."

그가 미련하게 견디고 있던 시기에 형 수현씨의 사고가 났다. MBC 카메라맨이던 형은 1995년 9월 촬영 현장을 덮친 음주 운전 차량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난해 3월 형 조수현씨와 그의 이름을 합한 ‘수현재씨어터’라는 이름으로 극장을 개관했다. 지하 5층, 지상 7층 건물로 250~400석짜리 소극장 3개 관을 갖췄다.

가정과 일 양쪽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굶주림’은 충무로 이단아였던 김기덕 감독을 만나면서 분출된다. 한때 ‘김기덕의 페르소나(分身·분신)’라고 불렸던 인연의 시작이었다. 김 감독의 데뷔작인 ‘악어’(1996)를 시작으로 5편을 함께 만들었다. 정점(頂點)은 한눈에 반한 여자를 사창가에 팔아먹는 포주로 주연한 ‘나쁜 남자’(2001)다. 조재현은 뼛속까지 나쁜 남자에게서 연민을 끌어내는 ‘미친 연기’를 보여줬다. 그는 눈과 몸으로 모든 걸 전달했다. 대사는 단 한마디였다. “까, 깡패 새끼가 무슨 사랑이야.”

누가 보겠느냐고 했는데 개봉 6일 만에 20만명을 끌어들였다. 김 감독의 전작 6편 관객을 다 합한 것보다 많았다. 다들 ‘조재현 효과’라고 입을 모았다. 그는 ‘나쁜 남자’로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터진 드라마가 아직까지도 ‘조재현의 드라마’로 회자되는 2001년 ‘피아노’였다. 평균 시청률이 40.2%를 기록했다. 요즘 조재현은 ‘아빠를 부탁해’에서 무뚝뚝한 아빠의 대표가 돼 있지만, 만년 조연이던 그를 주연급 스타로 뜨게 한 ‘피아노’에서는 부성애의 표상이었다. 고아원 출신 3류 깡패로 나온 그는 결혼하려던 여자가 죽은 후 그녀의 두 자식을 거둔다. 돈을 위해 강에 투신한 사람의 시신을 수집하는 부랑아(악어), 티켓 다방 포주(섬·2000), 개장수(수취인불명·2001) 등 그가 영화에서 보여주던 남성적이고 강한 연기에 안방 시청자들이 사로잡혔다. 자신을 외면하는 의붓자식들에게 무한한 부성애를 드러내던 그는 조폭의 표적이 된 의붓아들 대신 총을 맞고 죽는다. 아들을 향해 ‘갱호야, 사랑한데이’를 목놓아 외치던 장면은 지금도 명대사로 남아 있다.

‘피아노’는 그의 첫 번째 절정이었으나 달의 뒷면처럼 그의 족쇄도 됐다. 그 후로 뭘 해도 사람들은 ‘피아노’로만 그를 기억했다. 지난해 ‘정도전’으로 인정받기 전까지 ‘피아노’는 그에게 고마워서 잊고 싶은 성공작이었다.

‘추경’이라길래 가을에 뭘 하나 했는데…

‘피아노’와 ‘나쁜 남자’ 이후 몇 년간 고전했다. ‘목포는 항구다’(감독 김지훈·2004), ‘맹부삼천지교’(감독 정지영·2004) 등 코미디 영화에 출연했으나 ‘연기력에 비해 영화 운이 별로 없다’는 평가를 받는 데 그쳤다.

2009년 그는 ‘행정’에 뛰어든다. 경기도 영상위원회 위원장에 이어 2010년에는 경기도 문화의전당 이사장을 맡았다. 경기도 문화의전당 이사장은 경기도지사가 당연직으로 맡아온 자리였다. 외부인은 20년 만에 처음이었다. 당시 경기도지사는 김문수 현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이다.

그에게 ‘김문수의 남자’ ‘(장관 자리를 노리는) 제2의 유인촌’이라는 수식어가 이때부터 붙기 시작했다. 조재현은 이사장직을 연임해 4년간 맡았다. “(소문과 달리) 이사장을 맡기 전 김문수 당시 도지사와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고 했다.

조재현은 원래 말을 잘하고 길게 한다. 정치 얘기가 나오자 답변은 더 길어졌다. 한 편의 모노드라마로 여겨질 정도로 다양한 몸동작이 붙었다. “정치를 안 하겠다”는 부분에서는 어조가 점점 올라가면서 격해졌다.

―당시 연기로 분출구를 찾지 못해 행정직으로 방향을 틀었나?

“한때 많은 작품이 날 찾아왔지만 작품을 잘못 선택했다. ‘피아노’ 이후 나는 어느새 시들해진 배우였다. 분출할 곳을 찾다 위원장직 제안을 받고 수락했다. 임권택, 안성기 선배가 고사해서 나한테까지 온 자리였다. 홍보대사 같은 건 줄 알고 맡았다.”

―경기도 문화의전당은 기존 구성원의 장악력이 강해서 ‘예술계 공기업’으로 통한다. ‘낙하산’이 적응하기 어려웠을 텐데.

“초기에는 힘들어서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 공무원을 만났는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더라. 두통약 한 번 먹어본 적이 없는 체질인데 그때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추경(追更)’이라고 해서 추가경정예산인 줄도 모르고 ‘가을에 뭔가 하나 보다’ 했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있는 때가 많았다. 견딜 수가 없어서 병원에 갔더니 ‘최근에 안 하던 일을 한 게 있느냐’고 물었다. ‘제가 스트레스 받는 성격이 아닙니다’ 하니 ‘몸이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그 한마디에 두통이 없어졌다. 원인을 알았으니 무작정 참고 지낼 일이 아니었다.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만들었고, 340억원짜리 영화 펀드도 앞장서서 조성했다. 일을 자꾸 벌이니까 그제야 좀 살겠더라.”

―배우 출신으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유인촌씨와 유사한 행보다. 정치에 뜻이 있는 것 아닌가.

“정치는 멋이 없어서 안 한다. 연기가 멋있어서 선택한 것과 같은 이유다. 사람들이 ‘정치인이 멋있어’ 하면 너무나 하고 싶을 것이다.”

―정치가 멋져 보이게 되면 한다는 뜻 아닌가. 다들 정치 안 한다고 하다가도 결국 하던데.

“우리나라 대중은 ‘배우는 연기를 잘해야 한다’는 인식이 깊다. 경기도 문화의전당 일을 열심히 한다고 ‘완장 차는 거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로널드 레이건 같은 배우 출신 대통령이 나올 세상이 되려면 멀었다. 내가 정치에 나서봤자 밥상에서 씹히는 반찬이 될 뿐이다.”

악플도 정독한다

‘아빠를 부탁해’에서 그는 이경규, 강석우, 조민기 등 4명의 아빠와 함께 등장한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집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 20여대가 잡아낸 ‘진솔한’ 부녀(父女)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남 얘기 같지 않다” “조재현한테 저런 면이 있었나”라는 공감과 호기심으로 채널을 맞춘다. ‘부탁해’의 인기는 미묘한 역풍을 불렀다. 출연하는 딸들이 연기자나 아나운서 지망생이다 보니 “아빠 후광(後光)으로 딸을 띄우는 연예 권력 세습 프로그램”이라는 시각이었다.

―‘아빠를 부탁해’가 아니라 ‘내 딸을 부탁해’ 아닌가.

“촬영 전부터 예상했던 비판이다. 그래서 1년 전에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런데 ‘아빠와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는 딸의 말을 듣고 흔들렸다.”

딸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그는 주관식 문제의 예상 답변을 유형별로 달달 외운 수험생이 된 듯했다. 어떤 질문에도 능수능란하게 딸을 방어했다. 중학교 때 미국으로 가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한 딸 혜정(23)씨는 배우 지망생. 케이블 TV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지만 이후 여러 오디션에 고배를 마셨다.

―지나친 사생활 노출은 정극 배우로서 자충수 아닌가?

“나야 큰 문제가 아니다. 대단한 배우도 아니고. 걱정은 딸이다. 방송이 잘 안 되면 비호감으로 굳어져서 연기를 못 하지 않겠나. 초반기 인터넷 댓글을 보니 990개 중 900개가 부정적이었다.”

그는 인터넷 댓글을 다 읽는다고 했다. 자신을 “(소심하다고 알려진 혈액형 A형 중에서도 3배로 강력한) 트리플 A형”이라고 했다. 부정적인 댓글을 일부러 찾아서 읽는 것은 상처를 자초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그게 난데 어쩌냐. 읽지 말라는 거는 내가 되지 말라는 거다”며 ‘악플 정독’의 의지를 고수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영화감독도 한다

―올해로 쉰 살이다. 배우에게 지천명은 어떤 나이인가.

“지금은 뭘 해도 편하다. 흰머리가 나도 염색하지 않는다. 내겐 마흔이 충격이었다. ‘내가 아저씨가 되다니’라는 생각에 2년 정도 힘들었다. 제2의 질풍노도 시기였는데, 연극만이 날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불혹(2004년)에 ‘에쿠우스’의 10대 앨런 역에 다시 도전했다.”

―마흔 살 배우가 10대로 나오면 보는 관객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것 아닌가.

“10대 감성은 오히려 40대에 더 잘 표현된다. 20대 앨런은 생동감은 있었지만, 10대를 지나 어른 감성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때라 오히려 무미건조했다. 마흔이 되니 소년의 감성이 절실하게 이해가 됐다. 관객도 알아줬으리라고 믿는다.”

이제는 ‘편안한 쉰’이 된 그는 올여름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 “감독을 업(業)으로 할 생각은 없고, 2년 전부터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나선다”고 했다. 시나리오도 직접 썼다. “이야기 기둥만 생각하다가, ‘펀치’ 끝나고 잠시 비는 시간의 굶주림이 나흘 만에 시나리오 하나로 분출됐다”며 “촬영은 6월에 들어가고, 10월 부산국제영화제 개봉이 목표”라고 했다.

―그토록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

“40대 후반의 평범한 남자 이야기다. 10년 전 행운처럼 다가왔던 사랑을 잊지 못하던 남자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 영화 속 에피소드는 주변 친구와 배우들 실화에 살을 붙였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의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인간 수명이 100년에 이르는데, 결혼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뀔 때가 된 것 아닌가.”

조재현은 요즘 연극 ‘민들레 바람 되어’로 지방 공연을 돈다. 2009년 초연 당시 전회 매진된 작품이다. 조재현은 이 연극에서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로 나온다. 딸의 결혼식이 끝나고, 그가 혼자 남게 된 심정을 읊조리는 독백이 초연 때부터 유명했다. 그의 독백이 끝날 즈음이면 어김없이 객석이 눈물바다가 된다.

원래 대본에 없던 대사인데 조재현이 직접 썼다. 그는 “딸이 떠나고 없는 집을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저절로 대사가 생각났다”고 했다. 이쯤 되니 ‘딸 마음을 몰라주는 무뚝뚝한 아빠’라는 TV 프로그램의 설정에 동의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수현재씨어터를 둘러보던 그는 “반드시 이 극장으로 돈을 벌겠다”고 했다. 시세가 수백억원에 달한다고 해서 그에게 ‘빌딩 갑부’란 별명을 붙여준 건물이다.

“선배 연극인들이 연극을 하다 집 날렸다는 말을 하는데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내가 돈을 못 벌면 ‘거 봐라, 돈도 못 벌고 극장 다 날렸단다’ 할 것이다. 그 생각을 보기 좋게 뒤집어서 연극 해서도 돈 벌 수 있고 잘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

그의 얼굴에서 어린 시절 뛰어놀던 동숭동을 기필코 지켜내려는 ‘꼬마 악당’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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