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취업문 뚫으려.. 벤처 창업하려.. '工大 복수전공' 모험 택한 문과생
서울대 경영학과 4학년 이모(23)씨는 2년 전 같은 학교 기계공학과 복수 전공을 신청했다. 2학년 때까지 경영학과 전공과목을 모두 이수한 뒤 '일할 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공부를 더 하겠다며 내린 결정이었다. 이씨는 "엔지니어들이 어떤 학문적 배경을 갖고 있고, 어떤 단어와 개념을 머리에 넣고 있는지 알면 회사 생활에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공대 수업에 앞서 겨울방학 동안 이과생들이 고등학교 때 배우는 '수리2' '물리2' 같은 과목을 집중 공부했다. 이어 복수 전공을 시작한 첫 학기엔 공대 1학년생들이 듣는 일반물리학·일반공학 등을 수강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이씨는 국내 한 대기업에 입사가 확정된 상태다. 이씨는 "여름방학 때 기업에서 상품 전략 쪽 인턴을 했는데 그 부서 직원의 절반 정도는 이공계 출신이었다"며 "복수 전공으로 배운 내용이 상품을 이해하고 판매 전략을 짜는 데 유용했다"고 말했다.
치열한 취업 전쟁터에서 '공대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점점 더 강력한 보증수표로 자리 잡으면서 문과생들이 공대 과목을 수강하거나 아예 복수 전공을 신청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동안 문과생들은 기업이 공대 출신을 선호하는 현실에 한숨지으며 지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필요하면 내가 개척한다'는 식의 적극적 행동에 나서는 경우가 늘어난 것이다.
서울대의 경우 지난 1학기에 문과계열 학생 24명이 공대 복수 전공을 신청했다. 2011년만 해도 공대 복수 전공 신청자는 한 명도 없었다. 성균관대도 문과 출신 공대 복수 전공자가 2011년 12명에서 지난해 51명으로 증가했고, 중앙대에선 2011년 문과 출신 공대 복수 전공, 부전공 학생이 한 명도 없었는데 작년엔 6명이 나왔다.
잠재적 수요도 많다. 서울대 대학생활문화원 '신입생 특성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복수 전공을 한다면 공대를 택하겠다는 경영대 학생이 2011년 5.6%에서 2015년 24.4%로 5년 사이 네 배 이상으로 늘었다. 반대로 공대에서 경영대 복수 전공을 희망하는 학생 비율은 2011년 45.7%에서 2015년 23%로 반 토막이 났다. 조건과 여건이 허락하면 더 많은 문과생들이 공대 복수 전공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서울대 관계자는 "그동안 경영학과는 문과 중에서도 취직이 가장 잘 되는 학과였는데, 최근 경영학과 학생 중에서도 공대 복수 전공자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문과생들에게 공대의 문을 활짝 열어라"
요즘 대학들은 공대 교육 과정을 문과생들에게 개방하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누구나 복수 전공을 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여는 것이다. 국민대가 대표적이다. 이 학교는 2013년 '모든 계열 간' 복수 전공을 허용해 문과계열 학생이 공대를 복수 전공할 수 있게 했다. 국민대 관계자는 "올해만 문과생 12명이 공대 쪽 복수 전공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경희대는 지난해 융합교육지원센터를 설립했다. 센터에서 학과 간 융합 교육 과정을 만들어 운영하고, 문과생들이 이공계 학과 강의를 듣거나 복수 전공을 할 경우 지원해준다. 한양대 에리카캠퍼스는 내년에 신문방송학과와 전자공학·컴퓨터공학을 융합한 미디어테크놀로지 과정을 만들기로 했다. 한양대 관계자는 "문과 학생들이 멀티미디어 사업이나 콘텐츠 개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서울대에선 경영대 학생들이 공대 과목을 들을 경우 문과계열 학생만 따로 모아 점수를 매기는 방안이 추진된다는 말이 나돌면서 파장이 일기도 했다. 박상욱 서울대 경영대 교무부학장은 "아이디어 차원에서 나온 얘기고,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박 부학장은 "공대 수업을 듣고 싶어도 학점 관리가 쉽지 않아 포기하는 학생들이 많다"며 "문과 학생들의 공대 수업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과 학생들에게 이공계 과목 수강 기회를 제공하려는 노력은 학교 밖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지난 4일 인문계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이공계 교과목을 가르치는 '인문계 특화 과정'을 운영키로 했다고 밝혔다.
문과생들 입장에선 이런 흐름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기업이 복수 전공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든든한 취업 전략은 없기 때문이다. LG전자·현대자동차·포스코 등은 "이공계 직무라 해도 공대 단일 전공 지원자와 복수 전공자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했다.
경북대 박주현(일어일문학과 2)씨는 "1학년 때 컴퓨터 부전공을 하는 선배가 IT 대기업 계열에 입사하는 것을 보고 공대 부전공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일어일문학과, 컴퓨터공학을 모두 활용할 수 있도록 일본에 가서 컴퓨터공학계열에 취직할 생각"이라고 했다.
갈수록 맹위 떨치는 취업 자격증 '공대 출신'
문과 학생들이 공대 복수 전공에 관심을 갖는 것은 치열한 취업 전쟁 때문이다. 한국고용개발원 발표에 따르면 2014년 기준 공학계열 취업률은 65.6%로 인문계열 45.5%에 비해 20%포인트 가까이 높다. 2014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실시한 신규 채용 조사에서도 100대 기업 중 문과생을 더 많이 뽑는다고 응답한 기업 비율은 14.6%에 불과했다. 특히 취업 시장에서 선호도가 높은 삼성전자·LG전자·현대자동차는 신규 채용의 80% 이상이 이공계다.
최근 공대 우대 풍조가 영역을 가리지 않고 확장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이공계열 출신이 예전엔 주로 문과생들이 차지했던 일자리까지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KEB하나은행은 올 하반기 공채에서 일반직 우대 요건에 '이공계 전공자'를 명시했다. 은행 일반직 업무는 수신·외환·가계대출 등 영업점에서 하는 일반 업무다. 그동안은 주로 인문계 출신이 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제조업을 대상으로 하는 여신 업무에 해당 업종을 잘 이해하는 이공계 전공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포스코도 마케팅·구매·경영지원 등 사무계 직무에 대해 공학 전공자를 우대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포스코 관계자는 "사무직군도 입사 후 현장 기술 교육을 받는다"며 "순환 근무를 하면 어느 부서에 갈지 모르기 때문에 기본적인 이공계열 지식이 있는 사람을 우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삼성전자·삼성 SDS 등 삼성그룹 계열사들은 비이공계생이 대학 내에서 SCSC 프로그램을 이수할 경우 '모든 직군' 면접에서 가산점을 주고 있다. SCSC는 삼성이 각 대학과 손잡고 만든 프로그램으로, 비이공계생만 따로 모아 공대 과목을 듣도록 한 것이다. 한 전자계열 기업 관계자는 "기술적인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영업사원이 물건도 더 잘 판다"며 "업종에 대한 이해도라는 측면에서 추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삶의 의미 찾아가는 젊은이들
문과 대학생 중에선 공대 복수 전공을 택하는 이유에 대해 "창업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서울대 경영대 학생회장 곽성원(경영학과 4)씨는 "공대 복수 전공을 준비하는 경영대생의 절반 정도는 벤처 창업을 꿈꾸는 학생"이라고 했다. 서울대는 2014년 '벤처경영학 연합전공'을 신설했는데 그 후 창업을 위한 IT 지식을 쌓는 차원에서 공대 수업을 듣는 문과 학생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취미나 흥미를 좇아 공대 수업을 듣는 경우도 있다. 연세대 최정윤(경영학과 3)씨는 게임이 좋아 공대 수업에 뛰어들었다. 대학교 입학 이후 게임 개발을 배우려고 서울게임 아카데미에 등록해 9개월 정도 매일 수업을 듣다 컴퓨터 공학 복수 전공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최씨는 "게임 전문 기업에서 프로젝트 관리자가 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심리학 전공인 신모(23)씨는 인공지능에 끌려 컴퓨터공학 복수 전공을 시작했고, 졸업 후엔 아예 컴퓨터공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신씨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짜고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화여대 공대 관계자는 "공대 복수 전공, 부전공을 하는 문과 학생들은 공대 쪽 공부에 흥미를 느끼는 경우다. 공대 학문에 아예 관심이 없으면 끝까지 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공대는 반발 "아직 갈 길은 멀다"
각 대학의 공대 관계자들 중엔 이 같은 움직임을 불편해하는 경우도 있다. "공대학생들만 가르쳐도 시설과 교수 인력이 부족한데, 다른 계열 학생까지 몰려오면 부담스럽다"는 식이다. 서울대 공대 관계 자는 "시설·인력 확충 없이 문과대 학생들에게 공대 복수 전공 문을 넓혀줄 경우 기존 공대생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고 전했다.
복수 전공을 하는 경우 기초 학습과 과목 시간표 등을 모두 학생 개인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배움 자체가 부실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허균영 경희대 융합전공지원센터장은 "복수 전공에 대한 개념과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잡혀 있지 않아 자칫 문과 학생들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될 수도 있어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일부 공대생들 사이에선 공대 복수 전공 문과생들 수가 크게 늘어날 경우 취업 경쟁이 더 치열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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