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중쇄를 찍자>-초판 2000부마저 다 팔리지 않는다면

2015. 12. 2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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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시리즈의 1권이 처참한 판매량을 기록했다면 2권과 3권은 나오기도 어려워진다. 따라서 2쇄를 찍는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작품을 이어나가도 된다는 의미이고, 출판사에는 이 작품으로 큰 손해는 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한 해가 끝나갈 무렵이면 늘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그간 잘 살았는지 불안해서일까, 잘했다고 스스로 믿고 싶어서일까. 어쨌거나 아주 상투적이고 뻔한 습관일 테지만, 의식적으로라도 돌아보기 때문에 발견되는 것이 늘 있다. 올해는 미처 보지 못했던 만화가 각별히 그렇다. 올해의 만화라도 선정할라치면 안 본 만화, 특히 보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뒀던 만화를 집어들지 않을 수 없는데, <중쇄를 찍자>(마츠다 나오코, 애니북스)는 그렇게 만난 작품이었다. 올해를 정리하는 시점에 만화업계 언저리에서 살아가는 이가 보기에 이만한 작품이 없지 않을까 싶다.

만화를 만드는 손길들에 감사하며 일본어 원제는 <중판출래(重版出來)>, 초판을 모두 소진하고 중판 혹은 중쇄를 찍어내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 책이든 만화책이든 초판 부수는 예상 판매량을 바탕으로 정해지는데, 당연히 유명한 작품일수록 더 많이 찍는다.(참고로 일본 만화 가운데 초판 발행부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작품은 <원피스>다. 단행본 67권만 무려 405만부를 찍었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일본은 5000~8000부, 한국은 2000~3000부 정도 선에서 초판 1쇄를 찍는 추세다. 문제는 1년이 지나도 2000부마저 다 팔리지 않고 사라져가는 작품이 많다는 거다. 만약 만화책 시리즈의 1권이 처참한 판매량을 기록했다면 2권과 3권은 나오기도 어려워진다. 따라서 2쇄를 찍는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작품을 이어나가도 된다는 의미이고, 출판사에는 이 작품으로 큰 손해는 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작품으로서는 계속해서 독자와 만날 수 있다는 의미이고. 이러니 출판업 종사자와 작가에게 ‘중쇄를 찍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마츠다 나오코 작가의 만화 <중쇄를 찍자>의 한 장면. / 애니북스 제공

<중쇄를 찍자>는 이처럼 실감나는 목표를 이루어가는 출판사 만화편집부의 일상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낸다. 게다가 편집부 신참인 주인공이 유도부 출신이라 스포츠 만화를 보는 느낌까지 있다. 마치 지역 예선 통과를 목표로 열심히 훈련하는 고교 운동부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역시나 만화·책이라서 스포츠와는 다른 열혈 포인트가 있다. 무엇보다 만화책을 중심으로 서로 이어진 여러 사람들의 존재와 그들의 마음을 살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 그렇다.

<민들레 철도>라는 작품 속 작품 에피소드를 예로 들어보자. 이 작품은 핫탄 카즈오라는 신인작가의 데뷔작으로, 출간 몇 개월이 지났지만 1·2권 초판도 아직 다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깐깐하기로 유명한 영업과장 오카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작품의 진가를 발견했기에 아직 포기는 이르다. 3권 발매에 맞추어 다시 승부를 보자는 사내 방침이 서고, 이에 따라 주인공 코코로와 영업부 직원 코이즈미가 전국의 서점을 뛰어다닌다. 코이즈미는 처음엔 존재감 없이 일하던 ‘유령’이었지만, 신입사원답게 멋모르고 덤비는 코코로의 활약을 보며 변하기 시작한다. <민들레 철도>를 작품 콘셉트에 맞게 여행 코너에 비치해 달라는 부탁 편지를 400통이나 자필로 쓰고, 서점에 직접 찾아가 인사를 하느라 구두 밑창이 다 닳아버릴 정도로 일한다. 그 노력에 감동하고 또 무엇보다 <민들레 철도>가 좋아서 서점 직원들도 힘을 쓴다. 책을 위해 애쓰는 이들을 보며 코코로는 이렇게 되뇐다. “만화가도 모르고, 독자도 모른다. 책을 팔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마음을 전하기 위해 모두가 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좋은 만화 위해 ‘열혈’로 일해볼 만한 걸까

이런 땀방울들이 뿌려진 결과 <민들레 철도>는 중쇄를 찍었을 뿐만 아니라 몇십만 부의 판매량을 기록한다. 이 결과 앞에서 “‘팔린’ 게 아니야. 우리가 판 거다”라고 오카는 생각한다. 이 자부심 넘치는 생각 속의 ‘우리’는 독자와 작가가 책을 통해 서로 만나기까지, 그 사이에서 책에 힘과 마음을 쏟는 모든 사람들이다. 편집자, 물류센터 직원, 영업사원, 서점 직원 등등, ‘출판산업’이라는 말 속에서 흐려지고만 노동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그 속에 있었다. 이 대목이 어찌나 뭉클하던지. 사실 나도 작가와 독자 사이에 있는 누군가니까 그렇게 뭉클했겠지. 그런데 나를 그렇게 집어넣고 보자니 그 뭉클함에서 결이 꽤나 다른 물음표 하나를 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네 현실과 닿아 있는 이런 질문이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힘을 낼 수 있을까?’

만화 <중쇄를 찍자> 한국어판 표지. / 애니북스 제공

2015년의 현실을 짧게 톺아보자. 유명작가(들)의 표절이 폭로되었고, 그것을 비호한 문단 권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로써 우리 사회는 문단의 곪디곪은 문제를 아는 몸이 되었다. 하지만 그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는 여전히 잘 모른다. 큰 출판사의 편집자가 부당전보를 당했고, 이 일로 지금도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듯이. 그나마 알려진 사건이 있다면 일러스트레이터 난나의 죽음이다. 신문연재 소설과 칼럼의 삽화로 인정받았던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아마도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삶에서 전망이 보이지 않아서였을 거라는 게 지인들의 조심스런 추측이다. 4년 전 최고은 극작가가 홀로 죽었을 때와 우리 사회는 별로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몇 년 후에는 좀 달라질까? 출판업계로만 한정해도 독자와 작가 사이에서는 이런 큰일들이 있었다. 만화로 더 줄여보면 어떨까? 올해도 몇 군데 만화잡지가 휴간 혹은 폐간했다. 지원사업이 마무리되면 사라지는 수순이 고착화된 셈이다. 사람들은 어떤가. 만화 편집자, 만화 번역가들은 어떻게들 살아가고 있을까? 우후죽순 생겨난 웹툰 플랫폼 종사자들이나, 도전 중인 예비 만화가나 어시스턴트들은? 동네 만화 전문 서점 주인과 직원들은 또 어떻게들 힘을 내고 있을까? 만화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쓰는 이들은 또 어떨까? 돌아보니, 이런 물음표를 계속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의 만화를 만들어가는 이들은 좋은 작품을 위해서 ‘열혈’로 일해볼 만한 걸까?

나와 내 주변인들을 살펴본다면 답은 쉽지 않다. 물론 힘써 일해볼 마음은 좋은 작품 앞에서 언제나 생겨난다. 하지만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에너지는 업무환경과 조건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받는 만큼을 넘어서 일한다. 작품이 좋고 만화가 좋아서 값을 따지지 않고 움직이는 이들이 유독 많은 업계가 만화계다. 그런데 그렇게 일하는 것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특히나 정규직도 아닌,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라면? 프리랜서 일반노조라도 만들어야 하나?

하여간, <중쇄를 찍자>를 유쾌하고 뭉클하게 보고서 다시금 2015년을 돌아보니 이런 물음표들이 보였다. 장밋빛 이야기에서 우울을 발견하게 되는 일도 내년에는 그만둘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그런 바람이나마 담아, 만화계의 ‘우리’들에게로 넋두리를 던져 보낸다.

<조익상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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