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허기진 군상](2)미래 없는 청년들 "다들 죽지 않으려 발버둥..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없어"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청춘(靑春)’. 그러나 청춘은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 약자의 대명사가 됐다. “흔히들 청년한테 도전하라고 하잖아요. 저는 도전해볼 만큼 도전해봤어요. 그런데 사회는 싼값에 저를 부려먹으려고만 하더라고요. 요즘엔 너무 열심히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어요.” 지난달 20일 오후 2시 서울 서대문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지민씨(23·여·가명)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요일인 이날도 정씨는 오전에 3시간 일하고 5만원을 받는 예식장 아르바이트를 다녀왔다고 했다.
■‘월 30만원’ 디자이너 인턴 지민씨 이야기
정씨는 전문대 패션디자인학과에 입학하자마자 쉴 새 없이 무언가를 해왔다. 액세서리 매장 판매원, 수제햄버거집 서빙, 의류 편집숍 판매원 등 한 달 이상 아르바이트를 한 것만 5번이다. 예식장 안내원, 마트 제품 판매원 등 단기 아르바이트까지 합하면 더 많다. 주말에도 아침에 나가 저녁까지 일했다.
“내 옷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며 틈틈이 실험도 했다. 2012년 여름에는 친구들과 특이한 패턴의 원단으로 팔찌를 만들어 홍익대 인근 길거리에서 팔았다. 그해 겨울에는 한 갤러리가 주최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정씨가 그린 그라피티는 도록에도 실렸다. 동기들 사이에서 정씨는 늘 ‘바쁜 친구’로 통했다.
정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현실의 벽을 절감했다. 4년제 대학 졸업자와 경력자가 넘치는 패션 대기업은 지원도 못해봤다. 그는 디자이너와 스타일리스트 밑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경력을 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단계씩 밟아가면서 포트폴리오를 채우면 정규직도 되고 자신의 가게도 차릴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그러나 정씨는 지난 1~2월 유명 디자이너의 인턴으로 일하면서 ‘인간 이하의 대접’이란 게 뭔지 실감했다.

| 정지민씨가 6일 서울의 한 선글라스 매장에서 일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밖을 내다보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7~9월 했던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 일도 마찬가지였다. 패션계 거물들이 모여 있는 강남구 신사동의 으리으리한 사무실. 휴지에서도 향기가 나는 그 공간에서 정씨는 좌절했다. 주6일 근무는 기본이고, 밤 12시가 넘어 일이 끝날 때가 많았지만 월급은 30만원이었다.
신사동 사무실에서 압구정 로데오거리나 한남동, 홍익대까지 뛰어다니며 옷을 빌리고 반납했지만 ‘관행’이라며 교통비도 지급하지 않았다.
옷가방 대여섯개를 들고 다니면서, 점심은 김밥으로라도 때우면 다행이었다. 너무 힘들어 택시를 타면 1만원은 족히 깨졌다. 통장은 금세 마이너스가 됐다. 돈이 모자라 ‘투잡’을 해보려고 했지만 “언제 일손이 필요할지 모르니 투잡은 안된다”고 했다. ‘잘못 찍히면 이 업계에서 일 못한다’는 분위기 때문에 힘든 내색도 하지 못했다.
정씨는 짐을 들고 압구정 로데오거리를 지나가다 날아다니는 흰색 쓰레기 봉지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쓰레기 봉지의 처지가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어딘가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데….” 정씨가 양손에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옷들은 한 벌에 수백만원 하는 고가품이다. 갤러리들이 몰려 있는 압구정동 길가에는 외제차들이 즐비하다. “나는 입지도 못할 그 옷들을 가지고 다니면서…. 너무 극명하잖아요. 누가 봐도 나는 노예이고, 계급이 나눠진 것 같은….”
정씨에게 필요한 건 많은 돈이 아니다.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의 급여와 자신을 다독일 수 있는 시간, 적당한 노동, 친구와 가족이면 된다. 그러나 2015년 대한민국에선 이 소망을 이루기가 너무도 어렵다.
정씨는 “대한민국은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비어 있어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다들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지만 정말 살아 있는 놈은 없다고 해요. 행복한 순간이나 삶에 대한 희망과 기대 같은 것은 없다는 거예요.” 정씨는 이달 말부터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중소기업청 지원을 받아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사업도 고민 중이다. 인터뷰 말미에 정씨가 말했다.
“청년들이 힘든 게 당연하지 않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혜리·김상범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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