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제2의 크림반도 '돈바스'
■ 도네츠크로 가는 길

"갈까 말까..." "다음에 가도 될 텐데..하필 지금.."
솔직히 몇 번 망설였다. 아직 내전 중인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가기로 마음 먹었지만, 왠지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도네츠크 시내는 비교적 안전하다는 현지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드디어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10월 25일, 우크라이나에서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지난해 5월 독립을 선언한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지역(두 지역을 합해 '돈바스'라고 한다.)은 이번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내년 2월에 독자 선거를 치르기로 했다. 돈바스 지역은 올해 2월 '민스크 합의'로 휴전이 성립되기 전까지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지역이다. 휴전이 성립된 지 8개월이 지난 시점이고, 선거 문제도 있고 해서 취재를 가보기로 결심했다.
모스크바에서 도네츠크시까지 가는 데는 만 하루가 걸린다. 모스크바에서 남부 '로스토프나도누'라는 도시까지 비행기로 2시간, '로스토프나도누'에서 국경까지 자동차로 2시간 걸린다. 러시아와 도네츠크인민공화국 사이의 국경인 '마트베예프 쿠르간'에서는 출입국 절차가 최소한 1~2시간이 걸린다. 국경에서 도네츠크주의 주도인 도네츠크시까지는 또 차로 2시간이 걸린다.
양국 사이 국경이 2km 정도인데, 짐을 들고 걸어가야 한다. 물론, 모스크바에서 이곳 국경, 혹은 도네츠크까지 가는 버스가 있긴 한데. 17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래서, 버스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짐을 들고 걸어서 국경을 통과한다. 그런데, 국경 통과를 기다리는 차량이 어찌나 많은지 깜짝 놀랐다. 자동차 행렬이 최소한 2km 이상은 돼 보였다. 국경 통과 시간이 적어도 5시간 정도는 걸린다고 한다. 걸어서 통과하는 게 가장 빨라 보였다.
■ 내전의 상처

국경을 넘어 도네츠크인민공화국으로 들어서자 도로 상태부터 좋지 않았다. 곳곳이 움푹 패어 있고 울퉁불퉁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내전의 후유증이다. 도로 주변엔 포격을 당해 폐허가 된 집들이 곳곳에 있었다. 건물 외벽이나 담벼락, 대문 등에 기관총탄 자국들이 흉측하게 남아 있었고, 희생자가 생긴 곳에는 조화가 걸려 있었다.

석탄 광산으로 유명한 도네츠크답게 도시 입구에 광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도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평온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에 그랬다. 곳곳에 내전의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포격을 당해 처참하게 무너진 박물관. 대학교 실험실 지붕 위에도 포탄이 떨어져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도네츠크 국립기술대학교는 포탄의 잔해를 박물관에 전시해 놓고, 그날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도시 곳곳에 총탄 자국과 포탄 맞은 건물들이 즐비했다.

아직 복구는 엄두도 못 내는 형편이다. 제일 심각한 곳은 도네츠크 공항으로 가는 길목인 키예프스크 지역이다. 이곳에는 지난 8월까지 민가에 포탄이 떨어졌다고 한다. 두려움에 떨던 주민들이 피난을 떠나서 마을 전체가 유령 마을로 변했다. 도네츠크 중심가에서 우크라이나 국경까지는 불과 15~20km 거리이다.(이 대목에서, 수도 서울이 DMZ로부터 40km 거리여서 북한의 장사정포 사거리에 들어가 있는 한국의 현실이 새삼 떠올라서 가슴이 찡했다.)
공항으로 가는 푸틸로프스키 다리 앞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돼 있고,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 푸틸로프스키 다리는 포격으로 주저앉아 복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는 대낮에도 총성이 들렸다.

▲ 폐허가 된 도네츠크 공항 청사
도네츠크 공항을 가기 위해서는 민병대의 특별한 허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민병대원이 가이드로 따라 나섰다. 우회도로를 통해 찾아간 공항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포격을 맞은 공항 터미널은 초토화돼 건물 잔해만 남아 있었다. 옆에 있는 호텔 건물은 포격으로 무너져 내렸고, 무수히 많은 총탄 자국이 보는 이의 가슴을 애잔하게 만들었다. 길바닥엔 박격포탄이 그대로 박혀 있고, 기관총탄 탄피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여기서 맞은편 우크라이나 정부군 진지까지는 불과 1km 남짓.. 우크라이나 정부군은 수시로 총을 쏘고 심지어는 탱크 포탄을 발사하기도 한다고 했다.
도네츠크인민공화국 민병대는 이에 일체 대응을 못 하도록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휴전 협정을 맺었는데 왜 아직도 총격을 가하는 걸까? 이에 대해 인터넷 매체인 '돈 아이(Don i)'의 미카엘 포포프 기자는 "우크라이나는 우리를 자극해서 대응사격을 유도하려는 거죠. 그래서 도네츠크가 민스크 합의를 위반했다고 비난하려는 의도인 거죠."라고 말했다.
■ 독립 선언…그리고 내전

▲ 유로 마이단 봉기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는 유럽으로의 통합을 지지하는 이른바 '유로 마이단' 봉기가 일어나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그러자, 이 같은 친서방 움직임에 반감을 갖고 있던 크림반도가 지난해 3월 주민투표로 러시아로 귀속을 결정했고, 러시아는 이를 즉시 받아들였다. 이어 5월에는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등 이른바 '돈바스' 지역이 독립을 선포했고,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분리주의 반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지난 2월 12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독일, 프랑스 4개 나라 정상들이 17시간에 걸친 밤샘 협상을 통해 '민스크 합의'를 이끌어 냄에 따라 양측이 전면 휴전에 들어갔는데도, 총격과 포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돈바스 지역은 무엇 때문에 독립을 결정한 것일까?
데니스 푸쉴린 도네츠크인민공화국 인민 의회 의장은 크게 3가지를 이야기했다. 첫째는 돈바스 지역 주민들의 75%가 러시아어를 쓰는데도 우크라이나 정부가 우크라이나어를 쓰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2차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해 주민들을 핍박하던 부역자들이 지금은 우크라이나 정부의 고위직에 올라 '영웅'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 셋째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급격하게 서구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푸쉴린 의장은 "우리 기업들은 대부분 유럽이 아니라 러시아나 유라시아 연합(벨라루스,카자흐스탄 등) 쪽과 협력하고 있다. 유럽 기준을 따라가면 경쟁력이 없다."고 말했다.

▲ 도네츠크 시
1년 반에 걸친 양측간 교전으로 지금까지 8천 명 정도가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타 건물이나 산업시설 피해는 아직 집계 조차 못 한 듯하다.
도네츠크 시내는 저녁이 되면 쥐죽은 듯이 조용해진다. 길가에 사람도 별로 없고 자동차도 뜸해진다. 음산한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 인구 백만 명 가운데 50만 명이 피난을 떠났는데, 겨우 20만 명만 돌아왔고 30만 명이 아직 객지를 떠돌고 있다고 한다. 시내 음식점도 밤 8시 정도면 문을 닫는다고 한다. 모두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니 시내가 텅 비는 것이다.
■ 민병대
취재 중에 만난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의 민병대원들을 유감스럽게도 제대로 찍지 못했다. 그들이 찍으면 안 된다고 명령 내지는 간곡히 요청했기 때문이다. 민병대원 중에는 그들 가족이 아직 우크라이나 영토에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얼굴이 공개될 경우엔 가족들이 해코지를 당할 것을 우려했다.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은 이제 막 군대를 조직 중에 있다. 그래서 '민병대(militia)'라고 부른다. 민병대원들은 전직 우크라이나 정부군 출신도 있고, 교사, 광부, 엔지니어 등 출신도 다양하다. 취재진을 공항에 안내했던 민병대원은 컴퓨터 디자이너 출신인데, 한국의 게임에 관심이 많아서 꼬치꼬치 묻곤 했다. 민병대원들은 "우크라이나 정부군의 대다수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도 평화를 원한다. 전쟁을 원하는 것은 극우 민족주의자들이다."라고 말했다.
■ 도네츠크 탄전

▲ ‘프로그레스’ 석탄 광산
산업시설 가동 현황을 알아보기 위해, 도네츠크시에서 동쪽으로 50분 거리에 있는 토레즈 지역의 '프로그레스(Progress)' 탄광을 찾았다. 이곳은 돈바스 지역에서도 질 좋은 석탄이 나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도 지난해 가을 포격을 당해 겨우내 수리를 마치고 올봄부터 겨우 정상가동에 들어갔다고 한다.
지하 1,200미터 깊이로 내려가서 좁은 막장을 30분쯤 들어가니 석탄 채취장이 나타났다. 탄 캐는 작업은 사람이 하지만, 석탄 운반은 컨베이어 벨트로 자동화돼 있었다. 킬멘추크 사장은, 하루 평균 2,000~2,200톤 정도 생산한다면서, 이 정도면 평균 수준이라고 했다.
돈바스에는 우크라이나 석탄 광산의 70%가 몰려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철강·중화학 공업 단지가 조성돼 있어서 '우크라이나의 심장'이라고 불린다. 돈바스의 면적은 우크라이나 전체의 5%지만, 우크라이나 국내 총생산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로선 핵심 이익이 걸려 있고, 그만큼 교전이 치열했던 것이다. 당장 우크라이나 화력발전소들이 석탄 수급에 애로를 겪고 있고, 이 때문에 전력난이 심각하다고 한다. 석탄 광산에 이어 도네츠크 광산공학 공장도 찾아갔는데, 이 공장의 바실리 무드레쵸프 사장은, "지역 기업의 80%가 가동 중인 것 같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노력 중이다."라고 말했다.
■ 돈바스의 전쟁과 평화
돈바스는 지난해 5월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크림반도처럼, 러시아가 자신들을 러시아 영토로 귀속시켜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아직 가타부타 반응이 없다. 러시아로서도 복잡한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압박해 돈바스에 폭넓은 자치를 허용하도록 하면서, 이를 지렛대로 삼아 우크라이나가 서구화되는 것을 막을 셈법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돈바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도네츠크의 정치평론가인 미카엘 샤갈라얀은 이렇게 말했다. "도네츠크의 미래는 독립국가이다. 확실히 독립국가이에요. 우리는 자체 은행 시스템이 있고, 자체 입법체계가 있고, 내부 시장도 발전하고 있다. 우리 사회도 우리가 독립국가라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통시장에서 만난 민초들의 애기를 들어보니 가슴이 찡했다. 잡화점을 한다는 아주머니 나데즈다의 말이다. "내 친척의 절반은 우크라이나 사람이고 절반은 러시아 사람이다. 우리가 누구죠? 우리는 모두 슬라브 민족이다. 어떻게 우리가 갈라질 수 있죠?"
돈바스의 전쟁과 평화는 온전히 그들 몫이다. 다만, 그들의 운명이 정치가들의 손에서 결정되지 않고, 민초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연관 기사] ☞ [특파원 현장보고] 분쟁의 땅 도네츠크를 가다 ☞ 총성 계속되는 ‘도네츠크’…긴장 여전(2015.11.09)
하준수기자 (ha6666j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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