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 포커스] '매직 마자르', 헝가리의 찬란했던 과거

[스포탈코리아] 헝가리가 유로 2016년 본선 티켓을 따냈다. 지난 16일(한국시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노르웨이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 홈경기에서 2대1로 승리하며, 통합스코어 3대1로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1972년 벨기에에서 열렸던 유럽축구선수권 대회 이후로 첫 출전이니, 정확히 44년 만이다. 불과 50-60년 전만해도 세계최고 브라질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축구 강국’ 헝가리의 2016 유럽 본선 진출은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다시 알리는 계기가 됐다.
유로뿐만 아니라, 30년 가까이 월드컵 무대조차 밟지 못했던 그들에게 있어서 축구는 낯선 스포츠가 아니었다. 1952년 하계올림픽에서 우승을 차지했었고, 2년뒤에 열린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뤘었다. 1952년 9월부터 1956년 11월까지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총 35번의 A매치에서 단 1패만을 기록했고, 특히 화끈하면서도 폭발적인 공격력과 완벽한 팀 플레이로 인해 ‘매직 마자르(Magic Magyar, 마법사 라는 뜻)'라는 애칭으로 유명세를 떨친 헝가리였다.
완벽에 가까웠던 헝가리가 축구팬들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기억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과거는 어떠했고 어떻게 축구팬들에게서 잊혀졌는지 낱낱이 파헤쳐보자.
:: 구스타보 세베슈, 기존의 MW에서 MW으로
1920년대와 1930년대 영국 축구를 주름 잡았던 인물은 바로 아스널의 레전드 허버트 채프먼 감독이다. 그는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체계가 잡힌 WM 전술을 이용해, 아스널에 리그 우승을 가져다 주며 축구 계의 한 획을 그었다. WM 전술이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체계가 잡혔던 전술이라고 평가 받는 이유는 선수들의 역할 분담에 있다. 이 전까지의 전술에서는 공격수와 수비수가 나누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공격수가 W자 대형을, 수비수가 M자 대형을 이루어, 처음으로 공격과 수비의 역할이 사실상 나뉘게 된다. 허버트 채프먼의 전술은 센터백에게 중앙 공격수를 마크하기 위해 뒤로 쳐지는 것을 요구했고, 풀백들에게는 상대의 측면 공격수들을 마크할 것을 주문했다. 스토퍼 개념의 도입이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에 가까웠던 전술이었고, WM전술은 현대 축구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쓰리백 전술의 시초로 잘 알려져 있다.

50년대 초반의 헝가리의 세베슈 감독이 사용한 MM 포메이션은 세계 축구의 한 페이지를 담당하는 전술로 평가된다. 세베슈 감독은 4~50년대 당시 단편 일률적으로 사용되던 영국식 WM 시스템에 부분적인 수정을 가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전술적 변화의 테마는 바로 ‘포지션체인지’ 였다. 이는 철저한 1:1 대인마크 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던 WM 시스템의 수비진을 보다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이 전술에 최초의 희생양으로 떠오른 팀은 당시 세계 최강임을 자부하고 있던 종주국 잉글랜드였다. 헝가리대표팀은 당시 홈에서 90년 무패기록을 이어가던 잉글랜드를 상대로 6대3이라는 스코어를 기록하며 ‘축구의 성지’ 웸블리에서 잉글랜드를 굴복시켰다. 1년뒤 잉글랜드가 또 다시 WM시스템을 사용하며 복수를 다짐했지만 또 다시 헝가리는 잉글랜드에게 7대1이라는 절망적인 스코어를 선사했다.
:: 역사상 최강의 대표팀

세계 1,2차 대전의 아픔을 축구로 풀어나가려 했던 헝가리는 1948년 가을부터 당국 국방부 장관을 중심으로 꿈에 그리던 축구를 현실화 하기 시작한다. 세베슈 감독이 끌어 모았던 푸슈카시, 코치시, 치보르 같은 스무 살을 막 넘긴 선수들은 당국과 대중들에게 우려를 불러일으켰지만, 결과는 정 반대였다. 1952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오라는 당국에 지시에 금메달을 가볍게 목에 걸어왔고, 1953년 11월 25일 ‘축구의 성지’ 라고 불리는 웸블리에서 6-3 이라는 스코어로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다. 이후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잉글랜드는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원정경기를 떠나지만, 7대1이라는 처참한 스코어를 기록하며 고국으로 돌아갔다.
헝가리 대표팀의 절정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발휘됐다. 헝가리는 2조에 속해서 서독, 터키, 한국과 같은 조에 편성이 되었는데, 한국을 9대0, 서독을 8대3으로 각각 대파하고 손쉽게 월드컵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인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0대9라는 참혹한 패배를 안겨준 팀이 바로 ‘1950년대의 헝가리’였다) 8강에서는 브라질을 만나 4대2로, 4강전에서는 우루과이를 만나 또 다시 4대2로 격파고 결승에 진출한다. 예선에서 8:3으로 격파 했던 서독을 만나 8분만에 2골을 넣었지만, 결국 리그를 지키지 못하고 2대3 역전패를 당해, 악몽이 시작되었다.
:: 축구 위에 있던 국가, 헝가리

국가라는 하나의 테투리 안에 축구가 속해 있어야 했지만, 헝가리 대표팀은 시작부터 당국 정권에 의해 설립되었던 팀이었다. 1950년대라는 시기적 특성에 제한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실제로 헝가리 대표팀이 전 세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때, 나라에서 선수들이 망명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했다.
1956년 10월 23일 헝가리 시민들이 공산당의 독재와 공포 정치에 반대해 자유를 갈구하는 목소리를 내며, 헝가리 혁명이 시작됐다. 전쟁이었다. 민중들에게 정권을 빼앗기 공산당은 소련에게 탱크부대를 지원받아 혁명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소련과 헝가리 국군에 의해 혁명군 2,500명이 사망이 했고 약 13,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혁명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이 여파로 대표팀 주축 선수들이 헝가리를 떠나면서 세계 최강 자리를 놓고 다투었던 대표팀은 그야말로 한 순간에 공중분해 되어 버렸다.
1950년대의 명성은 너무나도 멀어졌다. 70,8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 중위권을 오가던 헝가리는 어느덧 축구 변방국으로 추락해버렸다. 44년만에 유로 2016 진출을 성공한 헝가리의 과거를 재조명하며, 유럽축구선수권이 헝가리 선수들에게 어떤 의미의 대회로 다가올지를 예상할 수 있다.
글,그래픽 = 노영래 기자
사진 = 게티이미지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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