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아이들의 온전한 세계

입력 2021. 1. 22.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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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작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주인공 모모는 자신이 열 살이라고 믿는 아이다.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모모는 파리 빈민가에서 살고 있다. 친부모도 모르고 자신의 생일도 정확히 모른다. 다만 회교도 이름인 모하메드에서 줄인 모모라고 불린다. 모모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로자 아주머니의 7층 집에서 많은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로자 아주머니는 유대인이자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생존자다. 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뒤 몸을 팔아 살아가다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이 남긴 많은 아이를 돌보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군에게 받은 트라우마와 계단을 오르내리기 버거운 육중한 몸은 그녀의 삶을 고단하게 한다. 종종 힘에 겨워 울기도 하지만 아이들만큼은 양육비가 밀려도 내색하지 않고 사랑으로 보살핀다. 가끔 비밀의 장소이자 안식처인 지하실에서 심신의 안락을 취하며 가장 빛났던 시절로 돌아갈 뿐이다.

모모는 자연스럽게 거리의 아이로 성장한다. 학교는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아이를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빈민가 거리는 차갑거나 매정하지 않다. 모두가 그의 선생님이자 친구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계란을 훔쳐도 주인은 계란을 하나 더 내어주고 그를 안아준다. 여든다섯 살의 하밀 할아버지는 글을 가르치며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냐”는 질문을 받아주는 대화 상대다. 그는 육십 년 전 약속했던 사랑을 아직도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며, 상대방의 이름까지 잊을지언정 마지막까지 사랑을 지키는 모모의 가장 좋은 친구다.

모모는 생과 행복에 대해서 잘 안다. 모모는 행복을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자, ‘손 닿는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가정을 질투하고 일원이 되고 싶은 유혹에 빠져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떠날 수가 없다.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다는 말에는 울음으로 답하며 모모는 사랑에 눈을 떠간다.

모모가 성장하는 파리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섞인 도시다. 그러나 소설 속 거리에서 갈등은 없다. 아프리카계와 아시아계 주민, 회교도와 유대인, 매음굴과 성 소수자까지 더불어 살아가는 빈민가가 주 무대이지만 서로 존중하며 조화롭게 살아간다. 뿌리 깊은 갈등은 간접적으로 언급될 뿐 그들 사이에서는 농담의 소재다. 아이들 또한 사랑으로 자란다. 지독한 가난과 처절한 과거가 있는 곳이지만 아무도 진정으로 불행하지 않다.

로자 아주머니가 병에 걸려 죽어가자 빈민가 이웃들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내놓기 시작한다. 아프리카계 사람들은 몰려와 그녀를 위한 주술을 행한다. 연로한 의사인 카츠 선생님 또한 별다른 대가 없이 그녀를 진료한다. 동성 성매매를 하는 여장 남자인 롤라 아주머니는 그녀의 살림을 도맡고 아이들을 대신 돌본다. 회교도 모모에게도 로자 아주머니는 유대인이 아니라 사랑하는 한 명의 인간이다.

시름시름 앓던 그녀는 결국 세상을 떠난다. 진정으로 사랑받았던 모모는 그녀를 버릴 수가 없다. 모모에게 그녀는 생의 모든 것이다. 모모는 그녀를 지하실로 데려가 생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꾸며 놓는다. 마치 그녀와의 시간이 영원할 것처럼. 시신과 3주간을 같이 보낸 모모는 마침내 사람들에게 발견된다. 아이는 마지막 단락에서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한다.

아이들에게 ‘사랑할 사람’은 절대적이다. 소설은 모모의 비극적 행동으로 마무리되지만 그 과정에서 모모는 한 번도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그 세계에서는 모두가 ‘사랑’하며 모모에게는 ‘사랑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부모일 필요도 없는 ‘사랑할 사람’은 아이에게 온전한 한 세계이자 모든 것이다. 하지만 ‘사랑할 사람’이 폭력으로 세계를 구축하면 세상은 아이에게 지옥이 된다. 두렵고 의지할 곳 없는 생애들, 그들은 어디에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두려운 세계 안에서만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작가는 차라리 모모가 행복한 아이였다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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